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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나무 여운 Dec 08. 2024

동티 예방 수칙

당연한 일상들


12월에 들어서고 추위가 시작되니 문이 안 닫힌다거나 온수가 안 나온다는 연락이 많다. 캄캄한 저녁 동네 인근 카페에서 출입문이 안 닫힌다고 급히 와달라는 연락을 받고 사수는 하던 작업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카페로 출동했다. 사이즈가 상당히 큰 상가 유리문에 플로우 힌지가 수명이 거의 다하여 녹슬대로 녹슬어 문이 내려앉은 모양이었다. 날씨도 추운 데다가 밤 10시 마감이라며 문만 좀 닫게 해달라고 한다. 위아래 부품들을 조이고 풀고 조절해서 겨우 움직이게 고쳐놓고 문을 닫을 수 있게 조치해 주었다.


작업을 마치고 카페 주인이 얼마냐고 묻길래 사수는 출장비 3만 원이라고 답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이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정말 그런가 보다. 카페 주인은 대뜸 부품이 들어간 것도 없고 그리 오래 작업하지도 않았으면서 뭘 3만 원이나 받느냐고 한다. 사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터진 모양이다. 그럼 됐다고, 안 받겠다고 하고 나오려니 커피나 한 잔 가져가라고 해서 사수는 "그럼, 와이프 가져다주게 부드럽고 달달한 걸로 한 잔 부탁한다."고 말하고는 종이컵을 받아 들고 또 커피가 식을 새라 부리나케 달려와 나에게 건넨다. 부드러운 라테인 줄 알고 뚜껑을 열어보니 너무 달기만 한 검은 설탕물이었다. 요즘 누가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어 먹는다고.


라테에 들어가는 우유마저 귀찮고 아까운 마음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인데, 만약 끝까지 우겨서 그 3만 원을 받았더라면 두고두고 못해도 30만 원어치의 살을 맞았을 거라고 사수는 농담처럼 말했다. 농담은 농도 짙은 진담이다.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내가 아무리 커피를 좋아한다고 해도 그런 마음으로 담아준 커피는 마시고 싶지 않았다.  


<돈의 속성>에서 '남의 돈을 대하는 태도가 내 돈을 대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같은 자영업자로서, 어찌 보면 같은 동네 장사로서 카페 주인은 방금 고객 둘 이상을 잃은 셈이다. 겨우 에스프레소 한 잔에 물만 가득 부은 아메리카노도 제값을 받고 식당 가서 추가로 먹은 공깃밥 한 그릇도 제값을 내면서, 손에 잡히는 물성이 아니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과정을 모른다고 손기술과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무시하는 태도를 만날 때마다 속이 상하고 안타깝다. 금액을 떠나서 최소한 자신의 돈이 귀한 만큼 남의 돈에도 같은 기준과 상식을 적용했으면 좋겠다.


사수가 그 카페에서 작업하는 한 시간 동안 지켜보니 손님이 딱 한 명뿐이었다고 한다. 요즘 자영업자가 어렵다는 사정을 모르지 않는다. 누구보다도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카페 주인이 차라리 사수에게 요즘 장사도 안 되고 많이 어렵다고 조금 다른 태도로 솔직하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사수는 근처를 지나가다 간판에 불이 안 들어온다고 하는 가게에 잠깐 들러 전선 몇 가닥 손봐주고도 기꺼이 그냥 빈 손으로 오는 사람이다. 오히려 자기 돈을 들여서라도 그 카페에서 커피와 빵을 사들고 왔을 것이다.             


어제는 하필 유난히 춥고 금요일 저녁이라 길도 막히는데 편도 20킬로가 넘는 거리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스위치를 꺼도 전등이 계속 번쩍거린다고 봐달라고 해서 가보니 아파트 나이와 같은, 한 번도 교체한 적이 없는 21년 된 형광등이었다. 손만 대도 그대로 바스러질 것 같은 상태였다. 사수는 갓 태어난 아기 만지듯 최대한 조심조심 작업해서 잔광을 잡아주고는, 뭐 또 딱히 들어간 재료도 없고 또 빈 손으로 돌아왔다. "LED로 교체하실 때 되면 불러 주세요." 그 한 마디만 남기고서 20킬로를 또 달려서.


조수는 도저히 사수의 계산법이 이해되지 않는다. 아니, 용서되지 않는다. 점점 화가 많아진다. 이러다 늘 화가 나 있는 헐크가 될 것 같다. 사수 덕분에 도를 닦게 된 조수는 마침내 그냥 이름을 붙여 부르기로 했다. 동티 예방 수칙이라고. 그 몇 만 원을 받고 돌아서서 10배가 넘는 미움과 원망을 받느니 안 받는 쪽을 택하겠다고.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그렇게 거칠고 험한 어두운 마음을 만나고 나면 꽤 한동안 힘이 든다. 실제로 연이어 작업이 꼬이거나 유난히 안 풀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늘 조심하고 삼가려고 스스로 경계하는 것이 사수의 원칙이다.         


날이 추워져서 사람들 마음도 움츠러들어서일까 요즘 연이어 동티 예방 주의보가 계속 발령 중이다. 플랫폼 리뷰를 보며 오히려 이런 사수의 약한 구석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다. 대놓고 시작부터 말도 안 되는 셀프견적으로 우겨대는 사람들을 보면 그냥 계속 모르고 싶다. 사람 마음 따위!  물성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마음은 힘이 세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물화(物化)된 것이 돈인가 보다. 욕심은 반드시 화를 부른다. 부정적인 마음은 부정적인 마음을 부른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만 보면 그들이 돈을 번 것 같고 이긴 것 같지만, 그들은 결국 우리를 잃었다. 사람을 잃었다. 이런 게 바로 소탐대실이다.


그와 같은 원리로 따뜻한 마음은 따뜻한 마음을 부른다고 그래도 계속 믿고 싶다. 마음의 온도가 떨어질랑 말랑 하는데 또 다른 누군가 우리 손에 핫팩을 쥐어준다. 누수로 인해 구멍 난 거실 천장을 메꿔주러 갔다가 젊은 새댁이 고맙다며 간식을 한 꾸러미나 챙겨준다. 종이백을 열어보니 종합선물세트다. 아무래도 아이 간식 같은데, 우리가 뺏어 먹네. 마음이 금방 훈훈해진다.  


이렇듯 사람 마음은 참 힘이 세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아주 사소하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다. 우리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은 힘이 없을지는 몰라도 그 마음들이 쌓이고 뭉치면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기적 같은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 마음들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또 일상을 살아간다. 날마다 힘들다 지겹다 말하면서도 자신의 하루하루에 책임을 다한다. 때로는 그 일상이 오히려 버티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배는 고프고, 폭설이 쏟아져 정전이 됐는데도 기어이 출근을 하고 학교를 보내고, 더는 미루지 않고 건강검진을 받고, 어김없이 돌아오는 월말에 대출이자를 갚고, 또 5일마다 돌아오는 주말에 그래도 한 숨 돌리고 싶고. 그 평범하고 당연한 일상이 우리를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해 준다.


아직 할 일이 있음에 감사하고, 지금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어 자유롭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따뜻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행복하고, 멀리서 전해오는 안부와 안녕 덕분에 반갑고 다행인 오늘이다. 이 작은 온기의 조각들을 모으고 모래알처럼 반짝거리는 흔해빠진 작고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서 그저 별 것 아닌 듯 매일 반복되는 지극히 평범한, 그래서 더없이 소중한 일상을 지킬 것이다. 삶을 삶으로써.  





프랑스 니스에서 평온을 전해온 친구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 동티 : 땅, 돌, 나무 따위를 잘못 건드려 지신(地神)을 화나게 하여 재앙을 받는 일. 또는 그 재앙.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공연히 건드려서 스스로 걱정이나 해를 입음. 또는 그 걱정이나 피해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



https://youtu.be/Mq49K7Td3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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