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버림 일지
제목 거꾸로 바꿔 읽지 않으셨죠? '살림을 버린다' 아니고, 이번엔 버림을 살린다!입니다. 버림을 나누고 살린다. 다섯 번 버렸으니 한 번은 살리기!
어머, 이게 여기 있었네? 서랍 안쪽에서 엄마의 머리핀을 찾았다. 대학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하며 모처럼 좋은 것을 선물해드리고 싶어 처음으로 백화점에서 제법 값을 치르고 샀었는데, 정작 엄마는 몇 번 못해 보고 돌아가셨다. 보통 엄마들이 그렇듯이 아끼느라 그러셨을까? 20년에 가까워진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변색도 없고 큐빅 하나 빠진 것 없이 거의 새것이다. 다시 보니 나름 'Made in France'다. 부드러운 천으로 고이고이 닦고 보니 영롱하게 어여쁘다. 이 물건은 어떻게 여기에 있는 것일까? 엄마가 남긴 것이 하나 늘었다. 엄마의 도장, 엄마의 머리핀, 그리고 나!
살림을 버리다 보니 자꾸 못 버리고 이렇게 다시 주워 담아 살리고 있다. 빠르고 쉽게 산 인스턴트 물건은 인스턴트 인연과 마찬가지로 얽히고 깊어질 시간도 마음도 없고 추억도 옅어서 버리기가 쉽지만, 인연이 얽히고 이야기가 담긴 물건은 아무리 낡았어도 끝까지 버리지 못할 것이다. 버리면서 깨닫는다. 나도 나중에 수많은 물건을 남길 텐데 내가 남길 물건을 생각하면서 이제는 하나를 들이더라도 어렵게 고심해서 사고 좀 더 오래 쓸 수 있는 좋은 것을 들여야겠다고. 좋은 것을 남겨야겠다고. 이야기를 남겨야겠다고. 오늘도 물건 하나를 붙들고 추억을 곱씹느라 자꾸만 세월아 네월아 하고 있다. 버림이 정체되고 더딘 이유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뭐. 버림을 살리는 수밖에.
그래도 그 사이 바짝 노력한 덕분에 기본적인 청소 루틴은 어느 정도 잡혀서 잠시 느슨해지고 흐트러졌다가도 이전보다는 빠르게 회복하는 것은 확실한 변화로 느낄 수 있다. 큰 틀은 잡혔고, 이제 정말 구석구석 자잘한 것들과 더 크고 굵직한 것들을 드러내서 버려야 할 차례다. 설 연휴를 지나며 너무나 수고한 나에게 보상심리로 또 게으름신과 지름신이 잠시 강림하신 것은 이실직고한다. 말해 뭐 해, 핑계는 늘 준비되어 있다.
햇살나무에는 빛타민이 열린다.
그게 바로 나다!
연말에 건강검진을 하면서 옆지기가 대사증후군 주의군에 해당된다는 결과를 받았다. 가족력이 있기도 하지만, 혈압을 재는데 서너 번 다시 재면 잴수록 높아지는 광경을 내 눈으로 직접 보니 슬쩍 겁이 났다. 화이트 가운 증후군인가? 술담배도 전혀 안 하고 체중이 나가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관리를 잘하는 편이라 무심했는데 나이 들어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혈압도 혈당도 경계에 걸쳐 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이 당장 동력이 좋은 법! 다시 먹거리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과일과 채소, 그리고 좋은 기름을 먹는다. 최고의 오일은 코코넛 오일이라고 하는데 먹기 어렵고, 그다음이 아보카도 오일인데 이 또한 조금 부담스럽고. 가장 친근한 올리브 오일 중에서도 가능하면 유기농으로 냉압착한 엑스트라 버진 등급?! 주머니 사정이 허락한다면 볶지 않은 생들기름도 추천!
이전과는 다른 존재가 되기 위한 거듭남의 핵심은 바로 동굴모드와 섭생이다! 단군신화에서도 호랑이와 곰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굳이 동굴로 들어가야 했던 까닭은, 고기를 끊으려면 기존에 어울리던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이 핵심이니까. 호랑이가 고기를 먹는 호랑이 친구들을 그대로 계속 만나면서 과연 고기를 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자신이 금주나 금연을 하려고 하는데 기존에 함께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어울리던 친구들을 계속 만나면서 과연 끊을 수 있겠는가? 함께 오래 하기 위해서 널리 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만, 근본적인 환경 변화를 위해서 때로는 은둔과 고독도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좋은 사귐이라면 뱁새가 황새 되려 흉내 내고 쫓아하느라 가랑이 찢어지길 바라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뱁새가 좀 더 뱁새다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뱁새는 황새에게, 황새는 뱁새에게 서로 그런 벗이 있음을 감사하며 소중히 여길 것이다. 그렇게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심리적 관계를 바꾸는 시도를 했다면 그다음은 몸을 이루는 먹거리를 바꾸는 섭생에 정성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쑥과 마늘! 쓰디쓴 채식! 그리고 습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100일이라는 최소한의 시간! 이 정도면 단군신화는 신화가 아니라 과학인데? 그렇다면 곰은 되고 호랑이는 안 된 까닭은? 그건 그 정도의 인내심을 갖추느냐 못 갖추느냐 그 개별 존재의 됨됨이라고 봐야지. 아무리 같은 환경과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 나름인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하던 대로 하고 먹던 대로 먹고 살던 대로 살면서 뭔가 바뀌기를 바란다면 욕심이고, 생각만으로 말만으로 노력하고 있다고 하면 그건 착각과 기만이다. 노력에 대한 모욕이다. 이렇게 입만 나불거리면 안 되니깐, 적는다. 행한다! 다시 한다, 꾸준히 계속한다. 그래서 더불어 계단 걷기도 덤으로 얹어서 실천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건 뭔가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 그 상태로 충분히 머물러 있으려는 노력이 아닌가 싶다. 늘 하던 대로 자꾸만 뭔가를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무료함이 낯설다. 물론 처음에는 낯설지만 좋다. 4박 5일 집 밖에 한 번도 나가지 않아도 아무 일 안 생긴다. 생각보다 답답하거나 우울하지도 않다. 역시 집순이 체질인가? 아니었다. 1월 한 달은 텐션 떨어지지 않고 그럭저럭 잘 보냈는데, 이제 슬슬 집멀미가 나려고 한다. 자꾸만 뭘 해야만 할 것 같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으면, 가치를 창출해내지 못하면 과연 나는 의미 없는 존재인가? 꼭 쓸모 있는 존재여야 하는가? 차 떼고 포 떼고 그냥 하나의 존재로 존재하면 안 되는가? 좀 심심해도 괜찮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