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밥 두 끼
집수리를 하러 가서는 자꾸만 차려주는 밥을 얻어먹고 오는 일이 는다. 솔직히 궁금하다. 동종업계의 다른 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실까? 가끔 스스로 정체성이 의심된다. 남의 집 가는 게 맞는지 싶다. 이번엔 특히 더, 마치 친정집 가는 기분이랄까? 오늘은 따끈따끈하게 아침부터 점심까지 두 끼나 얻어먹고 왔다. 이게 무슨 일이람!
작년 추석 즈음이었다.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못한다고 마다한 방충망 문제를 해결해 드리고 갈비찜을 얻어먹고 온 적이 있다. 그 당시 배송 사고가 생긴 갈비찜 택배 문제도 해결해 드린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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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그분께서 다시 연락이 오셨다. 사수의 휴대폰이 먹통이 되면서 모든 고객정보가 백지화된 상태에서 아무도 누군지 모르는 채로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시점이다.
"아니, 그때 그 방충망 있잖아요! 전문가 맞잖아요!" 하셨던 선생님이셨다. 말씀하시는 목소리와 분위기가 여전하셔서 무척 반가웠다. 이번엔 그림이 걸고 싶다고 하셨다.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아야 하는데, 아무나 부르고 싶지 않다고 멀지만 생각이 나서 연락하셨다고 한다. 무슨 못 몇 개 박는데 거기까지 부르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오죽하면 또 연락을 하셨을까 싶어 선뜻 알겠다고 하고 며칠 넉넉히 일정을 잡았다. 누구나 알고 보면 그럴만한 사정이 다 있는 법이다. 스토리텔링을 사랑하는 사수와 조수는 벌써부터 궁금하다.
일요일 아침 10시 반, 집 앞에 도착하니 이번엔 다행히 주차할 자리가 있다. 서울은 서울이라 지난번에 주차문제로 워낙 고생한 기억이 여전하다. 오르막길인 데다가 골목이 좁아서 한 바퀴 차를 돌려 어렵사리 주차를 하고 짐을 내렸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친정 온 딸과 사위 맞이하듯이 환하게 웃으시며 짐을 내려놓기 무섭게 식기 전에 밥부터 먹자고 하신다. 갓 지은 압력솥밥이다. 어제 일부러 경동시장 가서 끊어온 생고기라며 그 자리에서 구워서 내어주신다. 어찌나 친근하게 정성껏 챙겨주시는지 정말로 친정집에 밥 먹으러 온 기분이다. 선생님께서는 지난번 방문 때 첫 만남 저녁 자리에서 나누었던 우리의 이야기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셨다. 방충망도 완벽하게 짱짱하니 여전히 너무나 좋다고 하신다.
밀린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본분을 잊지 말자. 우리는 집수리를 하러 왔다. 못 박으러 온 김에 이곳저곳 그동안 미뤄두었던 손보고 싶었던 몇 가지도 함께 부탁하신다. 아무래도 그것만으로 부르기엔 미안하셨나 보다. 수도꼭지도 좀 봐주고, 변기 비데도 좀 봐주고, 아무래도 욕실에서 누수가 되는지 마룻바닥이 젖어서 들뜬다고 자세히 좀 봐달라고 하신다.
"우선 그림부터 걸고 시작할까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얽힌 그림일까 몹시 궁금했다. 캐나다에서 데려온 그림이라고 하신다. 그림을 데려오는데 돈이 제법 많이 드셨다고. 안타깝고 아쉽지만 다 가져오지도 못했다고. 캐나다에서 오래 사셨는데, 그곳에서 만나셨던 남편 분의 유작이라고 하셨다. 이름 없는 화가였지만, 그분과의 대화가 참 좋았다고 말씀하신다.
'저는 선생님과의 지금 이런 대화가 참 좋습니다.'
모든 예술작품이 그러하지만, 이건 '어린 왕자의 장미'와 같은 작품이다. 고유한 시간과 이야기가 담긴, 세상 하나뿐인 특별한 인연을 맺은 그림이니 그렇다면 못을 그냥 막 아무렇게나 박을 수는 없는 일이다. 혼신을 다해서 성심을 다해서 조심히 아름답게 걸어드리고 싶었다. 기술에서 예술로, 생업에서 혼업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작업하는 동안 그림이 자꾸만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 수많은 이름 없는 예술가들이 떠올랐다. 그 순수하고 고독한 영혼들! 화려하게 빛나지 못하는 별들이라도 별은 별이다. 크든 작든, 밝든 어둡든!
높이와 너비, 수평과 센터를 맞춰 무사히 그림들이 자리를 잡고 나니 선생님께서도 마음에 드셨는지 내친김에 시계도 좀 걸어주고, 나무 액자틀도 좀 걸어달라고 하신다. TV 리모컨이 말을 안 듣는다고 그것도 좀 봐달라고 하신다. 자녀분들이 모두 외국에 살고 계셔서 오늘은 사수가 사위 역할 하는 걸로 하자.
늦은 아침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데, 그 사이 또 부엌에서 뚝딱뚝딱하시더니 금세 점심으로 오이냉국에 비빔국수를 내어주신다. 한자리에서 두 끼를 얻어먹다니 이래도 되나 싶다. 밑반찬도 싸주시고, 자꾸만 이것저것 퍼주신다. 그래, 조수는 오늘 하루 딸 하는 걸로 하고, 사양하지 않고 넙죽넙죽 잘도 받는다.
말썽 일으킨 비데와 센서등을 마저 손봐드리고, 욕실 바닥은 구석구석 꼼꼼하게 살핀 후 아무래도 방수가 제대로 안 되는 것으로 보여 줄눈을 해야 할 것 같다고 진단을 내렸다. 곳곳에 백시멘트 매지가 떨어져 벽과 타일 틈이 벌어져 들뜬 곳이 많았다. 줄눈 작업은 추후 다시 일정을 잡기로 했다.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겠다고 언제든 편하게 와서 작업하라고까지 하신다.
이렇게 무엇이든 편안하게 말씀하시고 부탁하실 만큼, 그때 그 한 번에 우리를 온전히 믿고 무장해제를 하실 만큼 우리가 특별히 잘해서가 아니다. 선생님께서 본래 그런 어른이셔서 그런 것이다. 그때도 지금도 한결같은 어른다운 어른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대해주셨다. 사수 또한 돈 벌자고 못 하나 박는데 서울까지 오겠는가? 그때의 인연을 기억하고 연락하고 찾아준 마음에 보답하고자 길을 나선 것이다. 이토록 서로에게 가까운 타인이 있음으로 해서 누군가는 마음속 뿌리 깊은 허기가 조금 가시기도 하는 법이다.
집을 나서는데 멀리까지 왔다고 또 여비까지 넉넉히 챙겨 주신다. 오늘 이미 배불리 밥 챙겨주신 것만으로도 넘치게 받았다고 극구 사양했으나 끝내 어른을 이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