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그렇지!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 보름쯤 되니 흐지부지 느슨해진다. 손님을 치르고 나니 좀 쉬고 싶다. 사람이 한결같아야지 어느 날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딴사람이 되면 못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림Dream인가? 오, 드림 좋다. 버림 안 되면 드림! 오죽하면 갑자기 사람이 너무 많이 변하면 죽는다고 하지 않던가? 우리의 뇌는 생존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쥐도 새도 모르게 우리 뇌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바꿔나가야 한단다. 그렇다면 나도 야금야금 버리기로 했다. 가늘고 길게. 너무 스트레스받지 않고 꾸준히 즐거운 비움의 리추얼로서!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치우고 비우고 버리고 청소하고 살림하는 과정에서 의외로 기분이 참 좋아진다는 사실이다. 변기를 마치 새것처럼 구석구석 말끔히 닦아낼 때의 성취감! 끈적거리던 스티커 자국을 흔적도 없이 제거했을 때의 쾌감!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음이다. 사람과 공간은 서로 공명하기에 공간이 정돈되고 살아나니 사람도 역시 개운하고 상쾌하고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기분과 마음이 그 사람이 살고 있는 공간에 스미고 밴다. 분위기가 곧 기분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옆사람도 모르게 나는 은근히 오래 우울하고 무기력했는지도 모른다.
손님도 치르고 묵은 후드 필터 드디어 교체!
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처음 위험한 현장에 뛰어들며 두려워하고 망설이는 플래시맨에게 배트맨이 말한다.
"한 사람만 구해!"
그 말을 들은 플래시맨은 용기를 내어 처음 딱 한 사람을 구한다. 그리고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희열을 느끼고 자신감을 얻은 후 빛의 속도로 계속해서 사람을 구하게 된다. 나도 나처럼 이제 막 버림과 살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새내기 살림인에게 같은 말을 해주고 싶다. 딱 한 번만 느껴보라고, 그 기분을. 그러면 저절로 계속하고 싶어 진다고. 쌓는 재미보다 버리는 재미를. 쓰는 재미보다 버는 재미를. 사는(to buy) 재미 말고 사는(to live) 재미를. 물론 사는(buy) 재미를 아직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처음부터 단 번에 완전하고 완벽하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이미 내가 나를 아는데 뭘! 완벽이 강박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바깥일이 많고 바쁘다 보면 하루 이틀 못할 수도 있다. 오늘 아침에도 이불도 못 개고 나왔다. 상황에 따라서 더 급한 우선순위가 생기기도 하고. 자신의 생활패턴에 맞는 기본적인 루틴을 형성하고 조금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꾸준히 즐겁게 계속 해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남들 보란 듯이 위대해 보이는 멀고 높은 이상적인 목표만 세워두고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보다 너무 하찮아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나 자신에게 쉽고 친근한, 내 곁에 가까운 목표를 매일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실현시켜 나가는 것이 훨씬 남는 장사다. 공부는 관觀이 아니라 행行이다. 보여주느라 산만하고 요란할 것이 아니라 소리 없이 묵묵히 단순히 행하는 것이 진정한 고수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 하수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이렇게 떠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루는 방바닥을 닦는데 무슨 먼지가 이렇게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니, 분명 어제도 닦았는데! 방구석이나 마음구석이나 먼지는 언제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날마다 닦고 돌아서도 또 쌓일 것이다. 먼지가 일었다는 의미는 움직였다는 의미와 같다. 우리가 활력 넘치게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 있다는 증거로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먼지는 확실한 생활징후다. '이걸 언제 다 닦지?'라고 한숨부터 쉬면서 시작도 못하고 지레 포기할 것인가? 그때그때 당장 눈앞에 보이는 먼지부터 닦아나가다 보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더라도 분명 줄어들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무슨 일급수 버들치도 아니고 너무 맑고 깨끗해도 생명이 살기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은 먼지 속에서는 살아도 진공 속에서는 살지 못한다. 너무 완벽히 깨끗해서 발을 들이기조차 조심스러운 공간보다 살짝 흐트러진 틈이 있는 공간이 훨씬 편안하고 인간미가 느껴진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이고. 뭐든 과유불급이다. 적당히 적절히! 벌써 자기합리화?
방바닥을 뒹굴며 먼지만 세고 있어도 앉아서 숨만 쉬어도 돈이 새어나가는 소비지상주의 시대가 아닌가. 산소를 태우는 것이 아니라 돈을 태우며 호흡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돈은 분명 물질이긴 한데, 돌고 돌아서 돈이라는데 흐르는 액체가 아니라 이쯤 되면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기체에 가까운 것 같다. 최근에 다시 지출을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단 한 푼도 쓰지 않은 날은 심지어 횡재한 기분마저 든다.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긴 해도 이렇게 내가 나를 스스로 절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날은 뿌듯함이 차오른다. 이 또한 딱 한 번만 느껴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얼마나 남들이 알아주길 바라는지, 얼마나 인정욕구에 목매고 있는지. 예쁜 카페에서 신상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 마시며 노트북이나 태블릿을 펼쳐 놓고 앉아서 인스타그램 감성의 사진을 찍어 올리며 실시간으로 일상을 연출하고 각색해서 전시하는 듯 사는 삶도 있어 보이겠지만 - 당신이나 내가하고싶은 걸 할 수 있는 시간이나 비용이 많다는 건 누군가가 대신해서 그 나머지를 부지런히 감당하며 희생하고 있는 덕분일 것이다, 아니면 새벽 네 시에 미라클 모닝을 하고 있을지도 - 또한 나 역시 그런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많지만) 그렇다고 나의 알고리즘을 온통 그러한 것으로 채우고 싶지는 않다. 소비를 자랑하며 허황된 거품으로 오염시키고 싶지 않다. 그러다 나 자신이 허영심으로 가득한 거품인간이 되어 가는 것도 모르고 싶지 않다. 우리 몸의 70퍼센트가 물이라는데 그것도 옛말이지 90퍼센트가 거품은 아닐랑가 모르겄다. 보이지 않는 내 방구석을 부지런히 비우고 쓸고 닦으며 오늘도 반성한다. 버려도 버려도 정리가 되지 않는 까닭은 여전히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햇살나무 가라사대! 쓸데 있는 것까지 버릴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