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도 싸부를 탈 수 있어!
25년 전 내 친구 동생이 나한테 했던 말이다.
당시 한국은 IMF 사태가 생기기 바로 전이었고, 통제되지 않는 자유에 대한
갈증으로 사회적으로는 묘하게 약간의 흥분 상태가 돼있었고, 대학을 가는 사람보다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하거나 사업을 하면 누구나 쉽게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만큼
사회 곳곳에 빈 틈이 많은 시대였다.
뉴스에는 갈 곳 없는 동네 노인들을 모아 젊은 애들이 재롱을 피우고-그때 젊은 애들이 지금은 50대가 넘었겠다만- 물건을 강매하는 영업 방식에 대한 문제점과 노인들이 오죽하면 그런 곳에 가서 함께 손뼉 치고 노래 부르는 재미에 강매라는 걸 알면서도 프라이팬 세트를 사 올까 하는 두 의견이 같이 나오던 때였고, 다단계 영업이라는 생소했던 마케팅이 생기면서 동네에 아는 사람 누구누구도 앞다투어 다단계에 뛰어들던 때였다.
내 친구 W의 동생 H가 있다.
어릴 적부터 봐왔지만 친구 W와 친구 동생 H의 성격은 참 많이 달랐다.
친구 W는 조용+어색+답답했던 반면에 친구 동생 H는 학업은 늘 뒷자리를 맴돌면서도 말도
유창하고 거침없이 농담도 잘해서 동생이지만 참 재미있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이 글을 읽는 내 친구라면 H가 누구이고 W가 누구인지 짐작하고도 남으리라 생각한다.
부디 W한테 내 브런치 글 링크를 보내지는 말아주길 바란다.)
평소 친구 W와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고 있었다.
당시에는 휴대폰이 없던 때라서 집전화로 난데없이 W의 동생, H한테 전화가 왔다.
H : '형! 잘 지내세요?'
나 : '어 그래! 네가 어쩐 일이냐'
H : '요즘 바쁘세요?'
나 : '응 뭐 그저 그렇지. 넌 졸업했지?'
H : '네 졸업했죠'
'근데 형 암OO라는 제품 써보셨어요?'
나 : '응? 그게 뭐냐'
https://www.collinsdictionary.com
H는 피곤한 내게 잔여물이 남지 않는 치약과 비누, 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았다.
눈 좀 붙이고 쉬고 싶지만 H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겠지라는 생각에 꾹 참고 맞장구치며 들어줬다.
이게 화근이었다.
다 듣고 아니면 바로 아니다고 말을 즉시 했어야 하는데
좋은 게 좋다고 학습당해온 내 입은 뇌와는 반대되는 맞장구를 신나게 치고 있었다.
H: '형도 싸부(SAAB) 차 타고 싶지 않으세요? 탈 수 있어요!'
이 말에 졸리던 눈이 떠졌다.
설마 이런 멘트까지 나한테 할 줄은 몰랐다.
그렇지만 내 입에서는
나: '응? 그래?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어쩌면 H의 더 치명적인 실수를 유도하는 멘트였는지도 모른다.)
한껏 텐션-업이 된 H는
H: '제 밑으로 들어와서 암OO 회원들을 모집하세요'
라고 말해버렸고
나는 H에게
'내가 왜 그런 일을 좋아하지 않는지',
'난 그런 일과 맞지 않는다느니',
'H를 응원한다'와
같은 맘에도 없는 구질구질한 멘트를 친구 형이라는 이유로 돌려했다.
지금 같으면 즉시 프로필, 카톡 모두 차단 각 이었지만 그땐 그랬다.
며칠 동안 도대체 H가 나를 뭘로 보고 저런 말을 하나 하루에도 여러 번 화가 났다.
당시 나는 전공 공부를 하면서 열정을 불태우던 중이라
전문대를 졸업하고 빠르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 동생 H의 영업 타깃이 됐다는 게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내 부드러운(?) 거절에 H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고 이 일에 대해서는 친구 W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내가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가면서 친구 W와도 소원해져 연락이 끊어졌다.
몇십 년 후에 친구 W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동생 H 소식을 물었다.
H는 수강생 버스가 6대나 되던 영어학원을 운영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지금은 OO지역의 대학 행정이사로 갔다고 하는데
동생이지만 어떤 사유로 지금은 연을 끊고 산다고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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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다.
지금 당신이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돌에 새긴 글자처럼
그 사람에겐 지워지지 않는 말이 될 수 있다.
H의 전화 사건 이후로
난 단호하게 영업을 싫어한다고 말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영업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영업도 고유한 전문 분야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나.는.싫.다.
필요한 상품이 있으면 직접 찾아서 고른다.
누군가에게 권유받는 건 알레르기가 생길 정도로 싫다.
(또 실제로 권유받는 건 그렇게 좋은 상품이 아닐 확률이 높다.)
H의 전화가 계기가 되지는 않았어도 연구개발(R&D) 조직들의 리더인 내가
고객들의 요청사항(Needs)을 제품이나 상품에 담아내는 연구를 위해
만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영업팀, 마케팅팀 조직의 모습들은 기업 조직의 크기 유무를 떠나서
과학적이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고, 그들은 근사하게 '숫자'로 말하고 싶어 하지만
수직선 안에 들어오는 실수에서 벗어난 허수(imaginary number)를 구별하지 못하는
초보자들 뿐이었다.
영업이든 마케팅이든 포장지를 영문지로 바꾼 것일 뿐
정신 안 차리면 호구가 되는 세상
정신 차려도 보이스 피싱당하는 세상
깔끔하고 깨끗하게 재밌게 일하고 살면 안 될까?
어디서 약을 팔아
아 갈증 난다.
-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