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수리 이야기에 갑자기 웬 벽돌책? 브런치북 카테고리를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닌가? 아니다. 이 이야기는 <뛰는 사수 위에 나는 조수>가 맞다. 나도 몰랐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과 내가 좋아하는 아슬란이 나오는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를 여기서 만나다니!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러나 감탄은 잠시, 현장은 몹시도 위태로운 상태였다. 곧 무너질 듯 내려앉은 싱크대 상부장을 벽돌책들이 아슬아슬 힘겹게 떠받치고 있었다. 변신의 변신, 힘나니아! 벽돌책의 뜻 밖의 쓸모?
딸만 셋이라는 세입자분 댁에서 만난 취준생 큰 따님께 저 두꺼운 <나니아 연대기>를 읽었느냐고 물으니 다행히(?) 안 읽었단다. 나도 안 읽었어요. 영화는 다 봤지만. 함께 웃으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녹이고 작업을 시작한다.
막상 손을 대기 시작하니 현실은 더 처참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정말 위험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집주인의 통화에서는 그냥 상부장 하나만 조금 고정해 주면 된다고 했었는데 역시나 그게 아니었다. 속은 다 터져서 쳐지다 못해 주저앉아 쏟아질 기세였고, 그 무게를 못 견디고 옆에 나란히 이어진 상부장까지 전체적으로 많이 내려와 있는 상태였다. 겨우 매달려있던 천장몰딩도 우리가 손을 대기 시작하자 가을바람에 낙엽 지듯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내가 직접 겪었던 지금까지의 현장 중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싱크대 전체가 흔들리고 무너지는 줄 알았다. 사수는 어쩌자고 이런 일을 맡았는지, 손대기 전에 그냥 못한다고 물러날 것이지. 물러나는 것도 용기다! 정말로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일을 가리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사수는 답할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며 옆칸에 있는 살림까지 모조리 꺼내고서는 여기저기 흔들어대기 시작한다. 나니아와 함께 나란히 상부장을 떠받치고 있는 내 어깨와 무릎도 흔들리며 내려앉는다. 빈말이 아니라 사수와 조수의 키가 실제로 날마다 줄어들고 있다. 이건 나이 먹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노화과정이라고 하겠지?
세상에 이럴 수가! 싱크대 상부장을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온몸으로 깨달았다. 당장 우리 눈에는 안 보이지만 뒤편으로 가스배관이 지나가는 상부장이 아무런 지지목 없이 완전히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내 집이라면 과연 이렇게 공사를 했을까? 양쪽의 상부장이 그 무게를 버티고 버티다 세월 속에서 밀리고 지치고 앞으로 쏟아져 기울어진 것이다. 물론 너무 무거운 살림들을 많이 올려 둔 탓에 선반이 터지고 주저앉은 원인도 있다. 무거운 그릇들은 부디 아래로!
가장 상태가 심각한 처음 상부장을 떼어내어 뒤편에 지지목을 보강한 후 부서진 상부장을 재조립하고 안전하게 나사를 추가로 더 박은 후 다시 매달았다. 그런데 달고 보니 옆상부장과 단차가 생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사수에게 말하니 처음에는 맞다고 우긴다. 아니라고! 이상하다니깐! 자신이 맞다고만 우기지 말고 인정하고 다시 보란 말이에요! (남편들은 마누라 말을 왜 이렇게 안 듣는지 모르겠다!) 쳐진 상부장을 끌어올린다고 올렸는데도 이미 전체적으로 너무 많이 내려앉았던 것이다. 다시 떼어내고 옆상부장들을 전체적으로 더 바짝 끌어올린 후 다시 작업을 한다.
"학생! 책이 더 필요해요!"
상부장이 원래대로 자리를 잡은 후 더 밀리지 않도록 사수는 상부장과 창틀 틈새에 무게를 좀 더 지탱해 줄 수 있도록 버팀목을 잘라 덧대고 실리콘까지 보강해서 마무리를 거듭 꼼꼼히 한다. 이미 터진 흔적은 어쩔 수 없고 아름다움보다는 안전이 우선이다. 마지막으로 천장몰딩을 끼워 맞추고 흔적 없이 타카로 박음질을 한다.
수고했어, 나니아!
작업을 마치고 돌아와 집주인에게 결과 보고를 하고 비용을 청구하니 또 깎아달라고 앓는 소리를 한다. 우리 앞에서 한다는 말이 너무 힘들단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뭘 모르셔서 그럴 것이다. 직접 현장을 보고 작업 과정을 봤더라면 그런 소리를 못할 텐데. 게다가 그 비싸다는 동네 곳곳에 소유하고 계신 아파트가 우리가 가본 곳만 해도 몇 채이신데 말이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정작 더 중요한 건 이 정도면 솔직히 싱크대를 새로 해야 한다. 그게 맞다. 내가 살고 있는 내 집이면 분명 새로 했을 것이다. 기껏 보람차게 싱크대 심폐소생술을 하고 돌아왔는데, 그럴 때마다 진이 빠지고 한숨이 나온다. 왠지 키가 더 줄어드는 기분이다.
고구마 한 바구니
홍시와 단감
사과와 포도
고등어 세 마리
굴비 한 상
갈비찜에 이어
장뇌삼주까지!
게다가 이번엔 흑염소탕에 수육까지 대접받았다. 가족이 함께 식당을 개업하면서 계속 속 썩이던 문제를 속 시원하게 해결해 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밥 한 끼 차려드리고 싶었다고 하신다. 때마침 기운 빠진 지금이다. 처음 먹어봤다. 사실 이런 걸 잘 못 먹는다. 한때 채식을 할 때도 있었지만, 고된 몸노동 끝에 가릴 게 무엇인가. 정말 귀하게 감사히 모처럼 맛있게 속 든든하게 많이 먹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쓰다듬으며 주문을 외운다. 수리수리 마수리! 집수리 맘수리 몸수리!
사수가 말했다.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을 먹는 일이라고! 자신의 의지라고! 좋은 음식이나 약을 찾아 먹더라도 진심으로 스스로 마음 깊이 건강해져야겠다고 좋아져야겠다고 마음을 먹어야만 바뀌기 시작하고 좋아지기 시작한다고.
물론 박카스, 커피와 음료, 빵이나 간식, 생수는 이제 뭐 셀 수도 없이 많다. 몇 번 방문한 집에서는 사수가 커피를 먹지 않는다는 취향까지 여전히 기억하고 배려해서 챙겨주는 단골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도구를 좀 아는 아저씨 고객님들 중에는 작업할 때 가져다 쓰라며 자신의 갈비뼈 한쪽을 내어주듯 충전식 랜턴이나 바이스플라이어를 선뜻 내어주신 분도 계셨다.
의뢰인이 건설회사 다닐 때 쓰시던 유서 깊은 바이스플라이어
살아오면서 무릎이 꺾이고 (도가니가 나가고) 주저앉을 때도 있고 지치고 고단할 때도 많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나며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는 따듯한 믿음으로 속을 채운다. 그렇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게 내가 항상 삶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는 까닭이다.
12월을 코앞에 둔 11월의 마지막 휴일 아침, 이렇게 조금 특별한 연말정산을 해보면 어떨까? (받은 게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데...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이 가물가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