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외상과 선입금 사이

동병상련 디스카운트

by 햇살나무 여운


외상과 선입금 사이에는 신용이 놓인다. 사람과 사람 사이라면 단순히 신뢰라고 해도 되지만, 일과 돈이 함께 엮이면 신용이라고 해야겠지. 그런데 그 신용이라는 것이 내가 주고 싶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정한 사람이에요."라고 내 입으로 말할 수 없듯이 "나는 신용이 있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입으로 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건 그저 말일뿐이다. 그 말에 힘이 실리고 정말로 효력을 발휘하려면 검증되어야 한다. 다정도 신용도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시간과 경험 속에서 상대방이 느꼈을 때 비로소 주어지는 것이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이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의 문제와 '내가 이 사람에게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이 사람과 돈거래를 해도 괜찮을까?'의 문제는 막상 현실로 닥쳐오면 제법 거리가 멀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에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에요" 너도 나도 아무리 떠들어도 은행에서 대출을 해주지 않는다. 오랜 시간 원천세 또는 소득세와 4대 보험을 따박따박 잘 납부해 왔는지 서류로 증빙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평소에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작은 일들이 쌓여 다시는 같이 일을 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다. 돈거래는 말할 것도 없다. 그냥 주고 완전히 잊어버릴 생각이 아닌 이상 그 사이에 돈을 두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가끔 사수가 인근 타 지역 동종업계 선후배들과 협업을 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고? 협업을 요청한 대표가 일이 끝나고도 일당을 주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는 것이다. 평소에 사수에게 형님 형님 하면서 인상 참 좋게 생겨서는 정말 그럴 줄 몰랐다. 맡기면 알아서 자기 일처럼 해내는 사수의 손기술은 당장 필요해서 빌려 써놓고 언제 주겠다는 말도 없고 태도가 애매모호하다. 그것도 사업도 잘돼서 크게 확장하고 여기저기 모여서 회식하고 있는 사진까지 올리는 사람이 심지어 그 술값도 안 되는 돈을 2주가 다 돼서 주는 경우도 있었다. 말 그대로 일당은 일당이다. 아무리 늦어도 하루 이틀을 넘기지 않는 것이 상도이자 예의임을 모르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게 참 그 사람의 안 좋은 습관인지 다른 지역에서 협업을 한 누군가가 오죽하면 돈을 달라고 공개적으로 단톡방에 올린 일도 있었던 모양이다.


반면에 이제는 선입금을 주는 사람도 있다. 단골 부동산 사장님이다. 공인중개사는 말 그대로 부동산 매도인과 매수인, 임대인과 임차인의 알 수 없는 그 멀고도 어려운 사이에서 신용을 대리해서 중개하는 공인된 사람이다. 정말 큰 금액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끼리 주고받아야 하는데 어찌 보면 그 분야 전문가인 공인중개사를 믿고 의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부동산 사장님들이 보이지 않는 까다롭고도 자질구레한 일들도 많이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말과 손은 많이 오고 가고 품도 많이 드는 데 반해 너무 자질구레해서 그다지 돈은 안 되니 누가 선뜻 속 시원하게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없던 차에 사수를 만난 것이다.


잔금과 수수료까지 전부 지급되고 부동산 거래가 모두 완료되고 난 후, 이사를 하고 보니 뒤늦게 작은 하자나 문제가 발견되는 경우들이 제법 된다. 그럴 때 부동산 사장님들이 임대인에게 또 비용을 청구하기보다는 단골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자신들이 감당하며 그 일을 처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수를 찾는다. 그러면 또 사수는 같은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격려하는 마음으로 알아서 동병상련 디스카운트를 해 준다.


물론 가격만 착하다고 신용이 되는 것이 아니다. 사수가 작업을 해준 후 지금껏 단 한 번도 뒷말이 나온 적이 없다고 그분들이 먼저 말한다. 그리고 척하면 척! 두 번 말할 것도 없이 원활하게 쌍방소통이 되고 마무리가 깔끔한 덕분에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부동산 사장님들 사이에서 소문이 난 모양이다. 입소문이 무섭다고 역시 바이럴 마케팅이 최고다. 그동안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 신용이 쌓인 것이다. 말 떨어지기 무섭게 선입금을 할 만큼 말이다. 처음에는 비록 올챙이 꼬리일지라도 때로는 잡고 보니 황금 동아줄이 되기도 한다. 상부상조의 지푸라기들을 모아 질기고 튼튼한 새끼줄을 꼬는 것이다. 사람일은 아무도 모른다. 이 어렵고 힘든 시기에 눈에 보이지 않게 쌓여온 그 신용이 정말로 큰 힘이 된다.




바로 그 부동산 사장님의 소개로 이사 나간 빈집을 이것저것 통으로 손봐주는 일을 맡았다. 세상에 이런 집이! 어떻게 집을 이 지경이 되도록 살았을까? 겉은 번지르르한 비싼 아파트인데 집안은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뜨리며 살았다니! 자기 소유의 집이 아니라고 그랬을까? 그동안 그때그때 고쳐달라는 건 집주인이 다 고쳐주고 비용도 지불하고 했었다는데, 이 지경을 직접 눈으로 봤으면 깨지는 돈도 돈이지만 집주인 속이 정말 말이 아니겠다 싶다. 그리고 그날부터 사수와 조수 역시 이곳 1403호의 흑마법에 단단히 걸려들고 말았다.



다른 업자의 갑작스러운 새치기로 스케줄이 꼬여서 하루가 통으로 펑크가 나질 않나, 평소에는 당일에 잘만 오던 자재 택배가 지연되지를 않나. 뭐 하나 속 시원하게 단번에 마무리되는 일이 없이 계속 잘못되거나 돌발상황이 연이어 발생했다. 몇 날 며칠 뭔가를 크게 때려 부수는 인테리어 작업도 아니고 평일 한낮의 작업이었데도 시끄럽다고 쫓아 올라와서 일을 하다 말고 쫓겨나기도 했다. 세면대 배수 팝업과 트랩은 뭐가 안 맞거나 구멍이 없거나 물이 새거나 해서 새 제품을 세 개나 뜯었다. 무슨 이런 일이 다 있나 싶게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정말 이번엔 진짜 진짜 마지막이다!" 하면서 세면대 아래 마지막 나사를 조이는데 와셔(washer 볼트나 너트를 조일 때 안쪽에서 나사를 잡아 단단히 붙들어주는 얇은 쇠붙이)가 산산조각 났다. 하마터면 세면대 도기를 깰 뻔했다.


일이 계속 늘어나고 지연되면서 다른 작업을 미루거나 못한다고 거절을 해야 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사수는 다른 작업을 몇 곳 덜 하더라도 지금 맡은 이 작업을 신중하게 제대로 마무리 짓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구석구석 거듭거듭 꼼꼼하고 명확하게 마무리지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내내 이 집에 매여서 다 보냈다. 턴키 인테리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마치 "이래도? 이래도?!" 하면서 우리가 어디까지 해내는지 시험하는 듯했다. 한 순간 방심하면 몇십만 원에서 몇백만 원 물어주는 건 이 바닥에서 일도 아니다. 누수 사고로 인해 50평 물침대를 겪어본 우리는 그 무서움을 안다.


https://brunch.co.kr/@shiningtree/119


그런데 말이지. 너희는 강호의 숨은 고수에게 단단히 잘못 걸렸다. 우린 결코 찌든 때에 지지 않아. 어둠 앞에 물러서는 법이 없지. 이렇게 또 한 집 살렸다. 살려냈다. 환하게! 어둠을 쌓기는 참 쉬워도 다시 밝히기는 너무도 어렵다. 그런데 이 정도는 겪어내야 그동안의 찌든 때가 벗겨지고, 묵은 틀이 깨지고 비로소 새롭게 거듭난다. 우리 손으로 직접 빛과 생명을 불어넣은 이 집과 함께 우리 역시 회색 마법사에서 흰색 마법사로 거듭나는 한 주였다. 마지막으로 조용히 하루 더 들러 전체를 살펴보는 사수는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빛으로-!!!


keyword
이전 02화조수, 사점을 갱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