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개수배, 문OO 한문선생

75세 이상으로 추정

by 이정욱 교수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손을 잡고 들어선 유도장은

30여 명의 사람들이 녹색으로 된 일본식 다다미 바닥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맨 발이 다다미 바닥을 밟으면 나는 둔탁한 소리,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지르는 헛 기합 소리,

다다미에 떨어지며 낙법을 하는 소리들이 커다란 유도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에너지 넘치는 젊은 사람들의 땀 냄새, 발 냄새, 입 냄새가 섞인 그곳은 내겐 좋은 첫인상은 아니었다.


단 하나를 빼고.

찬 바람이 불면 두꺼운 겨울 이불을 꺼내서 처음 덮었을 때 나는 냄새와 같은 냄새.

그때 콧 속으로 들어오는 묵힌 이불의 뽀송 텁텁한 냄새 같은 새 유도복의 냄새.


아버지가 사서 들고 오신 유도복 냄새에 끌려 유도장을 다니겠다고 말했다.


https://img.sbs.co.kr

도복은 상의는 위브, 하의는 코튼(면)으로 만든다.

쌀알 무늬 직조를 한 번 하면 싱글 위브, 두 번하면 더블 위브 방식이라고 한다.

펄 위브, 립스탑(RipStop;찢김 방지) 재질의 유도복은 처음 사면 뻣뻣하고 거칠지만 몇 번 빨면

부드러워진다. 이 재질의 유도복은 중량 대비 내구성이 좋아서 당겨도 잘 찢어지지 않는다.


1980년대 초반에는 운동 이외에는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유도장을 다니는 사람들은 다들 죽기 살기로 운동을 했다.

건강을 챙기고 여러 응용 동작을 배워서 실력이 늘며

동료와 함께 즐기는 요즘의 생활 체육 개념이 아니었다.


몸이 피곤하면 정신력으로 버텨야만 하고

손가락이 접질리거나 발목이 삐끗해서 부어올라도

모두가 '그건 정신력 부족'이라고 몰아붙이기에

중학교 1학년짜리의 웬만한 상처와 부상은 말도 못 꺼내는 그런 암울한 군사정권의

딱딱한 사회적 분위기가 유도장에도 가득했다.


죽기 살기의 운동 문화는 아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첫 올림픽을 앞둔

스포츠로 관심을 돌려 쿠데타 군사 정권을 이어나가기 위한 계산된 전략이었을 수도

있었을 거라 생각 든다.


또래에 비해서 골격이 좋았던 나는 운동에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고

눈여겨보신 유도관장님의 제안으로 유도부가 있는 중학교로 가게 되었다.

말만 유도부였을 뿐 창문도 없는 1층짜리 낡은 건물 안에 낡은 다다미판과

낡고 오래된 자동차 타이어,

검은색 자전거 튜브가 운동 기구의 전부였다.


유도는 승마나 펜싱, 사격처럼 고가의 장비 값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태권도나 레슬링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하는 운동이다.

심지어 맨 발로 하기 때문에 신발도 필요가 없다.

잘 찢어지지 않는 도복은 한 번 사면 낡고 헤질 때까지 쓸 수 있었다.


그렇게 들어간 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 이름은 문OO 남자 선생으로 한문을 가르쳤었다.

날카로운 인상에 검도 유단자라고 했다.


그는 숙제를 안 해왔다며, 준비물을 안 가져왔다며,

머리가 길다며 갖가지 사유를 들이밀며

유약을 칠해 반질반질한 기다란 몽둥이로 학생들을 잡아대고 있었다.


우리에겐 중학교는 배우는 곳이 아닌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하루라도 안 두들겨 맞고 끝나면 다행이다는 생각으로 다녔다.

때리는 사람은 선생만은 아니었다.


대물림되는 폭력의 순환 고리에서 선생이 맨 위였고

그 아래엔 중학교 3학년, 중학교 2학년으로 이어지는

생태계에서 중학교 1학년은 가장 약한 약자이자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은 갑작스러운 두발 단속을 실행하였고,

이발기를 가지고 나를 포함한 몇 명의 머리 한쪽을 밀었다.

그 상태로 집에 돌아온 나는 아버지의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했고 불만을 토로했다.


다음 날, 문OO 선생이 씩씩거리며 들어오더니

어제 머리 잘린 놈들 중에서
아버지가 학교로 전화한 사람 손들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모두 눈감어'

'다시 말한다. 어제 머리 잘린 놈들 중에서 아버지가 학교로 전화한 사람 손들어!'

실 눈을 뜨고 봤지만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면! 부모님이 한마디라도 싫은 소리 한 사람 손들어!'

몇 명이 손을 들었다.

나도 슬그머니 같이 손을 들었다.


그게 실수였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때 전화해서 한바탕

난리를 치신 분이 아버지였을 거라고 나는 지금도 생각한다.


그때부터 나는
문OO의 먹잇감이었다.


운동부의 스케줄상 오전에 수업을 듣고

도시락을 먹고 난 오후에 가방은 교실에 둔 채로 운동을 하러 갔기 때문에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카톡이 없던 그 시절

숙제, 과제, 준비물, 행사일정이 나와도 나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설령 그런 것들을 알아도 운동 후 지친 몸으로 할 수 있는 방법 또한 내겐 없었다.


문OO는 한문선생이자 담임선생이었기에 모든 걸 다 알면서도

내 사정을 봐주고자 하지도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고

내 상황에 대해 부모님과 상의하지도 않았고

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은 당연하게 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해온 것은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본인의 감정을 날려 보내고

다른 애들에게는 공포심을 주는 것뿐이었다.


모든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 나는 칠판 옆에서

안락의자를 하고 팔을 드는 벌을 받아야 했고,

유일하게 숙제를 해오지 못해서 늘 불려 나가 엉덩이와 허벅지 사이가

검 초록색이 되도록 문OO선생이 휘두르는 몽둥이를 받아냈다.

그 상태에서도 매주 일요일에는 목욕탕에 갔지만 핏줄 터진 엉덩이를 보고


'누가 이렇게 했냐?'라고
묻던 어른도 없었다.


그렇게 난 중학교 1학년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버티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고 나서는 좋은 일들만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운동부 소속의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잠을 자다가 맞았던 통증 때문에 끙끙대다 생각했다.


이러다가 내가 죽겠다.


살 수 있는 방법은 운동을 그만두고 공부하는 것뿐이었다.

부모님께 '운동을 그만두겠다'라고 말씀드렸다.

동시에 '과외선생님을 붙여달라'고도 요청했다.

다행히 두 요청 모두 받아주셨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시행한 수학시험에서

난 '만점'을 받았다.


그 순간 진정한 노력의 기쁨과 잔인했던 선생의 폭력으로부터의 해방감,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기대했다.




세월이 무척 많이 지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중학교 1학년을 폭력으로 짓밟았던

문OO선생은 교감선생이 되어 은퇴했다고 전해지고

습관적으로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폭력을 행사하던 유도부 선배 중 몇 명은

개사료로 몸을 불리는 OOO파 폭력 조직에 들어가고 뭐 그렇게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를

몇 다리 건너서 들었다.


다행스러웠다.

그때 빠져나오지 못했으면 내 경력도, 지금의 나도, 지금의 가족도 없었으리라.


하지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잔인한 폭력을 휘둘렀던 문OO 한문선생을 찾아내서 사과를 듣고 싶다.

마음 같아서는 소송을 걸고 싶지만 교원 징계시효가 40년이 넘은 데다가 폭행의 증거 또한

모으기가 어렵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선생 OO한테 아깝고 귀중한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을 만큼 미련조차 없기 때문이다.


OOOO도 OO시
H중학교 문OO 한문선생(H고등학교 교감)



내 마음속에서 공개 수배한다.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며 동시대를 나왔던 사람들은 많은 공감을 했다.

그 선생들은 지금쯤 교원 연금을 타 먹으면서 편하게 살고 있을까?

학교 폭력 이야기, 선생 폭력 이야기에 자신은 진정한 스승이었던 것처럼?


요즘 학생들이 교권을 무시해서 큰일 났다는 뉴스가 가끔 나온다.

학생들을 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댓글도 보인다.

난 절대 반대다.


모든 건 어른들의 잘못이다.

애들이 잘못 큰 것은 부모의 잘못이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나중에 후손들, 후배들, 후학들에게

'돈을 많이 물려준 분'이라는 기억보다는

'존경할만한 분'이었다는 기억이 되시길 바라본다.


보호막이 되고자 애쓰셨던 아버지가 그리운

밤이다.




-안산술공방 이정욱 작가

-공방 주소: http://kwine911.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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