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까마귀
요즘 가는 곳곳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며 내려다보고 비웃는 까마귀 한 마리가 있다.
까악-까악- 깍깍깍-!
까악-까악- 깍깍깍-!
"쟤 또 왔네. 또 왔어!"
우리도 덩달아 따라 웃는다. 이제는 마치 오래된 친구 같은 기분마저 든다.
그러고 보면 늘 한두 마리씩은 있다. 그 까마귀는 늘 우리 바로 근처 지붕이나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늘 꼭 거기쯤에서 언저리를 맴돌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비아냥거리고 비웃을 기회! 정작 저 높이 하늘을 날고 있는 새는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다. 내려다볼 필요도 의지도 없고, 굳이 비웃지도 않는다. 항상 우리 근처를 맴도는 비열한 까마귀들은 다른 새들처럼 저 멀리 저 높이 좀 더 부지런히 날 생각은 안 하고, 우리가 땅이라는 현실을 딛고 서서 하늘 같은 이상을 올려다보고 그곳을 향해 한 걸음 올라서려는 찰나에 때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푸른 시야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비웃음을 흘린다.
그러든지 말든지 사수와 조수는 할 일을 한다. 아홉 번 허리 굽혀 일하고, 한 번 허리 펴고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구슬땀을 닦는다. 우리는 하늘을 우러러보길 선택한 사람이고, 저 넓고 드높은 푸른 하늘을 다 가리기에는 너의 날개는 고작 한낱 점일 뿐이구나, 까마귀야. 땅도 못 되고 하늘도 못 되는 딱 그 경계에서 어정쩡하게 그렇게 있거라, 계속! 우린 우리만의 지평을 넓혀 갈 테니.
오늘은 옥상 방수작업인데, 때마침 날도 참말로 좋구나! 세 번은 덧발라야 한다는데 아주 잘 마르겠어. 초강력 방수 바닥제 이름이 방수 깡패란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수 방패단이라고 하자! 깡패와 방패가 만나서 빗물 한 방울 샐 틈 없이 장군멍군 해보자! 곧 재개발에 들어가는 낡디 낡은 빌라 옥상이다. 내년이면 허물 예정이라서 건물주는 최소한의 보수만 해달라고 하는데, 사수는 또 보란 듯이 과잉 시술을 하신다. 와본 적도 없이 투자 목적으로 사두기만 한 건물주가 문제가 아니라, 지금 현재 살림을 살고 있는 세입자가 중요하니까.
방수제와 물을 2대 2로 섞어서 하도! 방수제와 레미탈(시멘트/몰탈)과 물을 2대 2대 2로 섞어서 중도! 방수제와 물을 한번 더 2대 2로 섞어서 마지막 상도! 재료는 믹싱기로 바닥까지 충분히 골고루 섞이도록 잘 저어준다. 방수제의 하얀색이 다 사라져 투명하게 될 때까지 충분히 말려준 후 다음 작업을 해야 한다. 비가 와도 안 되지만, 날이 너무 뜨거워서 방수제가 충분히 속 틈새까지 스며들기 전에 너무 빨리 마르는 것도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다. 그나저나 반죽을 고르게 얇게 펴 바르는 사수의 손길을 보고 있자니 밀전병 부치면 참 잘 부칠 것 같단 말이지. 누가 보면 행위예술 하는 줄? 아, 행위기술인가?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깡패가 따로 있고 방패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상황에 따라서 깡패도 되었다가 방패도 되었다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깡패였던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세상 둘도 없는 방패이기도 한 것처럼, 때로는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방패가 되려면 자신 안에서 세상 무서운 깡패를 끄집어내게 되는 것이 삶이라는 것도 지금 이 생생한 현장에서 깨부수고 공구리치고 스크래치 입어가며 깨우쳤다. 깡패도 나고, 방패도 나다. 깡패와 방패 그 사이만큼 멀고도 먼 거리를 다 품은 존재가 한 인간이더란 말이다. 어쩌면 축복이라는 건 내 안에 깡패를 끄집어낼 상황을 조금이라도 덜 만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겪어보니깐 그게 진짜 복이더라. 비록 가끔 입으로는 거친 욕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안에 소녀는 지키고 살고 있어서 참 다행이다. 사수라는 방패를 만난 덕분일까, 아니면 조수의 나약하면서도 강인한 의지인가?
아마도 내가 사수를 존경하는 까닭은, 사수가 깡깡방방인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양아치나 깡패 같은 인간에게는 한빙지옥 송제대왕도 혀를 내두를 만큼 세상 차갑고 날카로운 조폭 행동대장 같은 면모를 드러내다가, 방패가 필요한 사람 앞에서는 캡틴 아메리카에 나오는 비브라늄 방패 저리 가라 할 만큼 무적최강방패가 되어준다. 그러다가 동물이나 아이를 만나면 순식간에 방패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돌변한다.
그리고 조수는, 그 변화무쌍한 방패가 돌아와 쉬는 집이다. 나는 방패집이다. 음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