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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Mar 28. 2024

무장해제도 재능이랍니다

사람은 사람으로 치유된다


이곳에서는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나의 역사나 나의 본캐가 필요 없다. 나이도 경력도 묻지 않고 어디에 사는지 집에 숟가락은 몇 개인지도 묻지 않는다. 책임이나 걱정을 데리고 퇴근할 일도 없다. 어제의 후회도 내일의 불안도 없다. 오직 오늘의 지금에 충실하면 된다.


한 편으로는 뿌리내릴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것이 오히려 묘한 해방감과 위로를 주기도 한다. 내가 어떤 상처와 과거를 가졌는지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곳에서만큼은 그냥 나는 지금의 나로 충분하다. 부족함도 불편함도 없이 조화롭다. 그 사실이 이토록 편안하다니. 사람들이 가끔씩 모든 걸 버리고 아주 멀리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이해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관계 속에서 친해지기를 바라는 만큼이나 침해당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피동이지만 고독은 능동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보조업무를 하고 있지만 소리 없이 보완도 한다. 보려고 하지 않아도 종종 서류들 사이에서 빠지거나 뭔가 바뀐 듯 이상한 부분이 저절로 떠올라 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십수 년 서류업무를 거쳐온 덕분에 터득된 능력일 것이다. 영화 <인턴>에서처럼 이곳에서 나는 사실상 나이로 보아도 경력으로 보아도 시니어 인턴쯤에 가깝다. 그렇다고 내가 나설 자리나 주제는 못 된다. 가만히 앞뒤 흐름과 분위기를 파악하며 기다렸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일을 부탁한 담당자에게 살포시 다가가서 "여기는 이렇게 되어있는데 여기는 또 이렇게 하면 될까요?" 확인하는 듯이 소리를 낮춰 다시 되묻기만 한다. 바로잡을 기회를 담당자에게 넌지시 넘겨주는 셈이다. 이미 알고 있다고 해도 그냥 알아서 하기보다는 물어보며 하는 것이 훨씬 좋다. 어쨌든 나는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제 갓 석 달을 채운 문외한이니까.



서류 분류작업을 하다가 종이에 손가락을 살짝 베었다. 아픈 것보다는 일하는데 자꾸 걸려서 불편했다. 내가 늘 먼저 이것저것 부탁하는 우리 팀 쌤에게 혹시 밴드가 있느냐고 물었다. 마침 그 말을 들은 내 옆자리 막내쌤이 자기한테 있다며 얼른 밴드를 꺼내 내민다. 역시 돌봄팀 쌤들은 360도 서라운드 청력을 지녔다. 밴드만 붙이고 마저 일을 하려는데 우리 팀 쌤이 갑자기 장갑을 챙겨준다. 일부러 바쁜 와중에 여기저기 물어서 라텍스 장갑을 얻어다 준 것이다. 게다가 대각선 저 멀리 있는 쌤한테서는 실리콘 골무까지 얻어다 챙겨준다.


"쌤 손은 소중하니까."


심쿵했다. 난 역시 쉽게 감동이 쳐발쳐발 넘치는 사람이다.


벌써 몇 시간 지나서 이미 나는 잊어버렸는데 퇴근할 때도 손 괜찮냐고 또 물어봐 준다. 하루 사이에 소문이 나서 나와 교대로 근무하는 화목 담당 쌤한테서까지 괜찮냐고 걱정하는 메시지를 받았다. 이깟 손가락 좀 베인 게 뭐라고. 평소 설거지나 청소를 할 때도 고무장갑을 잘 쓰지 않고 맨손으로 하는 나인데. 나 자신보다도 내 손을 더 걱정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니 신기할 지경이다. 역시 우리 팀 쌤들 너무 사랑스럽고 다정하다. 뭘 부탁하고 물어보기에도 진입장벽이 정말 반지하 수준이다. 언제든 다가가도 어렵지 않고 부담이 없다.


베인 건 손가락인데 마음에까지 붕대를 칭칭 감아주는 경이로운 친절을 또 발견하는 순간이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주는 사랑 따박따박 고이고이 받아먹고 마음을 살찌운다. 찍혀서 패인 자리에 새살이 돋는다. 사람이 독이기도 하지만 약이기도 하다. 사람은 결국 사람으로 치유된다. 식욕도 살아나는 것 같다. 이건 봄이라서 그런가? 어쨌든 사랑의 무게추가 자꾸만 더 기운다. 엄살도 자꾸만 늘 것 같다. 쌤들이 또 "호~" 해주겠지. 어떡해. 너무 좋아. 그렇다고 이게 막 아무나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그렇게 다 되는 게 아니다. 그동안 햇살나무 정책을 열심히 펼쳐서 자신들도 모르게 내가 다 무장해제시켜 놓은 덕분이라고 우겨본다. (나도 안다. 이분들은 원래 이렇다는 걸.) 사람이 곁에 머물기를 바란다면 내가 먼저 곁을 내어주어야지. 다정도 기브 앤 테이크다. 주는 게 먼저다.


받았으니 갚아야지. 되로 받았으니 말로 갚아야지. 부담스러우려나? 나는 수줍은 듯이 원두커피 드립백을 살짝 건넨다.


“매번 고마워요. 쌤!”


잘했어. 아주 자연스러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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