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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연재 Apr 30. 2023

미지의 교차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

사실 이번 세계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멕시코도 러시아도 아닌 중앙아시아였다. 나는 몽골 여행 이후로 중앙아시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갖고 있었다. 실크로드와 사막, 말과 초원, 그리고 낙타. 가깝지만 미지의 세계인 그곳을 꼭 탐험해 보리라 벼르고 있었다.


어쩌면 중앙아시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중앙아시아를 사랑하게 될 거란 것을.






카자흐스탄


이집트 카이로에서 러시아 모스크바를 거쳐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향했다. 이때 먹은 기내식은 찐 생선과 당근, 매쉬드 포테이토였는데, 간도 밍밍하고 매우 맛이 없었지만 배도 고프고 오랜만에 먹는 생선이라 반갑기도 해서 꾸역꾸역 먹었다. 이땐 몰랐다, 이 조그만 기내식이 나에게 어떤 후폭풍을 가져올지.


알마티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푼 순간, 기내식의 엄청난 후폭풍이 찾아왔다. 그 후로 나는 2박 3일 동안 숙소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방과 화장실만을 왔다 갔다 해야 했다. 그토록 고대했던 중앙아시아 여행의 시작이었다.


알마티에서 가장 큰 기차역. 시베리아 횡단하던 때가 생각났다. 이곳을 통해 러시아도 가고, 우즈베키스탄도 갈 수 있다.



내가 먼저 사장님께 워크 어웨이(work away, 숙소의 일손을 돕고 방을 제공받는 형식)를 제안함으로써 인연을 맺게 된 한우리 민박 사장님께서는 일손이 필요 없어서 워크 어웨이는 거절하셨지만, 대신 아주 저렴한 가격에 좋은 방에서 묵게 해 주신 고마운 분이었다. 사장님은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신지 20년 정도 되셨으며 틈만 나면 옆나라인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스탄, 타지키스탄 등으로 로드트립을 다닌다고 하셨다.


또한 한우리 민박은 고려인인 리따 아주머니께서 해주시는 한식 밥상이 일품이었는데, 매일 아침마다 제육볶음, 김치찌개, 미역국 등 세계여행 중 일부러 한식당을 찾아가야만 먹을 수 있던 그리운 한식들을 맛있게 해 주셨다. 비록 첫 사흘은 배탈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해서 너무 아쉽지만.


배탈이 점차 나아질 때쯤, 기운을 차려 알마티 시내를 구경했다. 알록달록 젠코브 성당부터 이슬람 모스크, 그리고 시장까지, 특별할 것 없지만 모든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알마티였다. 알마티 시내는 트램도 다니고 버스도 다닌다. 카자흐스탄이 구소련국이라 그런지, 어디를 가도 깨끗하고 매우 잘 정돈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러시아와 몽골의 장점을 섞어둔 느낌이랄까.



깔끔하게 정돈된 아르바트 거리 역시 알마티의 힐링 명소였다. 곳곳에 잔잔한 음악이 나오고 산뜻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우거진 가로수는 나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배탈을 며칠씩이나 앓는 바람에 알마티 근교를 충분히 둘러보지는 못한 채 키르기즈스탄으로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카자흐스탄에 다시 올 명분이 생긴 거라고 애써 위안하며, 카자흐스탄을 떠나 키르기즈스탄으로 향해본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키르기즈스탄 비슈케크까지는 약 8시간이 소요된다. 가는 길에 펼쳐진 너른 고원을 바라보니, '아 이것이 중앙아시아의 대평원이구나' 싶었다. 몽골 여행 이후로 양고기 공포증이 생긴 나는, 최대한 양이 안 들어갔을 법한 메뉴를 시켰는데, 결과는 성공이었다. 무난한 식사를 마친 뒤, 카자흐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걸어서 국경을 넘는다.

카자흐스탄에서 키르기스스탄으로 넘어갈 때,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카자흐스탄 국기가 잘 가라고, 꼭 다시 오라고 손을 흔들어 준다.


이렇게 생각보다 허무하게, 짧게 나는 6월의 카자흐스탄과 이별하게 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반년 뒤, 난 정말로 다시 카자흐스탄에 방문하게 된다.)


12월에 다시 방문한 카자흐스탄. 여전히 반갑게 나를 맞이해 준다. 여전히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르기즈스탄


키르기즈스탄은 어떤 나라일지, 카자흐스탄과는 분위기가 어떻게 다를지, 중앙아시아의 스위스라는 말이 사실일지, 내가 중앙아시아에 온 이유인 '알라쿨 호수'는 실제로 보면 어떨지, 많은 기대감을 품던 이때였다.


처음 마주한 비슈케크는, '이게 수도인가?' 싶어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확실히 카자흐스탄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가본 그 어떤 수도보다 발전이 덜 된 느낌이었다. 신기하게 생긴 커다란 빵을 길거리 곳곳에서 먹어보았다. 알고 보니 이것은 '레뽀쉬카'인데, 키르기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주식으로 먹는 빵이다. 특별한 맛은 아니고 고소한 바게트 느낌인데, 들고 다니면서 뜯어먹기에 좋다.


비슈케크에서 촐폰아타로 넘어갈 때 지평선을 바라보며 먹는 삼사는 그야말로 최고다. 삼사 자체만으로도 맛있는데, 이 멋진 풍광을 보며 육즙 가득한 삼사를 입 안 한가득 베어 물면, '중앙아시아에 오기 참 잘했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촐폰아타는 이식쿨 호수 옆에 있는 작디작은 시골 마을이다. 식당에 가는 길을 못 찾아서 헤매다가 길거리에서 만난 부부에게 길을 물어봤는데, 직접 추천 레스토랑에 차로 태워다 주셨다. 신부 보쌈 문화가 있는 키르기즈스탄에서 다소 위험한 행동이긴 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좋은 분들이었고 추천해 주신 레스토랑 역시 훌륭했다.


6월의 이식쿨 호수는 청량 그 자체였다. 겨울의 바이칼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물론 바이칼호수는 이식쿨호수와 비교도 안되게 크긴 하다.) 바이칼과는 달리, 이식쿨은 끊임없이 온수가 유입되기 때문에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고 한다.


이식쿨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사진도 찍으며, 몸으로 눈으로 그리고 카메라로 이 멋진 순간을 할 수 있는 한 힘껏 담아본다. 행복했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키르기즈스탄 여행도 이 호수처럼 아름다울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알틴 아라샨과 알라쿨 호수가 있는 카라콜로 가는 버스를 어디서 타냐고 숙소 주인아주머니께 물어보니까, '카라콜'이라고 키릴문자로 쓰인 종이를 주신다. 이 종이를 들고 길가에 잠깐만 서있어 보라고 하신다. 알려주신 곳에서 반신반의하며 그 종이를 들고 10분 정도 서있으니까, 봉고차 한 대가 내 앞에 멈춘다.


촐폰아타를 떠나 6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카라콜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카라콜은 키르기즈스탄 동부에 있는 작은 산밑 마을인데, 이 마을을 거점으로 알틴아라샨, 제티오구스, 지르갈란, 알라쿨 호수 등등을 쉽게 갈 수 있어서 여행자들의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다. 독일, 브라질, 영국 등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을 만나고 친구가 된 곳이기도 했다.


조용하고 한적한 카라콜. 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 평화로운 곳이다.


카라콜의 작은 집들은 참 정겹고 귀엽다. 러시아식 목조 교회와 시장, 풀밭에서 쉬고 있는 소를 구경하다 보면 반나절이 금방 간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오래 여행하다 보니 이제 웬만한 키릴문자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혁명광장 비슷하게 생긴 작은 공원도 구경해 본다.


샤우르마(러시아식 케밥)를 우적우적 씹으며 호스텔로 돌아왔는데, 마당에서 처음 보는 캐나다인과 독일인이 놀고 있었길래 친해지게 되었다. 캠핑을 사랑하는 캐나다인 앤드류는, 오토바이에 캠핑용품과 텐트를 싣고 3달간 중앙아시아와 파키스탄을 횡단하는 중이었다. 내가 알라쿨 호수에 가고 싶다고 하니 앤드류가 본인도 같이 가고 싶다며, 다음날 오토바이를 타고 올라가는 걸 도전해보자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다음날 날씨가 너무 좋지 않아 아쉽게도 오토바이로 알라쿨에 가는 것은 포기해야만 했다. 앤드류는 이식쿨호수 남부로 오토바이를 타고 떠났고, 나는 투어사를 통해 알라쿨에 가기로 결심했다.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 보소 라그만. 찰진 볶음면과 부드러운 말고기가 일품이다.



알라쿨 호수는 내가 중앙아시아에 온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어떻게 알라쿨 호수에 접근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작정 구글맵에 'TOUR'를 검색해서 두 군데를 찾아가 보았다.


"난 알라쿨 호수를 보고 싶다. 방법이 있는가?"

두 군데 모두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일단 봉고차를 빌려야 하며, 새벽 5시 반쯤 출발해서 3시간 정도 차로 산을 올라간 다음에 5시간 정도 등산을 해서 알라쿨 호수로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은 한여름이 아니기 때문에 위에 얼마나 눈이 쌓여있을지 본인들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마침 내일 알라쿨 호수에 가고 싶어 하는 프랑스인 커플이 있는데 같이 가겠냐고 해서, 다음날 새벽 5시까지 투어사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드디어 대망의 알라쿨 호수 가는 날, 새벽 5시에 기사님과 프랑스인 커플과 모여 출발을 했다. 가다 보니 슬슬 해가 뜬다. 봉고차를 타고 2시간 정도 달려 산등성이에 도착해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정말 너무너무 추웠다. 이 날씨에서 3시간 이상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왔으니 힘차게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30분 정도 올라가다 보니, 이건 도저히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올라갈수록 눈이 점점 깊어지고 춥고 눈보라가 치고, 결국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다가 셋이 다 같이 포기했다. 영롱한 청록색 알라쿨 호수를 보려면 7월 말~8월 초 한여름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바로 돌아가긴 아쉬워서 들판에서 말도 구경하는데, 내가 말을 좋아하는 걸 보시고는 말 주인아저씨께서 타게 해 주셨다.



만약 지금 내가 키르기즈스탄에서의 하나를 한국으로 보낼 수 있다면, 이곳의 상쾌한 향기가 담긴 공기 한 줌을 한국으로 보냈으면 싶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산 위에서 자본적이 있었던가. 자연 휴양림같이 제대로 된 숙소에서 자본적은 있지만, 날것의 산속에서 자본적은 이때가 처음인 듯하다. 물론 텐트가 아닌 유르트 안에서 자긴 했지만.


비록 알라쿨 호수는 못 봤지만, 알틴 아라샨에 올라가 보기로 한다. 중앙아시아의 산을 온전히 제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알틴 아라샨은 올라가는데 5시간, 내려오는데 5시간 총 왕복 10시간 정도 걸리는데, 보통 산 위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려온다. 걸음이 느린 나는 나는 왕복 12시간이 넘게 걸렸다.


악수는 알틴 아라샨으로 가는 시작점이다. 악수로 가는 길의 들판이 너무 예뻤다.



혼자서 여섯 시간 동안 산을 올라가는 일은 평화롭고 좋긴 하지만, 생각이 많아진다. 한마디 하지 않고 여섯 시간 내내 산을 오르다 보니, 사람이 그립기도 하다.


아슬아슬하게 해가 지기 전에 캠프에 도착했고, 다행히 남는 유르트(중앙아시아 유목민의 집)가 있었다. 일단 유르트에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려는데, 익숙한 두 얼굴이 보였다. 카라콜의 호스텔에서 만난 적이 있는 브라질인 마르셀로와 스코틀랜드인 로쓰였다.


혼자일 거라고 예상했던 알틴 아라샨은, 마르셀로와 로쓰 덕에 화기애애 즐거운 1박 2일이 되었다. 저녁을 먹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졌고, 저물어가는 노을을 바라보며 이 순간에 감사했다.


로스와 마르셀로, 그리고 유르트 세 개.


알틴 아라샨 등반은 키르기즈스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경험 중 하나였다. 특히 우박을 맞으며 혼자 산을 내려올 때는, 여행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서 뭘 할지에 대한 결정을 내린 순간이기도 했다. 자기애와 자신감이 가장 커졌던 순간이라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뭐든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뭐든 이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때 느꼈던 최고점의 자기애가 지금도 자양분이 되어 내 마음을 든든하게 하며,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는 추진력을 주는 것 같다.


알틴 아라샨을 오르면서 만난 귀여운 말들.



카라콜을 떠나 다시 돌아온 비슈케크에서는, 카라콜에서 만났던 캐나다인 앤드류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원래는 키르기즈스탄 오쉬를 지나 파키스탄으로 넘어갈 예정이었던 그는, 급 경로를 바꿔 비슈케크의 내가 있는 숙소로 왔다고 한다. 그것을 계기로 그와 나는 절친이 되어 훗날 캐나다에서까지 다시 만났으니, 사람의 인연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잠깐 스치는 인연이라고 생각했던 네덜란드인 '오마르'라는 친구가 있었다. 짓궂은 스페인 남자애가 나와 앤드류를 놀릴 때 제지해 주고, 나에게 한국 라면을 보여주며 어떻게 끓여야 맛있게 끓일 수 있냐고 물어보던 친구였다. 잠깐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교환하긴 했지만 그 후로 접점이 없었다. 그런데 약 3년 뒤, 본인을 기억하냐면서 어머니와 여자친구와 함께 한국에 여행을 왔다고 연락이 왔다.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만나러 갔다. 유쾌하고 참한 성품의 오마르와 마찬가지로, 그의 여자친구와 어머니 역시 너무나 좋은 사람들이었다. 한국에 대한 좋은 기억을 만들어 줘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나갔던 나는, 오히려 그들에게 역으로 귀한 대접을 받으며 황송한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교차점은 언제 어디서 다시 생길지 모른다. 그것은 한국에서일수도 있고, 저 먼 나라에서일수도 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비슈케크의 마지막 밤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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