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의 쐐기
우리가 흔히 쓰는 기분(氣分)이라는 단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운을 나눈다' 또는 '기운이 나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기분이 좋다'는 말은, 기운이 잘 나뉘고 서로 주고받고 흘러서 골고루 잘 섞기고 원활하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기분이 좋다는 건 소통이 잘 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왔는데 기분이 좋다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과 막힘없이 잘 통했다는 뜻이다. 그와 반대되는 상황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기가 막힐 노릇이다!'라고 하지 않던가. 이미 익숙하게 쓰고 있는 말을 들여다보면 참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분위기(雰圍氣)도 마찬가지다. 눈처럼 흩날려 주위를 에워싸는 기운이다. 기운은 그렇게 흐르고 채워져 나뉘고 공유된다. 양자역학은 모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형의 에너지는 생생하게 살아서 끝없이 변화하고 흘러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때로는 압도하기까지 한다. 눈에서 꿀 떨어진다는 사랑도 한랭건조한 시베리아 기단을 불러오는 갑분싸도 우리는 분명 빛의 속도로 보고 느끼고 있지 않은가? 그 초능력이 가능한 까닭은 우리가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마음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그런 것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품은 대로 뿜뿜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가장 먼저 자신과 주변 사람들,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요즘은 특히 더 기분 좋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처럼 기분 좋은 자리나 만남을 하고 오면 꿈이라도 꾼 듯 잠시 어디 저 멀리 판타지 세상에 다녀온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까지 한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사수와 조수 역시 작업을 마치고 오면서 '참 기분 좋다!'라고 절로 느껴질 때가 간혹 있기는 있다. 물리적인 작업 시간이나 난이도, 금액의 크고 작음과는 별개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충분히 기분이 상해서 며칠을 가기도 하고, 온종일 고단하게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귀갓길에 여전히 즐거움이 남아있을 때도 있고, 받을 돈을 받았는데도 돌아서면서 내내 찝찝하거나 차갑고 단호하게 욕을 읊조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기분이라는 건 그만큼 참으로 복합적이면서도 민감하고 미묘한 에너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고 보면 기분은 무방부제인지 무방비인지, 순식간에 참 잘도 상한다.
그 기분이라는 것이 한 자리에 가장 오래 고여있는 곳이 바로 집이다. 그 집에는 어쩔 수 없이 그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의 기운과 기분과 마음이 고스란히 닿고 쌓이고 고이고 배고 묻고 물들어 소위 말해 '그 집 분위기'가 된다. 그 집이 곧 그 사람이 되고, 그 사람이 그 집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겉보기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또한 별개다. 그 집에 들어서기 전부터 견적을 주고받는 전화통화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다. 미처 알아차리거나 설명하지 못하는 틈에도 우리는 뭔가를 이미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선입견은 경계해야 하지만, 직감은 단련시켜 나갈수록 필시 생존에 도움이 된다. 가장 먼저는 솔직하게 열린 마음과 존중, 예의가 담겨 있다. 그리고 집안에 들어설 때 사람을 반겨주는 눈빛과 인사,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보는 동등한 시선에 호의와 선의, 배려까지 담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사소하고 미묘해서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절로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방문 하나 고치러 간 집에서 카페도 아닌데, 장갑 낀 손으로 음료를 마시다가 그대로 가져갈 수 있게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서 빨대까지 꽂아서 그 빨대 끝 비닐은 손대지 않고 건네주시는 아내분의 센스랄까. 잠시라도 더울까 에어컨에 선풍기에 얼음 가득 탄산수 리필까지 해주신다. 하루아침에 그 잠깐 사이에 발휘되는 센스는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조수는 그 센스를 바로 보고 배워서 그에 걸맞는 센스로 호응하고 싶어진다. 혹여라도 원목 가구 위에 물자국을 남길까 장갑 한 쪽을 벗어 살포시 밑에 깔고 컵을 내려놓는다. 서로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스스로 그런 마음가짐을 먹고 행하는 것이다. 그 마음가짐이 태도가 되고 기분이 되어 그 자리 그 공간에 머물고 배어드는 것이다. 부창부수라고, 남편분은 조수가 작업 후 잔해를 쓸어 담아 놓은 쓰레받기를 얼른 손수 비워주신다. 뭐라도 돕겠다고 나서서 지저분한 쓰레기를 들고 움직이시는 그 친숙하고 품위 있는 뒷모습을 만나서 기분이 좋았나 보다.
성실한 퇴직과 자녀들의 독립까지 무사히 이루고 경제적 안정과 심리적 안녕을 두루 갖춘 중년 부부에게서 내비치는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분위기는 참으로 건강한 맛이다. 그 한결같은 마음가짐에 시간과 세월이 더해져 그런 사람이 되고, 그런 집이 되는 것이겠지. 그 안에는 어른다운 어른의 너그러움과 넉넉함도 함께 깃들어 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서 그 집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 무언가를 받고 와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때로는 불쾌하기도 한 것이다. 당신이 마음먹은 대로 그 순간 우리는 받는다. 그것이 선의인지 악의인지, 연대인지 적대인지, 우정인지 동정인지 이미 당신도 알고 나도 알고 있다. 그러나 또한, 보고 느끼고 알아차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선을 지키는 배려이자 프로의 태도다. 대부분은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아서' 그 드러내지 않음에 에너지를 많이 쓴다. 그런데 정작 늘 기분이 안 좋고 힘들다고 하는 사람은 주로 다 드러내는 쪽이다. 흔히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들을 만나고 오면 '기가 빨리고 온다'고도 하고.
발가벗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감정을 있는대로 부리고 휘두르듯 상대방을 부리고 휘두르는 사람이 될지, 아니면 마지막 젖 먹던 힘을 다해 자신의 감정을 잘 갈무리해서 끝까지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라는 옷깃을 붙들고 여미는 사람이 될지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선택이다. 아무래도 후자가 좀 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싶다.
누구네 집 바닥이 누구네 집의 천장이 된다. 우리는 그 바닥과 천장 사이에 산다. 누군가는 쉽게 말하는 보통이나 평범의 바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마저도 가닿기 어려운 높고 높은 천장이다. 자신이 가진 사다리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벽이다. 너도 나도 다들 힘들다고 말하는데 그 힘듦의 기준점과 간극 또한 천차만별이며,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높이의 사다리를 딛고 서서 내려다보거나 올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한 집 한 집 한 칸 한 칸 발품 손품 팔며 뼈저리게 깨닫는다. 그 높고 높은 사다리가 수평으로 놓이면 우리 사이에 다리가 될 수도 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그 밑바닥 아래도 들여다보고 저 천장 속속들이까지도 뜯어봐서인지 그 무엇도 섣불리 바랄 것이 못 된다는 것도, 내려다보는 사람은 계속 내려다보고 싶어한다는 것도, 성급히 가까워지려 하기보다는 이대로 적절히 '존중'이라는 이름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더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지혜임을 몸과 마음에 새긴다.
몸도 많이 썼지만, 그만큼 마음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조수는 생존의 위협을 넘어 말 그대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8월이었다. 그래서 쉼을 가지려고, 좋은 기분을 회복하고 유지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돈도 쓰고 마음도 썼다. 좋아하는 것에, 좋아하는 곳에. 일을 피할 수도 없고 바라다 보이는 저 높은 곳으로 올라설 수도 없다면, 지금 내가 딛고 서 있는 이곳에서 취향의 쐐기를 더 단단히 박기로 했다. 그것이 나를 지키기 위한 능동의 선택이자 내가 내 힘으로 쥘 수 있는 긍정의 조개껍데기이다.
섣부른 욕심과 기대는 흘려보내고 아는 것도 모르는 채로 두고, 부디 무사히 늙어 살아있는 사람 맛이 나는 기분 좋은 중년이 되고 싶다.
그런데 그 와중에 과연 사수는?
벽에 부딪쳤다면 스스로 문을 만들어서라도 길을 내고, 그곳이 낭떠러지라면 손수 다리를 만들어서라도 건너갈 태세다. 그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료와 오직 두 손만으로. 그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고독한 그의 싸움은 끝날 줄을 모른다. 잠시 휴전이라면 그 틈에 도끼날이라도 갈겠단다. 조수의 최소한의 판타지는 사수의 피땀눈물 값 덕분에 지켜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