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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Nov 17. 2024

버리지 못하는 마음

남의 일 내 일 남의 집 내 집

딱히 정해진 휴일의 개념이 사라진 지 오래, 사수는 일요일인 오늘도 아침 일찍 출동했다. 그래도 오늘은 조수를 두고 혼자 나섰다. 어제도 그제도 집에 돌아오니 밤 열 시가 다 되었다. 제때 끼니를 챙기기도 쉽지 않은 것이 요즘 일상이다. 30대에도 새벽 다섯 시부터 새벽 한 시 넘어서까지, 겨우 두세 시간 자면서 초인적인 삶을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남겼던가?


요즘 다시 열두 시간에 가까운 중노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때와 지금의 가장 큰 다른 점은 남의 일이 아니라 온전히 내 일, 우리 일을 한다는 것. 예전에 남의 일을 할 때도 물론 같은 마음으로 했었다. 그러나 남의 일을 너무 내 일처럼 해서 돌아오는 결과는 결코 내 맘 같지 않다는 깨달음뿐이었다.


며칠 전 늦은 밤 고단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사수에게 말했다. 젊었을 때 일찍부터 이렇게 했더라면 참 좋았겠다고. 고생한 만큼 보람도 있고 삶의 기반도 좀 잡고 했을 텐데 하고 말이다. 사수가 말했다. 아니라고. 그 모든 걸 지나왔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거라고. 조수도 그 말에 수긍한다. 어떤 의미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살아낸 시간들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무사히 지금을 살고 있음에 감사함 또한 잊지 않는다. 다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을 떨칠 수는 없다. 입 밖으로 내진 않지만, 뭘 저렇게까지 할까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게다가 체력의 한계를 넘기고 나면 솔직히 서 있을 힘도 없고, 짜증을 낼 여력도 없다. 구시렁거리던 잔소리가 급격히 줄어들고 아무 데나 철퍼덕 주저앉는 조수의 모습을 보며 사수가 한 마디 한다. 다크해졌다고. 그래, 이보다 더 흑화될 수는 없다. 다른 여자를 안 겪어봐서 뭘 몰라서 저러지. 어느 다크한 여자가 힘들다는 말 대신 달이 예뻐요, 단풍이 예뻐요 한답디까! 칭찬은 못할망정!


삐뚤어질테다!


오늘은 밀린 살림을 하면서 오래도록 벼르고 벼르던 냉장고 청소까지 마침내 해냈다. 냉장고 안에 붙박이처럼 자리잡고 있던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액체들과 검은 봉지들! 언제인지도 모르게 먹다 남은 음식물까지 가볍게 싹 다 비운다. 유리 선반들도 하나씩 구석구석 말끔히 닦는다. 흑화된 내 마음을 비우고 닦듯이. 분리수거일을 놓쳐서 쌓여가는 재활용품들과 택배 상자들, 겨우 세탁해서 널기는 했는데 미처 걷어서 갤 시간은 없어 또 쌓여있는 빨래들과 철 지난 옷들. 남의 집은 그렇게나 열심히 고치러 다니면서, 정작 내가 살고 있는 내 집은 방치되고 있는 일상이 계속 마음에 거스러미처럼 걸리고 아팠다. 치워야지 치워야지 하다가 어느 순간 그마저도 지쳐서 미뤄두고 못 본체 한다.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냉장고 속처럼 마음의 문을 닫아 놓으면 안 보인다. 그리고는 검은 응어리들이 쌓여 가겠지. 언제 넣어두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어진 저 검은 봉지들처럼.


남의 집 남의 삶을 들여다보며 내 집 내 맘을 비추어 본다. 언제든 누구든 들여다 보아도 부끄럽지 않고 싶은데 겉과 속이 다른 내 모습, 내외일치되지 않은 일상이 오래도록 불편했던 거다. 솔직하게 다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아니었다. 곁을 내어주지 않는 그들이 서운하기만 했는데, 정작 속을 보여주지 못하는 쪽은 나였다. 입지 않는 옷들, 쓰지 않는 물건들. 버리지도 못하고 감춰두고 쌓아둔 마음들이 그토록 오래되었다.


이쯤 되면 이사를 가고 싶어진다. 이사를 가면서야 겨우 한 번쯤 버리고 비울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사를 가더라도 금세 또 지금과 같아진다는 사실을. 내가 바뀌지 않는 한 내 집도 내 삶도 고스란히 나를 닮고 비출 테니까. 남의 집 남의 삶이 부러워지기 시작한다면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돌이켜 볼 때가 되었다는 신호다. 이미 내가 가진 것들, 사람 삶도 충분히 아름답고 소중하다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삐걱거리고 흔들리는 문 한 짝 고치는 데에도 서너 시간이 걸린다. 단번에 속시원히 해결되고 정리되면야 좋겠지만, 모든 일에는 시간과 정성이 든다. 그토록 오래도록 쌓아왔다면 비우고 버리는 데에도 그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 순리이다. 오늘 하나 버렸으니, 내일 또 하나 버리면 된다. 집도 살림도 모든 걸 싹 다 버리고 새로 살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럴 수 없으니 쓸고 닦고 고치며 산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게 일상이고 삶이다.




그렇다면
민들레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찢어지고 뜯긴 곳도 풀칠하고 어루만지며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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