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36 댓글 2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3. 나중을 버린다

1일 1버림 일지

by 햇살나무 여운 Jan 08. 2025


그냥 한다.

즉시 한다.

지금 한다.

다시 한다.

반복한다.

기록한다.



처음엔 서툴고 제법 오래 걸린다. 당연하지. 이제 막 새로운 시작이니까. 몸에 익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자리 잡히면 속도가 붙고 걸리는 시간도 줄어들 것이다.


조금만 해도 힘이 들고 자꾸만 딴생각이 든다. 한 자리에서 한 가지를 끝까지 마무리짓지 못하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한다. 설거지하다가 생각나서 장볼 거리를 메모하고, 설거지하다가 화초에 물을 주고, 설거지하다가 떠오른 문장을 얼른 받아 적는다. 가만 보니 설거지는 참 창조적인 시간이다. 또 하다 보니 제법 잘하네? 나름 재미도 있어. 하긴 이래 봬도 평생 할 설거지 중고등학교 때 중국집 알바하면서 실컷 했다.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였어.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였던 거야. 좀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나 의외로 살림에 소질 있었어. 셀프칭찬도 콧노래와 어깨춤을 불러온다. 남한테 바라지 말고 스스로 하면 된다.


마음은 계속 바빠서 달려간다.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뭐든 허겁지겁 해치우려고 하는 습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는 누가 닦달하지도 쫓아오지도 않는데 밥도 얼른 먹어'치우고' 커피도 얼른 마셔'버리고' 버스 몇 분 기다리는 것조차 너무 아까워 조바심이 난다. 오직 목적지를 향해 진격하는 생존과 효율성만 남은 인간이 되어 있었다. 하루이틀 하고 끝낼 것도 아닌데 살림도 그렇게 해치워 '버리려고' 한다. War! War! 아니다. 워-! 워-! 나를 늦춰라, 제발!


이제 나는 그만 좀 허겁지겁 살고 싶다. 커피 한 잔도 천천히 충분히 음미하면서 오롯이 커피만 마시고 싶고, 책을 읽어도 단어 하나 문장 하나 천천히 담고 느끼면서 느긋하게 깊게 읽고 싶다. 숲이나 길을 걸을 때에도 목적지와 효율을 따지는 직진인간이 아니라, 정해진 노선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다가 길도 잃어 보고 그 덕분에 어쩌다 새로운 아름다운 길도 발견해 보고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는 배회하는 인간이 좀 되고 싶다. 과정을 즐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외일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변화는 인식에서 시작한다.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강렬하게 인식되면 그다음부터는 의식하기 시작하고, 하게 되거나 하지 않게 된다. 어떤 음식을 먹다가 한 번 호되게 체하거나 탈이 난 경험이 생기면 그 후로 그 음식이 꺼려지거나 안 먹게 되는 경우와 비슷하다. 오래전에 나의 길고 뾰족한 팔꿈치에 걸려 유리컵을 와장창 한 번 깨트린 이후로는 모서리 강박증이 생겼다. 이번 나의 인식의 계기는 부끄러워 죽을 뻔한 경우에 해당한다. 스스로 부끄러움을 못 본 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을 때 비로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나는 결코 '이런 사람'이고 싶지 않으니까.


살림에도 근력이 필요하다. 안 쓰던 근육을 써야 하니 인내와 고통을 수반한다.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인식하고, 그곳에 의식을 두고 집중한다. 나는 이제 새로이 '살림력'을 키울 것이다. 이 정도면 됐지 하고 슬며시 타협하고 싶어질 때 나중이란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지금 못 버리면 나중에도 못 버린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브런치 글 이미지 4


서랍을 비우다가 오래된 가죽끈 시계 목걸이를 발견했다. 뭐야? 언제 샀던 거야? 예쁜 쓰레기 참 많이도 샀다. 버리기도 아깝고 마침 다이어리 밴드끈도 낡았는데 리폼해서 커스터마이징 해볼까? 이렇게 버리고 정리하다가 뜻밖의 보물을 발견할 때도 있다. 분명 내 돈 주고 사놓고서 있는지조차 잊어버린 수많은 물건들. 정말이지 없는 게 없다. 이걸 다 돈 주고 샀구나 생각하면 어휴! (그래놓고서는 못 버린다. 이대로 못 보내! 숨긴다. 또 산다. 또 샀다......) 보물을 발견하면 추억도 소환된다. 그러다 보면 딴 길로 새기도 한다. 뭐 어때? 길을 잃고 배회하기로 했잖아. 창조적인 재미도 있어야 계속 하지.


나이에 맞지 않는 옷과 가방, 안 신는 신발, 안 쓰는 화장품, 안 먹는 영양제 등을 버리고 오래된 메시지와 이메일 또는 SNS를 비우고 정비한다. 특히 요즘처럼 화가 많을 때 정당한 분노는 꽤 효과 좋은 동기부여가 되기도 한다. 글쓰기에도 청소에도! 분노의 양치질은 잇몸 상하니까 분노의 걸레질을 하도록 하자! 새로운 친구도 생겼다. 그 이름 하여 돌돌이! 돌돌이는 이제부터 나의 단짝이다.


지지부진하고 느슨해지거나 가속력이 필요할 때는 가끔 집에 손님을 초대하라! (명절 때 시댁식구 오는 것이 가장 수동적이면서도 효과가 직빵이다. 당장 이불도 필요하고 냉장고며 싱크대며 여기저기 막 열어보니까.) 빛의 속도로 초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번 주말에 친구들을 집에 초대했다. 오예!


물론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좋아서 하는 것이다.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부끄러움이란

마음의 소리를 들을 때

생겨나는 감정이다.

마음(心)에 귀(耳)를 기울일 때

생겨나는 감정, 부끄러움(恥).

스스로 절제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이다.

아직 부끄러운 줄을 안다면

더 나아질 수 있다.


- 조윤제 《다산의 마지막 습관》



브런치 글 이미지 11





경계의 시간 위에서 우선 가능한 삶은

하나는 이전의 삶을 자세와 태도를 달리하면서 이어 사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을 위해서 토양을 비우는 작업,

오래된 습관의 뿌리를 캐어내는 우회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중에서 -




Tip. 요즘 뭐든지 카톡 1초 가입이라 쉽게 여기저기 거의 반사적으로 가입하게 된다. 1년에 한 번쯤은 정리해도 좋지 아니한가.


undefined
undefined
undefined
카카오톡 연결 서비스 계정 정리하기



이전 02화 2. 관성을 버린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