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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 말고 꽃생

사심 말고 양심

by 햇살나무 여운


작년에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 환풍기를 교체해 준 적이 있다. 1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 그곳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환풍기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고 A/S를 해달라고. 사수는 일단 한 번 방문해서 확인해 드리겠다고 했다.



제품을 구입했던 기록을 찾아보니 4월 초 즈음이었다. 보통 환풍기는 쓰기 나름이긴 해도 작동 원리가 단순해서 한 번 설치하면 꽤 오래 무난하게 쓰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문해서 상태를 살펴보니 1년도 안 된 환풍기가 벌써 몇 년은 된 듯 낡아 보였다.


"24시간 틀어놨거든요."


아니, 휴대폰도 하루에 한 번은 껐다 켜줘야 하거늘! 1년 365일 중 대략 20여 일을 뺀다고 치고, 그럼 340일을 24시간 쉬지 않고 돌렸으면 8천160 시간을 달린 셈이다. 가속노화하지 않고 배길 재간이 있나? 오히려 불이 안 난 게 천만다행이다 싶다. 그런데 아직 1년이 안 됐으니 A/S 가능하지 않느냐며 알아봐 달라고, 그것도 너무도 당당하게 자기네들은 못 하니 사수에게 알아서 해달라고 한다.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른 거 뭐 만지고 가신 거 아니에요?"


우리가 다녀간 뒤로 나머지 두 개도 작동을 안 한다고. 사수는 눈이 없을까봐? 나머지 환풍기들도 이미 돌아가신 지 오래였다.


제품값을 포함하여 10만 원도 되지 않은 금액으로 설치를 해놓고, 일주일이나 한 달 만에 이상이 생긴 것도 아니고 1년 가까이를 그것도 차고 넘치다 못해 지나치게 사용을 해놓고서 이제 와서 제품이 이상하다니. 스테인리스 강철로 만든 제품도 아닌데 말이다.


왔다 갔다 뜯고 A/S센터 찾아서 가져다주고 또 왔다 갔다 찾아와서 다시 설치하는 쪽과 그냥 새 제품을 설치하는 쪽 중에 시간과 비용 대비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지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노골적으로 기분이 나쁘다는 식이다. 바빠서 시간이 없으니 끊겠다고. 그럼 누구는 한가하고 시간이 남아 돌아서 직접 방문해서 점검해 주나? 우리도 다른 업체들처럼 기본 출장비를 받아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해 보고 싶다.


설령 그 제품을 들고 A/S 센터를 방문한다고 치자. 부검해 보면 누가 봐도 과로사한 게 여실히 드러날 텐데 양심에 털 난 놈이라고 욕은 누가 먹어야 하나? 자신은 아쉬운 소리 단 한 마디도 듣기 싫고 시간과 비용도 들이기 아까우면서 우리는 그것을 무상으로 모두 대행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 하지 않은가. 블로그 이웃님의 말씀처럼 "일은 자선이나 봉사가 아님"을 몇 번이고 큰 소리로 읊어주고 싶은 심정이다. 게다가 되지도 않는 덤탱이까지 씌우려 하다니! 제발 단 돈 몇 만 원에 양심을 팔아먹지는 말자고, 우리. 어느 드라마에선가 싫은 사람과 일하지 않는 게 사치라고 하던데, 나도 그 사치 좀 부리고 싶다, 누리고 싶다.




진심 가득 감동의 문자메시지


너무 무거워서 움직이기도 어려운 벽붙박이 화장대가 벽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다고 수리 요청이 들어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애쓰는 사수의 모습을 옆에서 직접 다 지켜본 세입자 의뢰인이 너무 고생하셨다고 고맙고 미안하다며 사수에게 커피 쿠폰을 보내왔다. 공들여 쓴 짧지 않은 메시지와 함께. 수리 후 비용은 집주인이 지불해 주기로 되어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굳이 자신의 돈을 써가면서 말이다. 싸대기 날리는 놈은 따로 있는데, 전혀 뜻밖의 사람이 봄날의 햇살처럼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그렇게 함께 다 보고 겪으면 쉽게 함부로 말하지 못하고 그 고마움을 아는 것이 인지상정이고 인지상식 아닌가. 사람으로서 마땅히 가지는 일반적인 상식과 인정 말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일까? 내가 너무 돈돈돈 하는 것일까? 뭘 더 알아주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거창하게 공정하기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우리가 바라는 건 우리의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정당한 대가와 상식이다.


보이지 않는 이면의 과정을 볼 줄 알고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성숙한 어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고생해서 버는 단돈 몇 만 원이 얼마나 귀한지 쉽게 허투루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이, 힘들지만 좋다. 이렇게 고생하는데 뭐가 좋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덜 벌더라도 우리의 원칙과 양심을 지키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할 수 있어서 속이 편하다. 오늘 하루도 실컷 고생하고 들어온 사수가 얼마나 고맙고 안쓰럽고 어여쁜지 모른다. 없으면 안 되는 이 귀한 조수의 손으로 직접 또 500만 원짜리 지압을 해주며 진심으로 행복하고 보람 있다. 고생 아니고 꽃생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어요. 알죠? 입금해요, 사수님!


이제는 비밀이 없는 세상이다. 모든 게 실시간으로 보여지고 숨김없이 드러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도 양심과 인정을 팔아버린 이들이 늘 쉴 새 없이 가벼이 더 시끄러운 걸 보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양심은 아무래도 꽤나 무게가 나가는가 보다. 이곳저곳 다니며 이 꼴 저 꼴 다 보면서 과정을 알고 속을 알면 못 먹을 음식, 못 다닐 가게,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많다. 한 번 보고 말 사이라면 몰라도 이제는 안과 밖, 겉과 속이 일치해야만 롱런할 수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양심을 판 인생은 결코 꽃 같은 인생이 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안다. 상식과 양심이 귀하디 귀한 세상이 되어 버렸지만, 그래서 자신을 속이지 않는 삶이 그만큼 더 값진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사는 동안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뭘까?

싫어하는 사람과 일하지 않는 거!


- 드라마 <모텔 캘리포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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