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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Dec 23. 2023

갑의 시선으로

나는 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물을 끓이며 습관적으로 라디오를 켠다. 때마침 비발디의 <사계> 중 ‘겨울’ 전 악장이 흐른다. 그 화음에 맞춰 커피도 내려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원두는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다. 그리고 큰 보온병에 보리차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붓는다. 차가 충분히 우러나길 기다리며 잠시 마음을 정돈한 후 책상에 앉는다.     


마음이 정돈되기는커녕 어수선하기만 하다. 책상 위의 난장판이 내 모습 딱 그대로이다. 자신을 속이지 마.

    

올해 마지막으로 지원했던 일자리에 어쩌다 서류가 통과되어 면접을 보고 왔다. 사실은 서류심사에서부터 통과되는 일이 거의 드물어서 다른 공고를 잘못 보고 이미 떨어진 줄 알았는데,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가 와서야 알았다. 웬일로 서류가 통과된 건지 오히려 의아할 지경이었다. 면접의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경험 삼아 재미 삼아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녀왔다. 심장은 여전히 콩닥거렸지만 그래도 다른 때보다 여유 있게 대답은 잘했는데, 역시나 떨어졌다. 이것으로 올해 내 마지막 미련도 여지없이 떨어져 나갔다.     


남편이 말한다. 왜 항상 자신을 을의 입장에 좁게 낮춰 두느냐고. 왜 여전히 누구 밑에 들어가 을이 되려고 하느냐고. 의식을 주체적으로 고쳐먹으라고. 이제 그럴 때가 아니라고. 자신감과 배짱을 가지라고 말하지만 을의 습성이 쉬이 버려지느냐 말이지.


나는 갑이다!

나는 갑이다!

나는 갑이다!


이 모든 것이 생계와 안정을 향한 몸부림이다.




한동안 열심히 인터넷으로 부동산을 뒤졌다. 처음엔 거시적 관점에서 경기 남부 전체를 두고 이리로 가야 하나 저리로 가야 하나 집을 빼서 작은 곳으로 줄여 이사를 갈까도 생각했다. 그런데 날씨만큼이나 꽁꽁 얼어붙은 부동산 현황 속에서는 우리가 갈 만한 곳이 없었다. 또 한 번 마음을 접었다. 이렇게 몇 번이고 떨어져 나가고 자꾸 접히고 접히면 마음이 남아나질 않을 것 같다.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크게 일을 벌이고 옮기는 것도 비용과 위험 부담이 크다. 현상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시 점차 미시적 관점으로 좁혀서 찾아보기 시작했다. 아주 작게 근처 가까운 곳부터 최소한으로 시작해 보기로 한다. 혹시나 망해도 괜찮을 만큼. ‘이 정도는 공부 값이다’ 여기고 다시 시작할 여지가 남아있을 만큼.      


현재 우리의 거점인 우리 집 작은 방을 중심으로 반경 1킬로미터의 원을 그리면 그중에 절반은 허허벌판이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와 시가 만나는 경계에 있다 보니 개발이 아직 안 되어 논밭이 펼쳐지고 편의시설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모이거나 머무를 만한 환경이 아니라서 입지가 안 좋다.      


현재 우리의 입지가 말 그대로 허허벌판이다


처음에는 비상주 공유 오피스도 생각했다. 한 달에 수수료 3만 원에서 5만 원 정도를 내면 주소만 빌려주는 시스템이다. 그러나 우리는 실질적인 공간이 필요했다. 집집마다 방문하다 보니 가게가 어디에 있느냐고 많이들 물어본다. 남편도 계속 말한다. 창고가 있어야 한다고.


지금은 당근이나 숨고 등 플랫폼을 기반으로 홍보를 하고 있지만, 광고비가 꾸준히 제법 나간다. 그리고 제 살 깎아 먹는 가격경쟁이 너무 심하다. 그마저도 비싸다고 자꾸 깎는다. 거래가 성사된 것도 아닌데, 의뢰인이 견적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돈이 날아간다. 보기만 했는데 편도 버스비가 휘발되는 것이다. 견적을 의뢰한 사람도 더 저렴한 견적이 있으면 메뚜기처럼 날아가 버리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며칠 후 같은 견적의뢰가 다시 또 올라온다는 사실이다. 터무니없이 후려치는 가격은 뻔하다. 일을 직접 해보면 알게 된다.      

한참 겪어보니 블로그 홍보가 가장 효과적이고 합리적이다. 실질적인 케이스들이 꾸준히 쌓여나가니 서로 간에 믿음이 간다. 그리고 무엇보다 홍보 비용이 들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검색해서 직접 적극적으로 문의를 해오는 고객들은 무턱대고 가격부터 후려치지도 않는다. 초창기에는 플랫폼 기반으로 돈을 들여 노출을 많이 시키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블로그 홍보가 최선이다. 효과도 빠르고 직접적이고 좋다. 단지 필요한 건 자신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이다. 현장에서의 과정 사진도 당연히 필수다. 게다가 블로그는 아무래도 스토리를 어느 정도 가능한 매일 써야 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꾸준히 이어가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 어느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글짓기’까지 해야 하니 의식적인 노력이 꽤 필요한 일이다. 남편은 잠을 줄이고 새벽 일찍 일어나 그 숙제를 해내고 있다.    

 

블로그 홍보를 기반으로 하고 네이버 플레이스에 검색해서 간판이 걸린 가게까지 나오면 금상첨화인 것이다. 그래서 열심히 눈에 불을 켜고 찾는다. 우리의 간판을 걸 수 있는 그 마땅한 자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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