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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실패를 버린다

1일 1 버림 일지

by 햇살나무 여운 Feb 19. 2025



오늘 글에 처음은 제목을 '허세를 버린다'로 시작했다가 마음을 바꿨다.


글을 쓰다 보면 음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글마다 이퀄라이저가 작동한다. 원래대로라면 감성보다는 이성을 좀 더 높이고, 무용성보다는 실용성을 짙게 얹어서 어떻게 허세를 버리는지 조목조목 따져가며 항목별로 적었을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신차를 뽑자마자 감가상각이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중고차만 타고 할부이자에 비싼 요금제 타령하며 중고폰만 쓴다거나, 옷은 주로 아울렛을 이용하고 굳이 거금을 들여가며 미용실에 다니지 않는다거나, 세제나 화장지 등 생활소모품은 예전처럼 더 이상 벌크로 구매해서 쌓아 놓고 쓰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사서 쓴다거나 하는 이야기. 품위유지비보다는 식비가 대부분이라 할 만큼 엥겔지수가 치솟았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허세를 버리기 위해서라도 먼저 솔직하게 실패를 밝혀야 한다. 뭐라도 쓰기 위해서 시작했지만 나는 번번이 조목조목 실패하고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 역시 인간은 관성의 노예가 맞다. 버리는 일은 정말 어렵다. 결코 쉽지 않아.


입춘과 우수가 지났으니 확실히 봄이기도 하고 볕도 참 좋고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도 봄향기 물씬 풍기는데, 그럼 오늘 글은 봄이라는 어엿한 명분을 핑계로 감성충만 해도 되지 않을까? 이성이나 실용성 따위 겨울옷과 함께 개켜서 서랍에 넣어 버려!


요즘에 나는 늦잠도 자고 가끔 팔자 늘어지게 낮잠도 잔다. 아침에는 더 이상 서두르는 기색 전혀 없이 느긋하게 과일을 쫑쫑 썬다. 못난이 사과, 딸기, 바나나, 로메인은 기본으로 하고 최근엔 동지팥죽에 들어가는 찹쌀 새알을 닮은 모짜렐라 치즈를 발견해서 추가했다. 가끔 쿠폰이 생기거나 세일하는 틈에 블루베리나 천혜향도 사서 얹어본다. - 나는 쿠폰과 포인트의 달인이다. 카드 할인 혜택도 꼬박꼬박 챙겨 쓰는 체리 피커다. - 달걀은 한 번에 네 알을 삶아서 오늘 두 알 내일 두 알! 견과류에 오트밀 두유도 함께 한다. 이렇듯 아침에 올인해서 최대한 누릴 수 있는 호사를 모두 누린다. 여기까지는 좋았어.


이제부터 실패의 연속이다. 이불도 안 개고, 설거지도 미뤄두고, 박스도 쌓아둔다. 남편 포인트를 털어서 예쁜 텀블러도 또 사 버렸다. 요즘 핫한 펜도 또 깔별로 사고 가계부 기록도 밀린 지 한참이다. 앞서 적었던 온갖 다짐들이 말짱 도루묵이다. 이렇게 하찮은 우주의 먼지 같으니라고!


그런데 분명한 변화는 있다. 시간이 생겼다. '빨래 갤' 시간이 생겼다. 시간을 내어서 진득하니 앉아서 빨래를 개는 내 모습 예전엔 보기 드물었다. 수많은 실패 속에 작은 성공이 있다. 욕실 바닥 머리카락과 먼지도 그때그때 치우고, 냉장고 안에 음식이나 식재료도 필요한 만큼 적게 장을 보고 가능한 그때그때 비운다. 미루더라도 예전만큼 그렇게 오래 미루지는 않고, 귀찮다고 미루고 미루다가 더 이상 미룰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마지못해 하지 않는다. 분명 능동의 시간이 싹텄다. 봄날의 새싹처럼. 다시 하고 계속한다면 아직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도중에 있다. 글쓰기도 늘 매번 실패하지만 다시 하고 계속함으로써 어제보다 나아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오늘도 건너뛰고 미룰 수 있었지만 짧고 어설프더라도 뭐라도 쓰고 싶었다. 계속 쓰는 나로, 쓰는 행위로 나를 증명한다.


나는 혼자 놀기를 정말 좋아한다. 다행히 일이 없는 날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밖에 나가는 성향도 아니고 그다지 가고 싶은 곳도 별로 없다. 놀다 보니 이것저것 다 꺼내서 늘어놓기 일쑤다. 성향이라 쓰고 습관이라 읽는다. 취향의 물건이 참 많다. 책도 늘어놓고 이 책 저 책 보다가 말고 펜과 노트도 잔뜩 늘어놓고 쓴다. 가끔 그분이 오시면 재봉틀로 뭔가를 만드느라 원단과 온갖 부자재도 잔뜩 꺼내서 늘어놓는다. 쓰려고 만들기보다는 뭔가가 떠올라 만들고 싶어서 만든다. 그렇게 뭔가를 짓고 만들다 보면 하루가 훌쩍 간다. 참으로 무용한 시간을 보내며 다른 해야 할 일을 또 뒤로 미루고 있다. 미룬다기보다 좋아하는 일에 빠져있다 보면 시간 가는 것도 잊어버린다. 몰입이라고 거창하게 써볼까. 뒷정리가 안 된다고 남편에게서 늘 타박을 듣지만 그때쯤 되면 체력이 고갈되어서 그렇다고, 오늘은 OFF 아니냐고! 정신줄 스위치를 꺼놓아서 그렇다고 핑계를 대볼까.


뭘 해도 실패가 감춰지진 않는다. 버림은 오늘도 실패했고, 내일도 실패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내가 싫지만은 않다. 매일 실패하는 나도 괜찮다. 조금 덜 실패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할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멈추지 않으면 아직 실패한 게 아니야. 온갖 핑계를 대며 안 쓸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썼잖아.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패?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실패?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며 나의 장점을 스스로 칭찬하는 것.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고 즐기며 아끼는 것.


이미 받고 있는 것에 감동하고 감사하는 것.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을 행하는 것, 매일 조금씩 꾸준히!

몰라서 안 되나? 안 해서 안 되지!


나는 여전히 한낱 인간일 뿐이다.

괜찮아, 봄이니까!


아무튼, 오늘부터 다시 1일이다. 


봄은 모든 걸 용서해!봄은 모든 걸 용서해!


https://youtu.be/HyJE9Ygrweo?si=oiZq92Of7LlXwGv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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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내일은 꼭 올리브유를 사자고
다짐하는 밤.

두 사람의 다짐은 언제나 그런 것.

목적지는 내일!


- 최진영 <어떤 비밀> 2월 '우수雨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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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싶은 욕망은 창의력의 에너지로 환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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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리 피커 / cherry-picking을 하는 사람

어떤 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가운데 비용 대비 효율이 뛰어나거나 인기가 있는 특정 요소만을 케이크 위 체리 뽑듯이 골라 자신에게 유리하게 소비하려는 현상을 가리키는 경제 용어. (출처 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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