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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자장면이 좋다고 하셨어

좋은 부모 맛보기

by 햇살나무 여운

욕실 두 곳의 수납장을 교체하는 공사를 한 번에 해내야 했다. 안방 욕실은 한 면 전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요즘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가로 1800 짜리 수납장이다. 그 크기를 맞추려면 별도로 주문 제작을 해야 해서 가격이 너무 높아진다. 임대인 임차인과 협의하여 가장 대중적인 1200 짜리 하나와 600 짜리 하나로 맞춰 채워 넣기로 결정했다. 거실 욕실까지 하면 총 세 개의 수납장을 매달아야 한다. 거기에 주방 후드 교체까지 해내야 한다. 게다가 주방 후드 사이즈도 이 집은 고급형으로 900이다. 보통 가장 많이 쓰는 사이즈는 600이다. 단단히 각오하고 마음을 먹고 초능력을 소환해야 하는 날이다. 초능력 소환 주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모두가 매일 발휘해서 써먹고 있는 그 흔한 시크릿! 가장 평범한 보통의 마법! Ordinary Miracle!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주문만큼 강력한 것은 없다.


1800 욕실장 작업
대형 주방후드


조수의 몸무게는 조수의 나이보다 적다. 아무래도 밑 빠진 독인지 쌓아도 쌓아도 덕이 부족하여 후덕함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길이는 기린이고 허리는 개미허리인데 아주 가끔 자신의 몸무게보다도 몇 배나 무거운 물건도 번쩍 들어 옮기는 개미의 괴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올림픽 금메달이 걸린 역도 선수의 간절함에는 못 미치겠지만, 반드시 들어야만 한다. 들고 버텨야만 한다. 왜? 조수는 사수를 사수해야 하니까! 사수의 안전이 달려 있으니까! 사수는 소중하니까. 다치면 안 되니까. 무너지면 물어줘야 하니까! 생계를 넘어 생존이니까.


기존에 달려있던 욕실장을 떼어내면 그 자리는 보통 타일이 비어 있다. 처음 아파트를 시공할 때 자재도 아낄 겸 노동력 소모도 덜 겸 보이지 않는 곳은 그렇게 작업을 많이 하나 보다. 이번엔 좀 많이 비어 있었다. 그래서 시멘트가 보이지 않게 위치를 정확히 잘 잡아서 타공을 해야 한다. 단 한 번에 성공해야 한다. 실패는 불허한다. 사수가 해머드릴로 무사히 타공을 해내고 앙카못을 박아 단단히 고정시키는 동안 조수는 욕실수납장을 받쳐 들고 숨도 아껴가며 버틴다. 버텨 내야 한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가녀린 팔다리가 후들후들 흔들리긴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지 무너진 적은 없다.


사수는 아무래도 다른 조수를 들일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친절히 세밀하게 작업 과정과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남의 속은 그리도 잘 알면서 조수의 속은 몰라 주고 조수를 계속 키울 생각인 모양이다.



새 학기를 맞아 이사철로 여기저기 부동산들이 분주하다. 세입자가 이미 먼 곳으로 이사를 가버렸는데, 겨우 전등이 하나 나가고 신발장에 시트지가 조금 울었다고 원상복구를 해놓지 않으면 보증금을 주지 않겠다고 버티는 집주인이 있는 모양이었다. 중간에서 몹시도 괴롭다며 부동산 사장님이 사수를 찾는다. 집이란 참으로 자잘하게 민감한 사건 사고 사연들이 수없이 얽혀 있어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우리 삶이 그렇지. 알겠다고. 걱정 말라고. 둘 다 해결해 주겠다고. 우리가 독수리이형제가 된 기분이다. 사수를 형님으로 모셔야 하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유난히 긴 하루였다. 저녁엔 한 집 더 들러서 포인트조명과 샤워 수전을 교체해 주기로 했다. 마침 이사한 당일이라 아무래도 정신없이 바쁠 것 같아서 일부러 맨 마지막에 들렀다. 집 앞에 도착하니 온갖 박스와 아이 물건이 가득하다. BMW 씽씽카도 있다. 아들이구나! 집 안에 들어서니 40평대 아파트 바닥 전체에 식구들이 손수 매트를 깔고 계셨다. 젊은 엄마 의뢰인과 친정 부모님들이시다. 왜 그리 못하느냐는 높은 솔 톤의 경쾌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시는 친정 엄마 분의 구박에도 불구하고 후덕하고 인자하신 친정 아빠 분은 꼼짝도 않고 한결같이 매트를 펴고 맞춰 자르고 붙이고를 반복하고 계신다. 외할아버지 덕분에 손주 녀석은 12층 높이에서도 운동장처럼 신나게 뛰고 구르고 달릴 수 있을 것이다. 부모님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따님의 이사를 돕기 위해 경주에서 잠시 올라오셨다고 한다. 이사를 마무리하고 주말에 내려갈 예정이라고.


때마침 자장면이 도착했다. 이삿날에는 역시 자장면이지! 어서 와서 드시고 마저 하시라는 따님의 말에도 아빠 분은 하던 일을 손에서 놓기까지 한참 걸린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우리에게 물으신다.


"두 분 식사는 하셨어요?"


말씀만으로도 배부르고 따듯했다.


군만두는 깜빡하고 못 시켰다고, 아무래도 맛집을 제대로 못 고른 것 같다는 딸의 말에 자장면이 맛있다고 좋다고 하시는 아빠의 모습에 내 마음이 다 일렁거렸다. 딸의 이사를 돕겠다고 먼 길 마다하지 않고 달려오신 건강하고 유쾌한 친정 부모님과 거듭 고맙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고 다정하게 소통하는 딸. 나로서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결코 맛본 적 없는 자장면의 맛이다. 이런 보통의 부모 나도 한 번쯤 맛보고 싶다는 부러움이 퉁퉁 불었다.


모든 작업을 마치고 열 시가 다 되도록 아직 저녁도 못 먹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게 끝인 줄 알았더니 또 마침 분리수거일이니 폐기물을 버리고 가자고 하는 사수. 자신이 할 테니 차 안에서 쉬고 있으라며 혼자서 1800 욕실장을 끌어내려 짊어진다. 오늘치 초능력을 모두 써버린 조수는 반쯤 감긴 흐려진 눈으로 전조등에 비친 사수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마지막 한 순간까지 끝까지 성실한 그 뒷모습. 없지 않았네. 내 옆에 있었네. 그 보통의 맛.



https://youtu.be/XqExbtyrbs0?si=PB76kq_R-rQ3925H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

저의 명자꽃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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