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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신소멸형 진상보험

중용 제23장의 현신

by 햇살나무 여운


도로 위에서 놀라운 광경을 맞닥뜨렸다. 자그마치 휴대폰 여섯 대를 굴리고 있는 배달 오토바이! 지금껏 내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어쩌면 이미 흔한 풍경일까? 달리는 길 위에서 동시에 회사 여섯 개를 운영하는 것과 다름없어 보인다. 저걸 다 어떻게 감당하지? 휴대폰 하나에 단톡방 한두 개만 해도 에너지를 많이 쏟는 나로서는 그 광경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만큼 먹고살기가 어찌나 치열한지 오죽하면 그럴까. 우리도 생계를 위해 이 전화 저 전화 받으며 이곳저곳 길 위를 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정해진 자리, 정해진 시간에 책상에 앉아 남의 일 해주고 월급 받던 예전의 나였으면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나 역시 변해 있었다.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 일이 되어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부디 무탈하게 안전하게 일하셨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 사람 역시 최선을 다해 열심히 뛰는 한 가정의 가장일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너무 무리하다가 순리를 벗어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최근 인근 지역에 집수리 업자가 네 배 넘게 늘어나면서 일 자체도 줄었지만 문의 오는 지역 역시 많이 좁아졌다. 그러다 얼마 전 사수가 소속된 커뮤니티에서 젊고 체력도 좋고 열정 넘치는 한 신규 업자가 같은 지역에서 엄청난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보통 사람 마음은 몹시 부럽고 질투가 날까? '날까'가 아니지. 당연히 나지. 다른 일이었다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정해진 목표를 달성해야 하고, 성과를 입증해야 하고, 누군가와 실력을 겨루어 비교당하고 등수가 매겨지고, 승진하지 못하면 좌천되거나 잘리는 세계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이 일에서는 아니다. 현장에서의 일은 아니다. 직접 해보니 그만큼 매출을 올리려면 무언가를 갈아 넣거나 비싸게 받거나 아니면 해야 할 무언가를 하지 않거나, 어떻게 할지 뻔히 보이기 때문이다.


하루에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오늘 한탕만 하고 말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 데리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제 몸뚱이 하나로 아무리 열심히 달린다고 해봤자 해낼 수 있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한 건이라도 더 쳐내기 위해 무리해서 속도를 올리고, 빨간 불을 넘고, 한번 더 조이고 한번 더 점검해야 할 일을 대충 건너뛰게 되고, 처음 몇 번은 괜찮다가 점점 둔감해지고 굳어져 습관이 될 것이다.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한.


결국 얼마 후 사수가 다른 소식을 전해온다. 매출을 한껏 올리던 바로 그 업자가 싱크대 아래 부품을 교체해 준 집에서 큰 누수사고가 생겨서 천만 원 가까이 물어주게 생겼다고. 하필 아랫집이 인테리어를 새로 한지 얼마되지 않은 데다가 또 하필 수리해 준 그 집이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보험 주소 이전이 안되어 있어서 보험금으로 처리가 안된다는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으면 사람 마음은 또 순간 한편으로 '거 봐라. 내 그럴 줄 알았다.', '그럼 그렇지. 어째 잘 나간다 싶더니 쌤통이다.' 싶은 마음이 들까? 역시나 이 일에서는 아니다. 그런 사고는 언제라도 누구에게라도 생길 수 있는 일이고, 나의 일이고 우리 일이기도 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그래서 동료들끼리 십시일반 모금을 하자며 사수도 조금이나마 보태기로 했다고 한다. 직접 통화까지 하며 가까운 곳에 있으니 손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당부까지 한다. 우리 역시 언제 어디선가 받았던 도움이고 받을 도움이기도 하니까. 돈만 돌고 도는 건 아니다. 도움도 돌고 돈다. 그래서 삶이 무너지지 않고 버텨진다. 부디 일이 무사히 잘 수습되고 큰 공부값을 치른 이번 경험을 통해서 그만큼 크게 배웠기를. 그걸 메꾸겠다고 부디 지금보다 더 무리하는 선택을 하지 않기를. 그러나 한 번 가속도가 붙은 습성은 잘 고쳐지지 않기도 하는 법이라서......


하면 할수록 이 일은 누구나 시작은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번 주에도 역시나 그냥 넘어가면 섭섭하지. 진상 이즈 에브리웨어! 진상 이즈 올더타임! 진상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인지!


부동산 소개로 싱크대 하부장을 수리해 준 집에서 이틀 후 다시 연락이 왔다. 방문 하나가 안 닫힌다고. 사수는 알겠다고 "봐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다시 그 집에 방문했다. 문이 이미 많이 쳐진 상태라 바닥에 제법 끌린 자국이 있고 해서 결국 문을 떼고 깎고 조이고 다시 달고 해서 고쳐주었는데, 아니나 글쎄 집주인이 돈을 못 주겠단다. 부동산을 통해서 연락이 왔는데, 한 번 "봐 주겠다"고 해놓고 왜 수리비를 달라고 하느냐고.


어이가 없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데도 국어가 이렇게나 어렵나? 그게 그런 뜻으로 읽힐 수도 있구나. 집주인과 세입자를 연계한 양쪽 부동산 사장님들도 어이가 없긴 마찬가지인가 보다. 아무리 세를 내준 집이라도 결국 자기 집인데, 그렇게나 돈 들여 고치기가 아깝고 싫은가 하고 말이다. 결국 집주인은 끝까지 돈을 못 주겠다고 우기는 통에 부동산 사장님 두 분이 일 부탁해 놓고 죄송하다며 사수에게 반반 보태서 조금이라도 드리겠다고 보내온 모양이다. 사수는 또 굳이 괜찮다며 커피 쿠폰으로 화답을 하시고.


얼마 전에는 꽤 오래전에 설치해 준 환풍기에서 소리가 크다고 해서 결국 다시 현금으로 되돌려 준 일도 있었다. 다른 제품을 가져다 교체도 해줬는데 그래도 불편하다고 해서 본사 A/S를 신청하고 날짜를 잡아서 전문기사와 함께 방문해 그 아파트의 특성상 역풍이 심해 환풍기가 더 강하게 작동해서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명확히 진단까지 내려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또 어떻게 해주실 거냐고 한다. 그럼 이번에도 한번 더 다른 제품을 가져다 다시 설치해 주겠다고 하니 "지금 제품 그대로 계속 쓰면요?"하고 물어 온다. 본사 직원도 답이 없다는데 사수가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겠는가? 결국 돈이다. 그래서 지금 설치된 제품은 그대로 계속 쓰는 걸로 하고 현금으로 배상해 주게 된 것이다. 처음 설치해 줬을 때는 이제 더 이상 냄새가 안 난다고 그렇게나 좋아하더니 이제는 소리가 거슬린단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10만 원 안 되는 돈으로 메꿀 수 있는 진상이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초가삼간 다 태우지 않고, 가래로 막을 일 아닌 호미로 막는 정도의 일이라서. 문제는 호미질은 쉼없이 죽어라고 해야하듯이 이런 일이 매주마다 한두 건씩은 꼭 있다는 점이다. 만기환급형이 아닌 갱신소멸형 진상보험이라고 해야 할지. 오며 가며 시간 쓰고 마음 쓰고 기술 쓰고 돈까지 쓰고! 덕분에 도는 조수가 닦는다. 이런 진상 고객을 만날 때마다 내 몸 안에 사리 맺히는 이 기분! 전혀 아무렇지 않게 괜찮고 싶은데 아무래도 은근히 내상을 입는다. 남의 일이 아니어서. 내 일이기도 해서 어쩔 수가 없다.


속상해할 틈도 없이 사수는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특기를 연마한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남의 밥줄 끊는 죄라는데, 밥줄은 점점 짧아지고 밥그릇은 작아지고 눈뜨고 주머니를 뜯겨도 사수는 아랑곳 않고 그럴수록 속도를 늦춰 내실을 다지고 내공을 쌓는다. 남들 눈에 띄지도 않는 아주 작은 부분 부분에 최선을 다해 정성껏 간절히 진실되게 하는 중용 제23장의 현신! 그 디테일하고 세심한 작업을 숙련시키기 위해 사수는 1박 2일 지방에 있는 인테리어 필름 시공현장에까지 참관 실습을 하러 간다. 따로 학원을 등록해서 배울까 현장이 나을까 고민하던 차에 인테리어 필름을 전문으로 하는 지방 업체 사장님이 현장 실전이 더 효과적이라고 별도의 교육비 없이 선뜻 불러주었다고 한다. 장갑과 기본 도구도 미리 준비해서 챙겨주시고 일이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자세히 가르쳐주는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다.


원래는 하루였는데 일부러 시간을 내어 자세히 설명하고 가르쳐주느라 작업이 지체되었다고, 그곳 사수께서 사수에게 "거기 잘하시는 분, 내일도 와서 좀 도와주세요!" 하셨단다. 사수는 또 덕분에 많이 배웠다고 흔쾌이 좋다고 한다. 배움에 아주 신이 나셨네요, 사수님!


"이제 주문 받아도 될 것 같아요."





부분에 간절히 하라.
부분에 간절하고 탁월하면 진실해질 수 있다.
진실하면 변화의 싹(형상)이 드러나고,
싹이 드러나면 흐름이 한층 뚜렷해지고,
한층 뚜렷해지면 흐름이
누구에게도 분명해지고,
한층 분명해지면
흐름이 사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고,
사람을 흔들어서 움직이게 하면
흐름의 작은 변화가 일어나고,
흐름의 작은 변화가 쌓이면
최종적으로 흐름의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오직 세상에서 완전한 진실만이
커다란 변화를 제대로 일구어낼 수 있다.


- 신정근 《오십, 중용이 필요한 시간》
[곡능유성曲能有誠(23장)]중에서



나의 사리를 녹여주시는 감동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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