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 희망 발굴단
사수가 아팠다. 어디서 무엇이 제대로 얹혔는지 작업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화장실을 몇 번을 들락날락하며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어내듯 무섭도록 토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추스르는가 싶었는데,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셨던 물 몇 모금까지 거듭 토해냈다. 토사곽란은 주로 조수의 레퍼토리인데, 사수의 그런 모습은 지금껏 함께 살면서도 거의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었다. 뭔가 크게 잘못될까 내 전부를 잃을까 덜컥 겁이 났다. 오늘도 유지되는 한 가정의 안온한 일상은 온전히 가장의 목숨값을 할부로 지불해 가며 지켜지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번 체감하는 순간이다.
상처 입은 호랑이마냥 겨울잠에 들어가는 곰마냥 사수는 사흘 동안 곡기를 끊다시피 하고 웅크린 채로 동굴모드에 들어갔다. 몸속에 찬 한기와 독기와 살기를 모두 뽑아내기라도 할 것처럼 뜨거운 물주머니를 끌어안고 끙끙 앓으며 사수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엄살이라고는 모르는 아픈 티를 전혀 내지 않는 사람이라 조수는 그저 괜찮은지만 거듭 물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훌훌 털고 동굴에서 나올 사수를 기다릴 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때마침 일도 거의 없다. 당장 급하게 물이 새는 일이 아니고서는 전화로 이런저런 문의만 많다. 입만 아프고 말값도 안 나오겠다 싶다. 안 그래도 얼마 전 세탁기 뒤에 꽁꽁 숨은 수도꼭지를 교체하려고 혼자서 대용량 건조기를 얹고 있는 세탁기를 통째로 움직이느라 무리를 했다고 했는데, 이번에 다녀온 집이 또 유난히 좀 힘들었다고 한다. 이 집도 수도꼭지가 문제였다. 이사 들어올 집 세탁기 놓는 자리에 수도꼭지를 교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부품은 미리 사놓을 테니 와서 교체만 해달라고 했고 다짜고짜 처음부터 비싸다고 했던 집이었다. 내일 이어질 인연에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 오늘 조금 비워두는 쪽을 선택하는 사수는 그래서 기꺼이 깎아주기도 했고, 물과 관련해서는 유난히 더 신경 쓰는 편이라 몇 번을 확인하며 꼼꼼히 잘 마무리해 주고 왔는데, 며칠 후 이사를 들어와 세탁기를 연결하고 보니 물이 샌다고 다시 연락이 온 것이다. 사수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시 방문해 증상을 살펴보니 사수가 작업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의뢰인이 먼저 사놓은 부품이 구형 세탁기와 안 맞았던 것이다. 재고로 있던 부품 일부를 가져와 다시 보강하고 조정하고 테프론테이프도 좀 더 야무지게 감아서 마무리를 해주었다. 작업하는 내내 춥기도 몹시 춥고 사수는 계속 여러 가지로 신경이 쓰이고 불편함이 느껴졌다고 했다. 또 동티 주의보가 울린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재방문한 추가 작업비는 받지 못했다. 이번에는 가지고 있던 부품까지 썼는데도 말이다. 정작 받아야 할 공임은 못 받고 아무래도 까닭 없는 원망과 미움만 된통 받고 탈이 난 모양이다. 이제는 화낼 힘도 없고 할 말도 안 나온다. 정말로 우리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의심까지 들 지경이다.
모두가 정말 많이 힘든 시기이긴 한가보다. 다니는 가게들마다 손님이 없다. 장사가 어찌나 안되는지 이웃 카페도 편의점도 알바생을 줄이고 사장님들이 직접 나와서 뛰고 있는 모습을 본다. 가까운 지역 같은 동네에 같은 업종의 자영업자도 몇 배로 늘었다. 한랭전선이 아예 둥지를 틀고 앉은 듯한 포화상태의 시장에 봄이 오긴 오는 것일까? 내일의 날씨를 전혀 알 수 없는 자영업자의 계절에 꽃 피는 봄날이 있긴 있는 것일까?
친구가 말한다.
양심적으로 일하고 신의를 지키고 순리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호구 취급당하고 이용당하고 무시당하고 괜한 원망을 받아야 하고 스스로 잘못 살았나 의심하게 되는 현실이 과연 맞는 것일까? 아무리 부지런하고 성실해도 정당한 방법으로 바르기만 해서는 살아가기 힘든,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절망을 넘어 무망(無望)의 현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일까? 그렇게 살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고? 오늘도 묵묵히 일하는 사수의 뒷모습을 보며 조수는 끝까지 고개를 젓고 싶다. 아니라고. 아직 살만한 세상이라고 나는 믿을 거라고. 당연시 여기지 않고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고, 사람이 귀한 줄 아는 사람도 있고, 사소한 손길을 잊지 않는 사람도 있고, 인간미 넘치는 사람도 있고, 그런 당신이 있어 아직은 살만 한 세상이라고! 우리는 집집마다 다니며 멸종 위기에 처한 그런 사람을 발굴해 내고 그 인연을 지키며 불신과 무망에 저항하며 '그래도 아직은 살만 한 세상'이라는 그 마지막 희망을 지키는 한 사람으로 끝까지 남겠다고. 여전히 너무 순진하고 이상적인 자영업자라고 여겨질지라도 꿋꿋이 꼿꼿이 바보 같은 바름을 믿으며 살겠다고. 견디고 버티기만 하는 삶이 아니라 단 하루라도 진심으로 사람 사는 것 같은 삶을 살겠다고.
말과 행동 사이의 거리는 점점 더 돌이킬 수 없이 멀어지기만 하고, 도대체 사람이 어느 지경까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 그 욕망에 사로잡힌 뻔뻔함의 경지를 매일 같이 목도하고 있는 요즘 우리의 현실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직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망하지 않고 오늘의 일상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건 분명히 저런 사람들보다 이런 사람들이 더 많은 덕분이라고. 저쪽이 더 강하고 많아 보이는 건 단지 그들이 더 요란하고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들어대기 때문이라고. 떠들수록 더 많이 들키고 있는 저런 하수들이 아니라 그저 소리 없이 묵직하게 한결같이 이쪽에 서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할 일을 하고 있는 진정한 고수인 당신이 있어준 덕분에 오늘도 사수와 조수는 일할 맛이 나고 살 맛이 난다고. 부디 우리 어떻게든 먹고살겠다고 왜 사는지를 잊지는 말자고, 자신만의 "왜?"를 버리지는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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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어엿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대신
널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배우는 것을 멈추지 마세요.
그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살아가기 위해 도움이 되는 기술을 익히고,
그것으로 타인에게 힘이 되어주는 것.
그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 코이케 류노스케 <초역 부처의 말> 중에서
어느덧 브런치북 <뛰는 사수 위에 나는 조수>의 목차 서른 편을 모두 완주했습니다.
한 방울의 피, 한 방울의 땀, 한 방울의 눈물들이 모여 하루를 이루고 인연을 잇고 삶을 짓습니다. 그것이 남의 것을 탐하고 빼앗은 피땀눈물이 아니라 진솔한 자신의 피땀눈물로 이룬 것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안전한 집이 되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부족한 제 글 읽어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couple-pioneer
명랑하게 개척하고 씩씩하게 버티어 여기까지 왔으니
다음은 우리 꽃처럼 활짝 피우고 찬란하게 빛날 차례입니다. ^^
생의 최전선에서 날마다 치열하게 자신을 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구하고 지키는
우리 모두를 언제나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파이팅!!
태양처럼 빛을 내는 그대여, 함께 들어요!
저의 명자꽃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 감사합니다.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7809313
사수님의 건강이 걱정이 됩니다 ㅠㅠ
무리하셔서 뭔가 단단히 몸살에 체하신거
같은데 추위때문에 그럴수도 있을거 같아요
건강이 항상 우선입니다
옆에서 사수님 잘 챙겨주세요
빠른 회복 기원합니다 ~~^^
감사해요~^^ 많이 회복했어요. 잘 챙기겠습니다. 사수님은 소중하니까! ㅎㅎㅎ 회장님도 어깨가 무거우시죠. 건강 잘 챙기면서 하셔요~^^
연재 너무 수고 많으셨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사수님은 좀 쉬셔야했나봐요. 너무 쉼없이 너무 많이 열심히 일하셨어요. 게다가 손님들 마음까지 살펴드렸으니 얼마나 고단하셨을까 싶다는...작가님도 마음 고생하셨네요.
덕분에 모처럼 사수심은 늦잠도 자고 게으름도 좀 피우며 언제 그랬냐는듯이 잘 회복했답니다.^^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완주 무사히 마쳤으니 연재도 봄방학? ㅎㅎㅎ 내일 뵈요~♡♡♡
@햇살나무 여운
회복하셨다니 다행쓰. 낼 뵈어욤~♡
@강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