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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집 아가씨, 떡집 아저씨

조수가 만나는 사람들

by 햇살나무 여운


민생회복지원금으로 꽃다발을 샀다. 조수도 처음 해보는 짓이다. 안 살 수가 없었다.


상가 통유리문이 내려앉았는지 자꾸 걸린다고 해서 찾아간 곳이 동네 인근 꽃집이었다. 사수가 몇 번 손봐주러 이미 들른 적이 있는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게 전체가 층고 높은 통유리창으로 둘러져 있고, 커다란 테이블 하나만 놓여 있다. 꽃은 거의 안 보이고 휑하니 비어 있어서 꽃집만 하기엔 공간이 크다 싶었다. 날이 더워도 너무 더운 날이기도 했다. 커튼을 치고 에어컨을 틀어도 별 소용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꽃들은 칸막이 안쪽 공간에 모두 들어가 숨어 있고, 작은 쇼케이스 냉장고 안에 보이는 일부만으로 이곳이 꽃집이구나 겨우 알 수 있었다.


아직 제법 젊어 보이는, 꽃을 닮아 어여쁜 사장님이 열심히 꽃을 다듬고 있다. 꽃다발을 만드는 모양이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했는데, 가게 두 곳을 운영하던 옛 사장님으로부터 이곳을 그대로 인수받아 사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열심히인지 오늘 새벽에도 서울 양재꽃시장까지 나가서 꽃을 한 아름 넘게 사 왔다고 한다. 졸업입학 시즌도 아니고, 생일이나 기념일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고서는 꽃다발 살 일이 있을까? 손님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인다. 물론 요즘은 예약주문을 많이 하기도 하니깐 보기와는 다를 수도 있다. 뙤약볕에 저 거대한 유리문도 녹아내리는 지경인데, 저 꽃들을 다 어떡하나? 못 팔면 며칠도 못 가서 시들어 다 버릴 텐데... 어디선가 읽었다. 꽃이 비싼 이유는 버리는 꽃이 많아서 그 값까지 포함되기 때문이라고.


사수는 땡볕에서 낡고 녹이 슨 플로우 힌지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씨름을 하고 있다. 아직 버틸 수 있어, 쓸 만해. 살려 보자! 도어락의 구멍도 유격이 안 맞아서 수십 번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각도를 조절한다. 이때다 싶었는지 꽃집 사장님이 분주한 손길을 멈추고 시원한 생수병을 건넨다.


"꽃다발 하나만 포장해 주세요. 지역화폐 되죠?"


조수는 결국 그 말을 뱉고야 말았다. 그 시원한 생수를 건네는 손길이 고마워서. 이렇게 쓰라고 준 민생회복지원금 아니던가. 지역 자영업자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는 거지, 뭐! 솔직히 나는 나를 위해 꽃이나 케이크를 사는 사람이 못 된다. 생일이나 기념일에도 사수가 꽃다발을 사준다고 하면 현금으로 달라고 하는, 이럴 때는 낭만은 확실히 얼어 죽은 찐 현실주의자가 된다. 그 돈 벌려면 뼈가 빠지고 '쎄(혀)가 빠지게' 일해야 한다는 걸 몸이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내가 나를 위해 꽃을 샀다. 그것도 한두 송이도 아니고 커다란 꽃다발로. 그동안 오며 가며 내내 한 번도 꽃을 못 팔아준 것도 미안했고, 젊은 사장님을 응원하고 싶기도 했다. 그 옛날의 나 자신을 응원하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유리문 수리비는 다행히 건물주에게서 받았다. 왈가왈부하지 않고 선뜻 문을 고쳐주고 비용을 지불하는 건물주여서 내가 다 고마웠다. 그렇지 못한 건물주도 있어서 몇 달이나 지난 비용을 아직도 못 받고 있다고 사수에게 하소연을 해오는 상가 총무님도 있다.


나의 주님은 아니지만, 좋은 건물주님을 또 만났다. 이번엔 떡집 아저씨였다. 서울에서 30년 동안 떡집을 하다가 허리를 내어준 대가로 건물 두 채를 얻으셨다고 한다. 지금은 월세를 받으며 생활하시는데, 어디가 고장 났다거나 불편하다고 세입자가 고충을 토로하면 시간 내어 쫓아다니며 바로바로 고쳐 주신다. 겉으로 뵙기엔 산적처럼 투박해 보이셨지만, 말씀을 나눠보니 순박한 동네 아저씨 같으시다.


꽃집 아가씨도 만나고 떡집 아저씨도 만나고. 그동안 이렇게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다. 높은 집값을 자랑하는 유명 브랜드 고층 아파트에서부터 지하상가는 물론이고, 낡은 주택도 만났다. 갤러리 같은 50평 대도 가 봤고, 5평 남짓의 오피스텔 원룸도 가 봤다. 우리와 같은 자영업자들은 물론이고, 부모님을 모시고 살며 아이 둘에 저녁에 나가 배달 라이더를 하는 가장도 만나고, 택배 노동자와 야간에 쿠팡 물류 일을 하는 젊은 플랫폼 노동자도 만났다. 대기업 임원이나 서울대 박사 출신의 교수도 만났고, 의사와 약사도 만났다. 비싼 동네에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지고 있으면서 세금 내기 힘들다고 무조건 깎아달라는 집주인도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를 키우며 근로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니는 어린 엄마도 있다. 돈이 없어 당근에서 싼값에 덜컥 중고 도어락을 샀는데, 낑낑대며 혼자서 설치해 보려다 도저히 안 맞다고 어쩔 줄 몰라 사수를 찾는다. 주식으로 흥망성쇠를 두루 경험한 사람도 만났고, 누군가의 젊음과 열정을 갈아 넣는 대가로 사장 놀이 하면서 외제차 끌고 골프 치러 다니는 사람도 만났다. 쥐가 나오는 음식점도 만났고, 먼지 한 톨 없는 무균실 같은 집을 유지하는 젊은 1인 남성 가구도 만났다. 착실하게 공부하고 일하고 이제 막 가정을 꾸리고 새살림을 시작하는 희망에 찬 신혼부부도 만나고, 퇴직 후 무료함을 견디며 뭐라도 할 줄 아는 게 있는 사수를 부러워하는 사람도 만난다. 아픈 아이를 키우는 부모도 만나고, 휠체어를 타는 남편과 오랜 세월 의리를 지키며 사는 아내 가장도 만난다. 젊은 1인 가구도 많고, 노년의 1인 가구도 많다. 개와 고양이는 이제 정말 한 식구임에 틀림이 없다. 식물원 부럽지 않은 베란다 정원을 가꾸는 식집사도 많다. 물 한 모금 내어줄 줄 모르는 사람도 만나고, 고기 굽고 생선 구워 집밥 차려주는 사람도 만난다. 첫 만남에도 기꺼이 꽃을 건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랜 만남에도 매몰차게 찬물을 끼얹는 사람도 있다. 사는 게 그렇다. 사람이 그렇다.



그렇게 매일매일 사수와 조수는 사람이라는 집을 만난다. 겉보기에는 다 같은 집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제각각 모두 다른 이야기를 품은 집이다. 크게 다를 것 같지만 또한 별반 다를 것도 없다. 그 사람이라는 집들이 모여 세상을 이룬다. 나는 단지 한 사람을 만났을 뿐인데 온갖 세상을 다 마주하고 온다. 그 집이라는 세상은 나의 욕망과 허영, 허기와 결핍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무엇을 쫓을 것인가? 무엇을 지킬 것인가? 나는 과연 어떤 집이 될 것인가? 왜? 어떻게 살기 위해, 어떻게 살지 않기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일하는가? 잊지 말자. 잃지 말자.


오늘도 땀으로 그 욕망을 씻는다. 한(汗)으로 한(恨)을 씻는다. 모처럼 얼굴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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