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일 1버림 일지
이 글은 씻으면서 쓰였다. 쓰는 행위는 씻는 행위와 다름이 없으므로.
오래전 기억이다. 지하철역 공중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모든 칸은 사람이 찼고 나는 화장실 초입에서 혼자 한줄서기를 하고 있었다. 뒤이어 곧 두 아주머니가 나를 지나쳐 앞으로 들어가더니 칸칸이 앞에 서는 것이다. 나는 딱히 뭐라 말하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서 있는 칸이 아닌 다른 칸이 먼저 열렸다. 나는 또 굳이 뭐라 말하지 않고 그 빈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다 들으라는 듯이 “저 여자가 새치기하고 들어갔다!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라고 노골적으로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졸지에 벌건 대낮에 공공장소에서 새치기나 하는 개념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는 굳이 입을 떼서 뭐라 해명할 의지를 느끼지 못했다. 낯을 가리는 내향적인 성향 탓도 있었고 그때 내가 몹시 급했거나 몹시 지쳐 피곤했거나일 수도 있지만,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고 볼일 보고 나오면 다시 마주칠 일도 없는 완전한 타인이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서로 앞뒤 상황을 몰라서 하는 소리니 그저 오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일한 다행인 점은 그 사람들이 내가 한줄서기를 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만큼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것 정도였다. 내가 혼자여서였을까? 내 뒤에 한두 명이라도 더 서 있었더라면 달랐을까?양보하거나 해명하거나 아무런 소통도 하지 않은 부분 만큼은 뒤늦게 아주 잠시 후회했다.
또 하나의 사건이 떠오른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편도 2시간 거리를 출퇴근 하던 시절이었다. 매일 이른 새벽 광역버스를 타기 위해 길고 긴 줄이 늘어선다. 서로 말을 섞을 일은 없지만 익숙하고도 묘한 침묵의 연대 속에서 피곤한 긴장감이 감돈다. 촌각을 다투는 매일매일의 전쟁이다. 그 순간 “이리 와.”하고 고요를 깨뜨리는 누군가가 있다. 앞에 선 사람이 자신의 동료인지 지인인지를 부른다. 인사만 건네고 뒤로 갈 줄 알았던 그 사람은 자연스레 말을 섞으며 그사이에 끼어든다. 이것이야말로 명백한 새치기가 아닌가. 광역버스는 전철이 아니다. 입석이 없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뒤로 뒤로 밀린 누군가는 영문도 모른 채 제시간에 버스를 타지 못해 회사에 제때 닿지 못할 수도 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터져나온다. '5분만 더'의 유혹으로부터 겨우 힘들게 떨치고 나왔는데. 그 귀한 이불속 꿀잠을 버젓이 눈뜨고 코앞에서 날치기당한 나를 포함한 몇몇은 노여움에 오래 그들을 노려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중에 누군가 “뒤로 가세요!”하고 소리 내어 말하는 사람이 있었던가.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삶의 곳곳에서 누군가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나타나길 마음속으로 오래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은근슬쩍 뭉개며 계속 그렇게 자리를 차지하거나 제대로 감사하거나 사과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리며 없던 일처럼 넘어가는 많은 사건들을 본다. 그 난폭한 무례함이 바로 내 가까이 우리집 방구석까지 침범해 들어온 기분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굳이 드러내어 언급하지 않고 봐주며 참아주고 넘어간다. 자신으로 인해 분위기가 서먹해지거나 살벌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아직 소중해서 지키고 배려하느라 끝장을 보려 하지 않는 것뿐이다. 약하고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라고 해도 맞는 말이다. 싸움이라면 진절머리가 나고 무엇보다 튀고 싶지 않은 부류로 자랐으니까.
이 기억들이 최근에 다시 떠오른 건 며칠 전 마트 화장실에서였다. 이번엔 한줄서기를 할 틈도 필요도 없었거니와 비디오판독으로 순위를 가려야 할 만큼 비슷하게 나와 다른 한 명이 동시에 화장실에 들어섰다. 서로가 느끼기에 내가 아주 미묘하게 살짝 앞섰다.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나는 먼저 웃으며 뒤로 물러섰고 “먼저 쓰세요.”하고 말을 건넸다. 상대방도 웃으며 아니라고 괜찮다고 먼저 쓰시라고 양보했다. 덕분에 우리는 서로 기분 좋게 볼일을 본 사이가 됐다. 이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완전한 타인이 아니게 된다. 그 극미한 예의와 친절을 나눈 순간 하나로. 공중화장실이나 버스정류장에서 일어나는 촌각을 다투는 전쟁에서 너무나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결말이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이리로 흘렀다. 게다가 길어졌다. 그때에 나는 불쾌했던 것이다. 지하철 화장실에서 잘 알지도 못하고 한 번 물어보지도 않고 섣불리 오해한 그들의 노골적이고 난폭한 무례함이 그러했고, 버스정류장에서 그들의 뻔뻔함과 당당함이 그러했다. 배울 만큼 배우고 갖출 만큼 갖춘 지성인들이면서 모르지 않으면서도 보란 듯이 저지른 행태에 더 노여웠다. 인성과 양심은 지성과 학력에 결코 비례하지 않는가 보다. 백 번 양보해서 그들은 그럴 수 있다고 치자. 모르는 사이는 용서할 수 있다. 바라는 기대도 없으니까. 두 번 이상 같은 일로 마주칠 확률도 더더욱 없을 테고.
그러나 그러면 안 되는 사이가 있다. 큰 책임이 따르는 사이. 관계는 신뢰이고 신뢰에는 책임이 따른다. 아는 사이. 가까운 사이. 적어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시간과 사건과 사고가 쌓인 사이. 사귀는 사이, 같이 사는 사이 같은 경우 말이다. 관계맺기에 있어 특히 신중하고 한 번 맺은 관계는 더욱 진심으로 귀히 여기는 부류인 경우에는 이를 테면 ‘내 사람’이라고 부를만 한 사람은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저 미실 아닙니다-_-;;) 그 난폭한 무례함이 내 집 문턱을 넘어 침범해 올 때, 알면서도 반복되는 뻔뻔한 비양심이 내 평온한 공간을 무너뜨릴 때 나는 다시 노여워진다.
늘 거침없이 욕망을 부리고 휘두르고 마치 그럴 자격을 부여받기라도 한듯이 아무것도 아무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드러내는 쪽은 그들이고, 하염없이 참고 견디는 쪽은 늘 이쪽이다. 그래서 봐주고 견디고 참아온 만큼 이 노여움은 생각보다 오래 깊다.
더더욱 '친구'라는 이름표를 붙여서 관계를 팔아서는 안 된다. 제멋대로 상대방의 서사를 생략하거나 전지적 자기관점으로 함부로 편집하거나 각색해서도 안 된다. 적어도 타인이 오해하게 만들거나 그 상태로 내버려 두면 안 된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어떻게 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그 서사를 모르지 않다면 아니, 모른다면 더더욱 그렇게 경솔하고 무례해서는 안 된다. 다 이해할만큼 도량이 안 되고 최소한의 존중을 지킬 만큼 사려 깊지 못하다면 최소한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한다. 궁금해하고 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상대방에게 안물안궁이다. 노룩패스는 기본이다. 여럿이 함께하는 자리라면 평소보다는 삼가고 자제하려는 기색을 조금이라도 비춰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늘 그래왔듯이, 쌓여온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남의 서사에는 관심이 없다. 마이크를 꼭 쥐고 결코 놓지 않는 부류이기도 하니 상대방에게 지는 것 또한 견디지 못한다. 처음부터 귀 기울여 듣지도 않고 그럴 마음도 없고 곧 쉽게 깡그리 잊는다. 오로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관계에만 추종심인지 충성심인지를 끊임없이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 외의 다른 이들을 배려하지 않는다. 아니, 배려하지 않음으로써 차별하고 소외시킨다. 정치판도 아닌데 그 자리에는 항상 쥐는 자와 지는 자만 남는다. 눈이 먼 욕망은 너무 쉽게 폭력이 된다. 경계가 모호한 가까운 사이는 그 폭력에 매번 또 다시 쉽게 노출되고 반복된다. 끊어내지 못하니 견딜뿐이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본다. 도대체 나는 정확히 어느 지점이 노여운 것일까. 감히 우정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그리 쉽고 가볍게 취급해서일까, 내가 내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에게 함부로 하는 것을 참기 어려운 것일까, 그들이 나를 친구라고 언급하는 것이 쪽팔리는 것일까, 아직도 기대가 남아서 나만 혼자 늘 너무 진심이어서일까, 누군가 그들을 나의 친구로 알까 봐 벌써 부끄러운 것일까 (나중에 죽어서 화탕지옥에 가면 주변에 이런 친구 뒀다고 심판받을 텐데),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내가 너무 속좁고 진지하고 재미없는 사람이어서일까. 이 관계를 버리기 전에 나 자신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했다. 시간을 줘야만 했다. 그런데 이제 줄 만큼 준 것 같다. 그들에게도 내게도. 오늘 나는 관계를 버린다.
버려야 한다고 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나 자신이 얼마나 버리지 못하는 사람인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그만큼 꽤 오래묵은 지금의 이야기이다.
버림에 계속 거듭 실패하고 있다. 버림에도 요요현상이 있는 줄 이번에 경험하며 알았다.
나의 바람은 모든 것을 완전히 전부 버리는 것이나 전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갖지 않는 데 있지 않다. 아직 살아있고 세상 속에 섞여 살아가는 한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버림과 비움의 과정 속에서 나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자중하고 조절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데 그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이것은 나의 합리화일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관계에 대한 건강한 배려도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아무런 자제도 조심도 없이 그렇게 거침없이 욕망을 있는대로 부리며 하루살이처럼 사는 것이 진정 두렵지 않을까. 거짓과 폭력으로 물들어버린 자신의 삶이 부끄럽지 않을까.
그럴 때마다 관계를 끊으면 어떻게 먹고 사느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다.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끊어야 한다.
먹고사는 힘은 자기를 지켜내는 힘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중심이 되는 질문으로 질문 자체를 바꿔야 한다. 내 삶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일까."
너도 있고 나도 있다.
어떤 관계에서든 납득할 수 없는 심리적 갑을 관계가
일방적이고 극단적으로 계속된다면
이런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것이 더 건강하다.
- 정혜신 <당신이 옳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