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버림 일지
당신은 듣는 사람인가요?
오늘 뜻밖에도 마치 내 일처럼 반갑고 기쁘고 다행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지난번에 남편과 함께 방충망을 교체해 주러 갔다가 그 집에서 수도꼭지 교체 공사를 하러 와서 얼토당토않는 바가지를 씌우고 있는 업체를 목격하게 됐다. 그날 그 상황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작업을 다 마치고 나오면서 남편이 집주인 아저씨에게 귀띔을 해주고 나온 모양이었다. 비싸도 너무 비싸다고, 왜 그걸 달라는 대로 다 주시느냐고. 깎으셔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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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벌써 몇 주 지났을까? 오늘은 실리콘 작업을 의뢰하고 싶다며 그분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견적을 내기 위해 방문한 김에 그때 그 수도꼭지는 과연 어떻게 되었나 살펴보기도 할 겸 넌지시 물으니 조금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 주셨다.
그날 우리가 떠난 후 곰곰이 생각을 해보셨다고. 남편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정말 아무래도 비싼 것 같아서 그 업체에 전화를 걸어 따지셨다고 한다. 그랬더니 그 업체가 선입금받았던 수도꼭지 자재값 몇 십만 원을 고스란히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행히 다른 마땅한 업체를 찾아 그 자재값도 안 되게 처음 예정됐던 전체금액의 3분의 1 가격으로 자재와 공임비까지 해결해서 공사를 마치셨다고, 우리 덕분이라며 고맙다고 하셨다.
너무 잘하셨다고, 너무 잘됐다고, 너무 다행이라고 나는 절로 박수가 나왔다. 그리고 그건 우리 덕분이 아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흘려듣지 않고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어 전화를 걸어 따지는 행동을 하신 본인 스스로의 선택 덕분이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알아서 할 텐데 왜 나서서 남의 일에 이래라저래라 하느냐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남편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번 경우에는 자존심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제법 큰돈을 쓰지 않고 벌게 되기도 했지만, 솔직히 대부분은 조용히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듣기보다는 크고 강하게 내지르는 사람의 말에 쉽게 휘둘려 뜻하지 않은 돈을 쓰게 되기도 하고 손실을 입기도 한다.
결정을 번복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있고, 상대방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용기도 필요하다. 솔직히 나부터도 어려워서 잘 못한다. 강해 보이는 상대와의 갈등이 두려워 피하거나 그냥 덮고 지나가고 결국 오해와 손해를 감수하는 쪽을 택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오늘 만나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새삼 크게 다가왔다. 중년의 남성 분이셔서 더 의미가 컸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열고 경청의 지혜를 발휘해 행동으로 옮기신 모습이,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 주시는 모습이, 합리적이고 유연하게 대처하시는 모습이 참 존경스러웠다.
사람이 이랬다 저랬다 한다고, 귀가 얇다고, 중심이 없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중심이 명확히 서 있기 때문에 유연할 수 있는 것이다. 이리로 가든 저리로 가든 언제든 다시 중심으로 돌아올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자존심이 벽이 되어 마음을 가로막는다. 번지르르하고 그럴싸한 말에 눈이 멀어 서툴고 힘없는 진심은 외면당하기 일쑤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지나가며 던지는 남의 말은 소머즈처럼 잘 들으면서, 가장 가까이 나를 가장 오래 봐온, 나를 가장 잘 아는 바로 내 옆에 있는 남편이나 아내의 말은 잘 안 들린다. 자존심을 내려놓으면 어느 쪽이 정말로 자신을 위하고 도우려고 하는 사람인지 제대로 보이기 시작한다. 존심 세우지 말고 듣자. 받아들이자. 세워야 할 것은 존심이 아니라 제대로 된 올바른 중심이다.
존심을 버리면 정말로 돈이 생긴다!
내가 갈팡질팡하며 설명하는 동안 남자는 그런 이야기에 굶주린 듯 귀를 기울인다. 보기 드문 사람이다. 아는 척을 하거나 비웃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수많은 새로운 아이디어들의 충돌을 반기는 사람. 나는 온종일 감탄했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남자의 개방적인 태도에 더 탄복한다. 남자는 나에게 감사를 표한 후 떠났고 그때부터 나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찾아 나서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듣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말하는 사람들이다.
- 패트릭 브링리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