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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 사점을 갱신하다

아주 미세한 작은 턱

by 햇살나무 여운


어제 나가서 내일 들어온 기분이다. 마음으로 바란 적 없는데 비슷한 시기에 같은 일이 연이어 들어온다. 이 작업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더 이상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는데 아마도 에너지는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나 보다. 만약 무언가를 '하고 싶다'라고 바라든 '안 하고 싶다'라고 바라든 마음은 그냥 '무엇' 그 자체에만 집중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욕실 수납장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라고 바랄 것이 아니라 '시트지가 하고 싶다!'로 마음을 바꿔 먹어야겠다. 진심이다.


욕실 수납장을 다섯 개쯤 하고 나니 LED전등 작업은 식은 죽 먹기요, 환풍기는 껌이다. 더 힘든 일을 겪고 해내고 나니 이전에 힘들다고 느꼈던 일은 이제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맹자 가라사대! 하늘이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에게는 그 역량을 시험하기 위해 더 큰 시련을 주신다더니. 조수는 셀프로 사점(死點 dead point)을 갱신하고 레벨업을 해냈다. 정말이지 나를 죽이지 못한 시련은 나를 더 강화시킬 뿐이다.




벽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먼저 손에 손 잡고 면벽수행이 필히 동반된다. 마음에 번뇌가 많다면 함께 하시길 권해드립니다. Put your hands up!


조수가 면벽수행 오체투지를 무사히 해낼 수 있는 작고 위대한 비밀이 하나 있다. 처음에 매달려있던 욕실장을 떼어내면 타일 벽 아래에 0.5센티미터도 안 되는 아주 미세한 턱이 있다. 언뜻 봐서는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이게 뭐 얼마나 힘이 되겠나 싶게 사소하고 하찮아 보인다. 그런데 바로 이 턱이 있어서 버틸 수 있다. 아주 작은 그 턱 덕분에 믿고 기대어 무너지지 않고 해낼 수 있다. 물론 늘 있는 것은 아니다. 없는 경우도 많다. 그 턱이 없으면 잠시도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 조수는 이제 그만 시트지가 하고 싶다. 있고 없고는 가능과 불가능을 가르는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가 된다.


사람의 마음에도 같은 원리가 작용한다. 별것 아닌 정말 사소한 격려 한 마디가 아주 미세한 턱이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하고 무너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도와준다. 힘들더라도 할 만해진다, 살 만해진다. 이토록 작고 하찮은 그 한 마디가 없어서 사람은 정말로 죽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돈도 들지 않고 품도 들지 않는 이 한 마디에 얼마나 인색한가. 매일 얼굴을 맞대고 밥 한 끼 함께 하는 저녁 자리에서 짧은 말 한마디로 아주 미세한 이 턱을 쌓는다면 벽은 얇아지고 덕은 두터워질 텐데. 그 덕에 짊어진 짐은 어깨춤을 출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질 텐데.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천장에 점검구를 좀 뚫어달라는 요청이 있어 늦은 밤 카페 영업을 모두 마친 후 10시 반이 넘어 방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해야만 한단다. 온 김에 싱크대 수전까지 교체해 달라고 해서 작업이 더 길어졌다. 아무래도 먼지가 많이 날릴 텐데 카페 집기와 재료들을 넓게 덮을 만한 뭔가가 있으면 좀 달라고 하니 무엇이 어디 있는지 사장님이 잘 모른다. 그 늦은 시각 퇴근한 직원에게 전화를 걸어 묻고 있다. 사수가 천장 작업을 무사히 마치고 조수가 작업대와 바닥에 먼지를 걷어내고 빗자루질을 하는 동안에도 사장님은 가만히 서서 지켜보고 있다. 축축하고 지저분한 바닥에 박스를 깔고 눕고 엎드리고, 좁디좁은 싱크대 아래에 몸을 구겨 넣으면서 그 속을 보고 알았다. 주인이 먼저 나서서 움직여 일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지 않는 매장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주인이 있어도 없는 셈이거나 객이 와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가게는 안 봐도 넷플릭스다. 결국 자정을 넘기고 새벽 1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다. 심지어 처음 간 곳인데 입금은 다음 날 해주겠다고 한다.


앞서 방문했던 집에서도 예정되지 않았던 작업이 추가된 상황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말만 하면 나오는 식당 메뉴가 아닌데. 대형 주방 후드를 교체하고, 변기 부품을 갈고, 세면대도 예정했던 한 곳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추가해서 두 곳 모두 팝업과 배수트랩을 교체한 후였다. 갑자기 싱크대 배수통도 교체해 달라고 하는데 작업하면서 목격한 곳곳의 집의 상태가 이미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에 마음의 각오가 필요했다. 부품이 없어서 다음에 한다고 하지 왜 하필 눈치 없게 또 차에 여분의 재고가 있었는지!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분명 새 제품을 가져다 교체를 했는데 물이 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번을 풀었다 다시 조여봐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하수구 상태는 이미 혈전으로 가득 차서 중증 동맥경화로 숨만 겨우 붙어있었다. 당장 밥도 해야 하고 살림을 해야 하는데 물이 새면 어떡하느냐고 대놓고 짜증을 내신다. 제품이 불량인 것 같다고 내일 아침 일찍 다시 와서 교체해 드리겠다고 하고 일단락을 지었다.

물이 새는 싱크대 배수통


그리고는 늦은 밤 카페 작업을 마저 하고 새벽에 들어온 것이다. 서너 시간 눈을 붙인 후 사수는 새 부품을 들고 다음날 아침 7시에 곧바로 다시 그 집에 방문했다. 이런! 또 샌다. 새 제품들이 연속해서 모두 불량일리는 없는데. 몇 번을 가만히 한참 살펴보니 세상에나! 싱크대 철판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이 아닌가. 괜히 죄 없이 멀쩡한 새 제품만 버렸다. 사수는 우레탄 실리콘으로 새는 구멍을 막고 마저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이다. 분명 조만간 하수구도 뚫어야 할 것이고, 집 곳곳이 손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해 보였다.



집이 사람이고, 사람이 곧 집이다. 집이 병들면 사람이 아프고, 사람이 병들면 집도 함께 아프다. 그런 집에 들고 나면서 머무르다 보면 아무래도 어둠이 덕지덕지 묻어 나온다. 평소 뭉툭하던 물건에 감정이 실리면 순간 날카로워진 도구로 탈바꿈해서 다치기도 하고, 괜히 서로 짜증이 불거져 잘 참아오던 힘듦도 화가 되어 격한 말로 삐져나오기도 한다. 사람이든 공간이든 분위기는 정말 전염성이 강하다.


사수와 조수는 서로 더 이상 말할 힘도 없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지만, 바로 이 순간 이 필요하다. 그 미세한 작은 턱! 자존심을 녹여 인내심으로 승화시키는 연금술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너만 힘들어? 나도 힘들어!"가 아니라, "내가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얼마나 더 힘들까? 수고 많았어요."로 바꿔 말하면 전쟁이 평화가 된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500만 원짜리 릴랙스체어를 들여놓는 순간이다. 밖에서 덕지덕지 묻혀온 어둠을 툭툭 털어내고 내 집에 결코 들이지 않는다. 신발을 벗고 내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어둠도 신발과 함께 벗어 놓는다. 결코 우리집 문턱을 넘지 못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달이 참 예쁘다."라고 말하는 것이 조수의 진정한 비급(秘笈)이다.






여운 <명자꽃은 폭력에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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