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프론과 고무링
"서둘지 말고 천천히 하세요. 저 하나도 안 급해요. 제가 잡아드릴게요. 안전하게 천천히 내리세요."
엘리베이터에 짐을 한가득 싣고 내려오는데, 1층에서 기다리시던 아주머니께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우리를 보더니 너무나 우아하게 말씀하신다. 참숯불가마 원적외선으로 쑤시는 무릎을 찜질받는 듯한 이 고슬고슬하고 보송보송하고 따땃한 친절!
이게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바로 직전에 같은 상황에 전혀 다른 온도를 맛보았기에 유난히 더 뜨뜻하다. 철거한 세면대와 변기를 나눠 옮기고 있는데, 작업한 세대 바로 옆집 아주머니께서 카트에 짐을 싣고 있는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시며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하신다. 조금 멀리서 왔다고 하니 그럼 됐다시며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도 찬바람을 쌩하니 일으키며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가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욕실에서 씨름하며 우리가 왔다 갔다 작업한 걸 아시는 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이번엔 장거리출장이었다. 강감찬 장군이 태어나던 때 별이 떨어졌다는 낙성대! 서울대가 바라다보인다. 단골이 되신 집주인께서 세를 내어준 아파트가 워낙 오래돼서 낡았는데, 이번에 세입자가 나가기로 했다고 부동산에서 집 보러 오면 얼른 집이 빠질 수 있게 좀 깔끔하게 여기저기 손봐달라고 하신다. 사수의 손맛을 보신 후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싶지 않다고, 거리가 좀 되지만 가능하면 좀 부탁한다고 사수에게 요청해 오셨다.
더워서인지 비가 많이 와서인지, 아니면 다들 민생회복지원금을 기다리는지 자잘하게 한두 건이라도 들어오던 일들이 거의 없어서 조용하던 참이었다. 사전견적을 위해 단골 집주인분과 날을 잡아 먼저 방문해서 수리할 항목을 뽑은 후 집을 보러 왔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띄는 노후된 욕실의 세면대와 변기, 수전을 서둘러 교체하기로 했다.
살림을 살고 계셔서 세입자분께 미리 양해를 구하고 일정을 잡아 방문했다. 아파트에는 여든 후반 되신 할머니께서 혼자 지내고 계셨다. 낯선 사람들이 방문하니 처음에는 경계도 많이 하시고 거리를 두시다가 차차 마음을 여신다. 손녀딸이 서울대에 로스쿨까지 거쳐 변호사가 되어 지방에 내려가게 되었다고. 그래서 이사를 간다고. 어르신의 따님 부부도 지방에서 교수를 하고 있다고. 누가 뭐래도 부모에게는 자식 공부 잘하는 게 최고의 자랑이구나 싶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따님이 재직하는 대학교가 마침 지방에서 내 친구의 딸이 다니고 있는 바로 그 학교였다. 자랑할 게 없던 나는 갑자기 공부 잘하는 친구 딸들이 내 딸이라도 된 것처럼 맞자랑을 했다. 이 무슨 주책인지! 이런 마음이구나. 공부 잘하는 딸 셋을 둔 내 친구는 밥 안 먹어도 정말 배부르겠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러지 말아야지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말끝마다 '내가 아는 교수님이', '내가 아는 작가님이' 들먹거리며 타인의 학력이나 권위, 유명세를 마치 자신의 것인 양 가져다 붙이고 내세우는 게 가장 초라하고 낯부끄럽다.
싱크대나 욕실 수전을 교체하다 보면 별것 아니지만 없어서는 안 될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가 있다. 아무리 값비싸고 고급스러운 수전을 아무리 완벽하게 설치해도 이게 빠지면 소용이 없다. 바로 테프론 테이프와 고무링이다. 특히 고무링은 여기저기 온갖 자재에 보이지 않게 자리를 잡고 있다. 이미 끼워져 있거나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아서 있을 때는 모른다. 그런데 없으면 헐거워서 반드시 흔들리거나 물이 샌다. 풀고 다시 작업해야 한다. 작아서 잘 빠지고 잃어버릴까 봐 제품에 여분으로 하나 더 들어있기까지 하다. 그다음이 테프론 테이프! 얇은 비닐테이프처럼 생긴 고체형 본드라고 보면 된다. 벽 속 파이프와 수전을 잇는 수도연결부 편심 나사산에 테프론을 꼼꼼히 틈 없이 충분히 감아서 집어넣어야만 물이 새지 않는다. 테프론 테이프를 감는 방향 또한 그냥 감는 게 아니라 나사산을 돌리는 같은 방향으로 감아야 한다. 조수는 아직 서툴러 방향이 헷갈린다.
짐을 실어야 하는데 비가 무섭게 쏟아진다. 아침 10시부터 작업해서 하루가 다 갔다. 갈 길도 먼데 이미 퇴근시간을 넘긴 저녁 7시 반! 빗줄기가 좀 잦아들기를 잠시 기다리며 우리의 하루 풍경을 되돌아본다. 이쯤 되면 무념무상 해탈의 경지에 다다른다. 고작 그게 힘들어? 뭐가 그렇게 힘들어? 그게 뭐라고! 그동안 쌓아온 아흔아홉은 내팽개쳐버리고 별것도 아닌 그 마음 한 끗을 어찌하지 못해 의심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짓밟고 끌어내리면서 아웅다웅하며 사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 갑자기 몹시 슬퍼졌다.
처음 마주하는 아주머니도 저리 선뜻 친절을 베푸는데, 지나온 과정을 모르지 않는 이웃은 오히려 아래로 내려보며 냉소적이다. 인간은 무엇일까? 사람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그렇게 겪고 지나왔으면서도 마음이 왜 그렇게 밖에는 되지 않을까? 굳이 나서서 더럽히지 않아도 이미 흙도 묻히고 오물도 묻혔다. 눈물까지 안 보태줘도 땀과 비에 젖을 만큼 젖었다. 피도 볼만큼 보며 살았다. 그렇게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하지 않아도 우리는 한 번 올라가 보기는커녕 날아보기는커녕 이미 더는 내려갈 곳도 없다. 아직도 사람을 믿느냐고 묻던 <오징어게임>의 마지막 대사가 생각난다. 수많은 상처와 배신, 상실과 절망을 겪으며 자신 안에 마지막 그 무엇이 부서진 사람은 슬프다. 그래서 그리 까칠하고 냉소적이 되는 것일까?
어쩌면 나도 거의 잃을 뻔했다. 엘리베이터를 붙잡아주시던 그 아주머니가 아니었더라면. 처음에 그리 경계하고 의심하시던 어르신께서 나중에는 떠나는 우리를 보며 문 앞까지 나와 웃으시며 손을 흔들어주시던 모습이 아니었더라면.
차를 몰아 돌아가는 길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서 퇴근길 광역버스를 기다리며 끝도 안 보이게 길게 늘어선 줄을 본다. 누구보다 잘 아는 경기도민의 비애! 한때 나도 매일 네 시간을 왕복하며 저기 서 있었는데... 매일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치르며 여전히 치열한 삶을 버티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냥 사는 거야. 하루하루 떠밀려오는 삶을. 별 생각 없이. 각자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면서. 그리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