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바람, 의자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지난번에는 어느 정도 빈 집이 좋다더니!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 또 낫네. 빈 집은 겨울에는 너무 춥고 여름에는 또 숨 막히게 덥다. 너무 더우니 어지럽기까지 하다. 창문과 바람이 없었더라면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르겠다. 마음의 집도 그렇지 아니한가? 그 집에 과연 사람다운 사람이 살고 있는지, 창문이 있고 바람이 부는 집인지...
아파트에 노후된 샤워 수전을 교체하러 갔다가 진귀한 체험을 했다. 수전을 교체하려면 가장 먼저 전체 수도를 잠가야 하는데, 밸브를 한참을 찾아 헤매고 헤매다 결국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동굴인지 방공호인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아파트 내에 세대 앞 소화전 안에 이렇게 비밀공간이 숨어있을 줄이야! 사수가 몸집이 크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안 그럼 조수가 들어가야 했거나 못 고치고 그냥 돌아갔어야 했거나 둘 중 하나인데. 수도 메인밸브를 잠그는 일도 쉽지 않다. 온수와 냉수 밸브가 각각 따로 있고 두 집이 나란히 함께 있기 때문에 해당 세대 내의 물이 줄어드는지 틀어보고 확인해 가면서 작업해야 한다. 게다가 워낙 오래되어 힘으로 마구잡이로 잠그다가 수도꼭지를 부러뜨릴 수도 있기 때문에 천천히 신중하게 해야만 한다.
내가 이제 정말 나이가 들었구나 실감할 때는 큰 애들까지 다 이뻐 보일 때다. 예전에는 아주 어린아이들이 예뻤는데, 요즘은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큰 조카뻘 되는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애들까지 그저 이뻐 보인다. 카페에 수리 요청이 있어 늦은 저녁 가게에 들어서니 앳된 알바생 둘이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지난번 천장에 점검구를 뚫어주러 방문한 곳이었다.
저녁 아홉 시, 마감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남았다고 한다. 날이 너무 더워서인지 그 시간에도 여전히 키오스크 앞에 줄 서 있는 손님들이 많다. 기말고사 기간인지 안쪽에는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 요즘은 이렇게 저가형 카페에 작업을 하러 다니면 어린 학생들로 가득하다. 시원하고, 전기도 충전되고, 와이파이까지 마음껏 쓰면서 얼마든지 오래 머물러도 된다.
그 풍경 속에서도 아무래도 자꾸만 눈이 가는 건 떠밀려 오는 주문을 처리하느라 숨 돌릴 틈도 없어 보이는 알바생이다. 설거지할 컵이 밀려서 잔뜩 쌓여 있다. 알바생의 그 뒷모습에 열일곱의 내가 포개어진다. 내가 해주고 싶을 지경이다. 이래 봬도 한 설거지 하는데! 중국집 주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꽁초와 음식물 찌꺼기가 둥둥 떠다니던 설거지 통에 독한 세제를 풀고 손을 담그던 고등학생의 나! 지금 이 친구들은 그래도 스무 살 넘은 성인이겠지? 사수가 몸을 뉘어 싱크대 밑으로 들어가 헐거워진 수전 밸브를 조이는 동안 조수는 수전이 흔들리지 않도록 붙잡고 있는데, 바로 그 옆 제빙기 위에 마감 매뉴얼이 한가득 적혀 있다. 단 둘이서 이 모든 걸 제때 마칠 수 있을까?
서는 곳이 달라지면 뷰가 달라진다더니! 나는 서는 곳이 여전히 그때 그 자리인가 보다. 일할 생각부터 들다니!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멀티도 안 되고 속도도 안 돼서 여기서 알바를 하라고 해도 못할 것 같다. 다양한 음료를 매뉴얼대로 정량에 맞춰 배합해서 서빙하고, 그 와중에 배달 메뉴는 별도로 포장해서 챙겨야 한다. 돌아서는 대로 틈틈이 밀려드는 설거지를 해치워야 하고 주변을 정리하면서 필요한 물품과 재료를 재고도 파악해서 주문을 넣어야 하고. 몇 곳을 다녀보았지만, 이곳은 오늘따라 더 좁아 보인다. 온갖 장비와 물품에 에워싸여 있는 공간은 두 사람이 들어가 움직이기에는 턱없이 비좁아 위험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니, 몸집이 좀 크면 혼자서 움직이기에도 답답할 지경이다. 둘이서 바쁘게 움직이다가 동선이 겹치거나 꼬여서 부딪히지는 않을지 걱정되었고, 설거지를 해주고 싶다고 상상해 보면서도 서 있을 공간도 없어 오히려 방해만 될 듯싶다. 바닥은 온통 물기가 가득해 여전히 축축했고, 싱크대 주변은 곰팡이로 가득하다. 잠시 앉아 있을 틈도 없지만, 당연히 의자도 없다.
상상해 보라! 당신이 좋아하는 그 공간에 누군가는 앉을 의자도 없다니. 내 딸이, 내 조카가 여기서 이렇게 한 번 앉지도 못하고 내내 서서 숨 돌릴 틈 없이 일하고 한 시간에 만 원을 번다고 생각하니 속상하다. 쓰기는 쉽고 벌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지만, 근무환경은 열악하게 느껴졌고 노동의 밀도는 꽤나 높아 보였다. 매장마다 시간대마다 다르고 고용주나 알바생마다 다 다르겠지만, 당장 길게 늘어선 대기 줄 앞에 요령을 피울 재간은 없어 보인다. 이대로 괜찮을까? 그냥 맡겨두고 어떻게든 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최저가'라는 말 뒤에 무엇이 생략되고 희생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이 갈아 넣어지고 있을까? 모두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데, 우리는 왜 계속 먹고살기 힘들어지기만 하는 걸까?
https://youtu.be/SR0-bTKNUAI?si=CgWJSBo7rqmGLxXZ
여기선 그래도 되니까!
사람들은 대부분
그래도 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되는 거야.
당신들은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마.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
- 드라마 <송곳>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