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채세척기에 핸드폰 돌려보셨나요?
저녁에 퇴근하고 온 와이프가 부쩍 바빠 보인다. 물론 원래도 그랬다. 일을 하면서도 3D펜, 영상편집, 블로그 운영 등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활동을 동시에 하고 있는 그녀다. 그런데 이번은 좀 달라 보인다. 전이 목표가 드러나는 구체적인 행위를 하느라 바빴다면 이번에는 모호하다. 판단을 멈추고 HJ를 관찰한다.
진지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손에 쥐고 믹서기처럼 돌리거나 팔을 쉬지 않고 흔든다. 팔뚝살을 빼려고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런 것 치고는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결국 추측하기를 포기하고 이유를 물었다. 다음과 같은 답변이 돌아온다.
오천걸음 채워야 돼
왜 걷지 않고 팔을 흔드는가 싶었는데 핸드폰을 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도 걸음 수가 채워진단다. 그리고 모니모란 앱에서 오천 걸음을 걸으면 돈을 준단다. 얼마를 주냐고 물어봤더니 몇 십원을 이야기한다. 고작 몇 십원 때문에 퇴근하고 힘든 몸을 억지로 움직이는 그녀를 보며 김성근 감독을 떠올렸다.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은 돈 받으면 프로라는 말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아마 거액의 연봉을 받고도 제대로 실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선수들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정확히 집은 말이어서 그랬을 거다.
이 말을 들을 땐 프로란 의미를 스포츠에서만 한정해서 생각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다. 우리 집에도 프로가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프로는 얼마를 받든 최선을 다한다. 맹렬하게 팔을 흔드는 그녀처럼. 이런 프로에 대한 짧은 고찰 후에 나는 다시금 적당히 받고 여유를 즐기는 아마추어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내가 이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면 그런 마인드론 글러먹었다고 말하는 그녀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자동으로 재생된다. 그녀와 십 년 넘는 세월을 함께하며 터득한 비기다. 이제는 굳이 대화를 하지 않아도 상상으로 대화를 구현해 낼 수 있다. 의사 선생님들이 수술 전에 미리 머릿속으로 수술 과정을 그려보는 마인드 컨트롤이 이런 걸까 싶다.
이 날 이후 저녁만 되면 HJ 표정을 확인한다. 표정을 보면 대략 미션을 완수했는지 알 수 있다. 얼굴이 밝고 몸동작이 경쾌하면 채웠을 거고 그게 아니라면 아직 일이천 보는 남았을 확률이 높다. 거실에 있는 그녀를 잽싸게 스캔하고 빠른 판단 후에 방에서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는데 거실에서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프로가 된 그녀가 바람의 상처라도 쓰는 것일까. 방문을 열어 거실을 보니 중간에서 그녀가 실내화 가방을 돌리고 있다. 내가 들었던 것은 실내화 주머니가 붕붕 돌아가면서 내는 소리였던 것이다. 순간 옛날 초등학교 때 친구랑 실내화 주머니를 이용해 싸웠던 게 생각난다. 삼십이 넘은 어느 날 저녁 와이프는 갑작스럽게 동심을 찾은 걸까.
비현실적인 장면에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나를 깨웠다. “이렇게 돌려 걸음 수가 입력 돼”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고 할 말을 잃었다. 웃는 그녀는 논리를 마비시킨다. 이래서 남자들이 예쁘게 웃는 여자를 이상형으로 꼽는가 보다. 이건 걷기를 권장하는 모니모의 취지와는 어긋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그럼에도 팔뚝에 근육이 잡히는 걸로 봐서는 건 제법 운동이 되는 것 같다.
본질적으로 건강해지는 게 중요하지라며 이상하게 납득하고야 만다.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채 이상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며 그녀는 추궁한다. 나는 바로 앞에 있는 냉장고에 부딪쳐 이백만 원이 수리비로 나왔다는 상상을 했다고 실토한다. 몇 십원을 위해 몇 십배가 넘는 거금을 들어가는 상황엔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궁금했다.
현실로 돌아와 힘들어하는 그녀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더했다간 실내화 주머니가 달라가 세간 살림을 부숴버릴 것 같았다. 야채 세척기에 돌려보라는 것이다. 느닷없이 신발주머니를 돌리는 그녀를 보고 특이하다 생각했지만 이런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나도 정상은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맞는 사람끼리 만났다. 옛날이었으면 라이트 형제 뺨치는 좋은 파트너가 됐을지도 모른다.
핸드폰을 야채세척기에 넣고 줄을 당겨본다. 세척기 안에서 핸드폰과 틀이 부딪히는 소리가 맹렬하게 들린다. 곧 핸드폰이 깨지거나 야채세척기가 부서질 것 같다는 기분에 불안해진다. 이 불안함을 못 이기고 버튼을 눌러 세척기를 멈추고 틀 안에 있는 핸드폰을 꺼내서 확인했다. 걸음 숫자가 올라가긴 하는데 돌아가는 속도만큼 나오진 않는다.
그녀가 다시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기 시작한다. HJ의 장점 중 하나는 큰 실망이 없다는 것이다. 넘어진 다음에 털지도 않고 일어나 다음 일을 한다. 큰 장점이다. 나는 내 방문을 조용하게 닫고 다시 브런치를 쓰기 시작한다. 문득 좋은 글감이 생겼음을 깨닫는다. 제목은 “우리 집엔 이누야샤가 산다”가 좋겠다.
다음 날 HJ가 어깨를 손으로 부여잡고 아프다며 울상이다. 그 모습을 보고 또 배를 잡고 서로 웃는다. 그녀는 자기가 재미를 줬다며 의기양양하다. HJ는 연애 때부터 자기가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준다고 늘 주장 하곤 한다. 하지만 웃음코드가 조금 다른 나는 이 점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인정해야겠구나 싶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성인이 집안에서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는 것을 볼 일도 야채세척기에 핸드폰을 넣을 일은 없었을 거다. 난 좀 더 정상적이고 지루한 인간이 되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