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맞는데 딱히 이유는 없었습니다

판타지로 도망칠 수 밖에

by 햇살나무 여운


사랑에도 딱히 이유가 없듯이

미움에도 이유는 없었습니다.

이미 대상을 골랐으니

그 앞에 모든 것이 명분이 됩니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마침 눈앞에 보이는데

하필 약하다는 게 이유일테죠.


누군가는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랑이 마구마구 샘솟는다는데

또 다른 누군가는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그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단전에서부터 미움이 솟구친다고 하니

낸들 뭘 어찌하겠습니까


마음에서 치워버리는 것이야 제 힘 밖이니

눈앞에서라도 사라져 줄 수밖에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누군가는 천국을 펼치고

누군가는 지옥을 짓습니다

그리고 그 지옥에는 방관과 동조가 우글거립니다.

비수가 비처럼 쏟아지고

사슬 없는 족쇄가 내 발목을 옥죄어 옵니다.

벗어나야 함을 알면서도 한 걸음도 떼지 못합니다.


그 순간 한 존재가 나비의 날갯짓처럼

홀연히 나타나

높고 견고한 빙벽이 되어 그 순간을 막아섭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돌아서더니 제 앞에서는

벚꽃 흐드러지게 핀 봄산이 됩니다.

내게 숨살이꽃과 혼살이꽃을 건넵니다.


구원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매일 그 꿈결에 안도하며 깨어납니다.



keyword
이전 04화하늘 외출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