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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Apr 04. 2024

기부 앤 테이크

나도 우아하고 싶다

나도 고상하게 앉아서 우아하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아닌 척해봐도 나의 뿌리는 노동이다. 가장 부실하고 나약한 나의 한계인 몸으로써 일궈내는 것들이야말로 나의 본질이다. 나의 숭고함과 우아함은 결국 노동으로부터 온다. 마치 글 한 줄을 쓰기 위해 이 모든 걸 해내고 견디어 이겨내는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며칠 앓았다. 아직 앓고 있다. 근무날짜도 미룰 만큼. 본의 아니게 3개월 수습을 마치고 4월이 시작되자마자 근무 스케줄을 변경하다니. 마치 새 학기 적응을 무사히 마치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아프기 시작하는 아이들 같다.  예전의 나였다면 무리해서 출근했을 것이다. 꾸역꾸역 일했을 것이다. 책임감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나를 뒤로 미뤄두었을 것이다. 조금 아프다고 공동의 약속을 어기거나 바꾸는 건 나약한 정신머리라 여기면서. 그런데 이번엔 엄살을 택했다. 나 많이 변했네. 융통성이 생긴 것으로 해두자.




어제는 출근해서 평소보다 조금 더 가볍고 느슨하게 일했다. 아직 다 회복하지 못해 남은 체력을 안배해야만 했다. 다행히 선생님들도 무리되지 않는 업무를 나누어 주었다. 그중 하나가 통장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넘겨준 통장들을 받고 보니 서른 개는 훌쩍 넘어 보인다. 각각의 사업별로 이름표를 붙이고 짝을 맞춰 통장집에 끼워 넣었다. 다 꽂기도 전에 통장집이 만삭이 되었다. 매번 느끼지만, 다 기억하지도 못할 만큼 정말 많은 유관기관들과 사업들, 프로그램들이 있다. 국비와 도비 예산도 있지만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기부금도 눈에 띈다. 그리고 또 매번 서류처리를 할 때마다 발견하는 사실은 모든 통장내역을 한 줄도 빠짐없이 증빙한다는 점이다. 각 사업비별로 정확하게. 단 하나도 빠뜨리거나 생략할 수 없다. 압축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내가 낸 세금도 있고, 내가 기부하고 있는 유관기관도 있다. 그래서일까? 남의 일 같지 않고 더 관심이 간다. 혹시나 허투루 쓰이지는 않을까?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차를 타고 가다가 익숙한 기관명이 눈에 띄어 반가운 마음에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정말 다양한 관련 기관이나 단체들이 있는데 그중에 한 곳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지도 않겠느냐고. 그랬더니 남편이 한 마디로 정리했다. 돈을 벌면 된다고. 돈을 많이 벌면 굳이 그곳에 가서 어떤 역할을 하지 않아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돈?! 나는 눈을 비비며 남편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괄목상대(刮目相對)는 바로 이럴 때 쓰는 표현이구나. 대놓고 돈 이야기를 하는 남편이 낯설게 느껴졌다. 남편도 많이 변했구나.




솔직히 내가 기부를 시작한 건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다. 금액도 말 꺼내기 부끄러울 만큼 너무 극미하다. 늘 부족하다고 느끼며 한 편으로는 회의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주변에는 자동이체를 걸어놓고 그냥 잊어버리고 있을 정도로 당연히 나가는 돈으로 여길 만큼 아주 오래도록 기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가끔 지진이나 산불, 자연재해나 전쟁 등 긴급구호에 필요한 일시후원도 하지만, 내가 꾸준히 하기로 선택한 기부는 사각지대에 놓인 십 대 소녀들을 위한 후원사업이다. 정말 단순하고 원초적인 동인에서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나의 결핍에서 비롯되었다. 막 초경을 시작할 때 속옷이나 생리대가 필요하다고 누구에게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당황스러움과 부끄러움은 말 그대로 또 하나의 첫 경험이다. 그때 모든 소녀 곁에 엄마나 여성 보호자가 반드시 다 있는 것은 아니다. 없는 경우도 의외로 많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돌봄의 대상자로서 돌봄을 누리고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누군가를 돌봐야 하는 가족돌봄아동(역돌봄)이 많은 것도 현실이지 않은가? 가려지고 잘 보이지 않아 우리가 잘 모를 뿐. 그때의 나 역시 누군가의 돌봄이나 손길이 필요했었던 것처럼 지금의 그런 소녀들에게 이웃집 언니나 이모가 되어주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넉넉해서도 아니었다. 거창한 마음도 아니었다. 익명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커피 한 잔 값을 더 계산하고 나누는 문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그럼 나도 커피 한두 잔 나누는 가벼운 마음으로 해봐야지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실제로 밖에서 사 먹는 커피값을 줄여서 기부를 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 커피 한 잔이 맑은 물이 되고, 빵이 되고, 생리대가 되고, 약이 되거나 옷이나 담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생명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늘 더 하고 싶다. 그러면서 또한 나는 한 가지 질문에 늘 부딪힌다. 내 가까운 이웃에 먼저 해야 할까? 아니면 저 먼 나라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해야 할까? 이 우문에 누군가 현답을 해주었다.


"내 가까운 바로 곁에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도 먼 곳의 어려운 이들도 돕고 구해야 한다고."


그 말을 듣고 보니 남편의 말 또한 맞아떨어졌다. 돈을 많이 벌면 되는구나. 그럼 다 할 수 있겠구나. 저 수많은 통장 내역과 수입결의서에 나도 한몫할 수도 있겠구나. 그러려면 역시 일을 해야지. 엄살 피우지 말고 열심히 일해서 돈 많이 벌어서 기부 더 많이 해야지. - 무서운 알고리즘! '기부' 좀 검색했더니 SNS에서 곧바로 무슨 반지와 팔찌를 준다며 온갖 종류의 기부단체를 보여 준다. 나두 뱃지 받은 적 있다구! (이런 홍보물도 사업비 지출에 다 포함되는 거 아시죠??)     


아무튼, 기부 앤 테이크 하자! 무엇을? 우아함을! 리 함께 름다운 세상을!

역시나 내가 우아해지는 방법은 노동이었어.


* 카페 소스페소 (Cafe Sospeso) '모두를 위한 커피' : 이탈리아의 커피 나눔 문화. 커피 한 잔을 마신 뒤 두 잔 가격을 지불하여 누군지 모를 타인을 위해 커피 한 잔을 남기는 일.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커피 한 잔을 기부하며 시작한 운동.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어라'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其心)

필립 C. 스테드 <지혜로운 늙은 개에게 창이 되어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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