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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원 Jul 09. 2023

꼴찌라도 괜찮아

초등학교 운동회

  

운동회날 달리기가 없으면 좋겠다. 달리기를 못 하기도 했지만 출발 신호인 화약총이 더 큰 이유였다. 출발선에 서면 화약총을 쏘기까지 가슴이 두근두근. “땅” 소리에 잠시 멈칫하고 뛰어나간다. 출발부터 늦었다. 그런 내가 좀 바보 같았다.     


학교 정문 앞에 장사꾼들은 쫀드기, 아폴로, 라면땅 등을 펼치고 앉았다. 어린 학생들은 하얀색 티셔츠와 하얀색 스타킹에 검은색 블루머를 입고 가까이 사는 아이들은 신발을 신지 않고 덧신만 신고 등교했다. 학생들이 운동회 시작 시간에 맞춰 먼저 등교하면 부모님들은 조부모님까지 모시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오신다. 운동회날 점심시간은 학년과 반에 관계없이 자리를 잡는다. 같은 동네 또는 오랜만에 반가운 친인척들을 만나 서로 가지고 온 도시락을 나누어 먹는다. 운동회날이 어른들에게는 농사와 바닷일로 바빠 만나지 못했던 친구와 인척들의 안부를 묻는 유용한 시간이기도 했다. 운동회는 공부가 아닌 각자의 특기를 보여줄 수 있는 날이기에 아이들은 신났고 부모님의 너그러워진 태도에 더욱 들뜨기도 했다.


나처럼 달리기를 못하는 아이들을 위해서인지 100미터 달리기는 중간에 게임을 넣어 달리기 속도가 아니어도 재미있게 참여할 다양한 방법들이 있었다. 저학년 때는 100미터 달리기 트랙 중간쯤에 바닥에 뒤집힌 카드를 보고 사람을 찾거나 사물을 찾아 달려야 했다. 카드를 뒤집고 있으면 어디에선가 엄마가 나타나 손목을 잡아끌고 카드에 써진 대로 남자의 운동화나 여자의 고무신을 들려주셨다. 물건을 들고 재빨리 뛰기 시작할 때 내 앞에 아무도 없어 이번에는 일등을 할 수 있으려나 하는 생각으로 힘껏 뛰어본다. 남은 코스를 뛰는 동안 어느새 내 눈앞에는 다른 친구들이 하나, 둘 끼어들고 있었다.


고학년이 되었을 때 100미터 달리기는 중간에 멈춰 바늘에 실을 꿰어 들고 달리는 경기였다. 그 경기는 실을 꿰는 연습을 하면 나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았다. 운동회를 앞두고 집에서 엄마가 가르쳐주신 대로 무명실을 바늘귀에 꿰는 연습을 했다. 실에 침을 묻히고 앞니로 실 끝을 끊은 다음 실 끝을 입술로 납작하게 해서 바늘구멍에 넣으면 된다. 처음에는 실을 끊는 것이 어려웠지만 곧 실 끊기 선수가 되었다. 양장점 동생에게 놀러 가서도 다양한 종류의 실로 중간 크기의 바늘에 실 꿰는 연습을 했다.  

    



드디어 운동회날, 100미터 달리기는 오전 마지막 시간에 있었다. 이번에는 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처음으로 달리기 경주가 기대되었다. 매번 마지막에 들어오는 창피함과 참가상으로 ‘공책 한 권만 받던 것을 이번에는 면할 수 있겠지’ 하는 생각도 있었다. 이번에는 출발 신호가 화약총이라도 상관없었다. ‘좀 늦으면 어때!’ 어차피 중간에 모두 서서 실을 꿰어야 하는데...     


“땅” 소리와 함께 나는 또 잠깐 얼음이 되었다가 뛰었다. 중간에 멈춰서 바늘과 실을 들고 연습했던 대로 시도했다. 그런데 연습했을 때와 달리 실이 힘이 없었다. 입술로 실 끝을 납작하게 하면 내 손끝의 실과 끝이 힘 있게 곧게 있어야 바늘구멍에 실이 꿰어지는데 실이 자꾸 중간에 고개를 꺾는다. 실 끝을 앞니로 뭉텅 잘라내고 다시 했으면 좋았을 것을. 그때는 자꾸 침만 묻혀 실을 꿰려고 하니 물먹은 실이 무거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나에게는 처음으로 꼴찌를 면할 수 있는 달리기였는데 나는 그때도 꼴찌를 했다. 아들과 딸이 학교를 다니는 동안 늘 계주 선수로 뛰는 것을 보고 날 닮지 않아 참 다행이다 생각되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에~~ 헤야~~' 방송이 나오면 학생들이 일제히 운동장으로 나가 ‘양산도’를 출 준비를 한다. 그 당시에 2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면 모두 운동장으로 나가 '양산도'와 '포크댄스'를 배웠다. 그 시간에 배운 춤을 운동회 프로그램에 넣은 것이다. 남녀가 함께 손을 잡고 춤을 추기 때문에 학생들은 수줍어하며 이 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땀이 배인 손은 싫었지만 음악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이 시간들이 즐거웠다. 


고학년 여학생들은 운동회날을 위해 학년별로 ‘부채춤’과 ‘강강술래’를 배웠다. '양산도'와 '포크댄스'는 운동회 복장으로 춤을 추었다. '부채춤'은 한복과 부채, 족두리를 '강강술래'는 한복과 검은 실뭉치로 머리를 땋은 가짜 머리 등을 준비해야 했다. 넓은 운동장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운동회 때 부모님이 보시기에 가장 예쁘고 멋진 장면이 아닐까 한다. 나는 운동회에서 이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춤을 시작하는 데는 화약총 신호가 없었다. 속도와 관계도 없고 암기한 동작만 음악에 맞춰 잘 추면 되었다. 고운 한복이며 예쁜 구슬 달린 족두리, 끝에 깃털이 달린 부채까지. 평소에 눈에 띄지 않던 친구들이 두드러지게 예뻐 보이는 새로운 발견의 날이기도 했다. 마지막 하이라이트까지 실수 없이 마무리하고 받는 부모님들의 박수는 그날의 창피했던 일들을 말끔히 잊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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