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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비를 맞으며

첫 마음으로 돌아가는 거야

by 서담


봄이 깊어가며 나무들이 새잎과 새순을 활짝 펼치고 있을 때, 어느 날 숲 속에 잔잔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잎사귀 위에 톡톡 소리를 내며 떨어지더니,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숲 전체를 감싸 안았다. 이 봄비는 겨우내 묵은 먼지를 털어내며 나무들에게 새로운 깨끗함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소나는 빗물이 솔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을 즐기며 조용히 자신을 맡기고 있었다. 오랫동안 변치 않는 녹색 잎을 지켜오던 그는, 빗방울이 닿을 때마다 잎이 투명하게 씻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 모습은 묵직하면서도 고요했다. 옆에 있던 밤이도 흠뻑 젖은 잎을 흔들며 말없이 빗줄기를 맞이했다.


“소나야, 비를 맞고 나면 이렇게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 드는 건 참 신기해.” 밤이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밤이는 늘 땅으로 떨어진 자신의 열매를 신경 쓰곤 했지만, 빗속에선 그런 걱정도 잠시 사라진 듯했다.


소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아, 밤이야. 빗속에서는 모든 게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 같아. 우리 잎사귀도, 뿌리도 다 새롭게 씻겨 내려가니까.”


느티와 벚아도 빗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비를 맞고 있었다. 느티는 넓은 잎을 펼쳐 빗물을 흠뻑 머금으며 땅으로 내렸다. 그가 땅에 닿도록 내려보낸 빗물은 곧장 뿌리로 스며들어 깊이 자리 잡았다. 느티는 봄비가 그에게 준 이 생명의 기운을 느끼며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벚아는 빗방울이 꽃잎에 맺힐 때마다 흔들리며 떨어져 나가는 걸 느꼈다. 빗물이 꽃잎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그는 조금은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봄비가 끝나면, 그의 꽃잎은 모두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속에 있었다.


벚아는 조용히 느티에게 물었다. “느티 형님, 비가 오면 내 꽃잎이 떨어져 버릴까 봐 두려워요. 다들 봄비를 맞으며 새로워지는 걸 즐기고 있는데, 저는 꽃잎이 없어질까 봐 걱정이 돼요.”


느티는 따뜻하게 벚아를 바라보며 위로했다. “벚아야, 꽃잎이 떨어지더라도 너는 여전히 너 자신일 거야. 봄비는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만 주고, 너도 이 비를 맞으며 더 강해질 수 있을 거야. 떨어진 꽃잎은 다시 돌아올 봄을 위한 준비인 거지.”


벚아는 느티의 말을 듣고 마음을 다소 내려놓았다. 꽃잎이 떨어지더라도 자신에게는 또 다른 계절이 온다는 것을 깨달으며, 빗속에서 자연스럽게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이팝도 숲 속 한구석에서 고요히 비를 맞고 있었다. 이팝은 자잘하고 하얀 꽃을 피우기 시작한 참이었다. 빗물이 그의 꽃 위로 떨어지자, 꽃잎은 순간적으로 투명해지면서 비와 함께 어우러져 숲 속에서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이팝의 모습은 마치 맑은 봄의 순수함을 그대로 담아낸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소나는 이팝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이팝아, 너의 꽃은 빗속에서도 참 아름답구나. 마치 빛이 퍼져 나오는 것 같아.”


이팝은 수줍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고마워, 소나야. 난 그냥 조용히 서 있을 뿐인데, 봄비가 내게 생명을 더해주는 것 같아. 너희들도 비를 맞으며 각자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잖아.”


이팝의 말에 소나와 밤이, 그리고 느티와 벚아는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빗속에서 각자 자신의 색을 그대로 드러내는 이 시간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숲 속에 있는 나무들은 갑자기 날씨가 더 어두워지면서 빗줄기가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빗방울이 커지고 바람이 거세지면서 나뭇잎들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벚아가 큰 바람에 휘청거리자, 소나가 잽싸게 가지를 뻗어 벚아를 지탱해 주었다.


“벚아야, 괜찮니?” 소나가 묻자 벚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도했다.


“고마워, 소나야. 너희가 있어서 든든해.” 벚아는 이제 빗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지며 소나의 가지를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느티는 모든 나무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모두, 함께 비를 맞으며 더 단단해질 수 있어. 이 비는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줄 거야.”


나무들은 느티의 말에 힘을 얻어 빗줄기가 거세게 몰아쳐도 흔들리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지켰다. 봄비가 그치고 숲 속은 다시 고요해졌을 때, 그들은 깨끗이 씻겨 나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평화와 고요함을 느꼈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후, 벚아가 미소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함께 비를 맞고 나니, 이 봄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져. 내 꽃잎이 비에 떨어진다 해도, 또 다른 봄을 위해 준비할 거야.”


나무들은 서로의 곁에 서서 빗속에서 새로워진 자신들을 바라보며 다시 찾아올 봄날을 떠올렸다. 함께 맞은 비는 그들에게 더 깊은 유대감을 남겼고,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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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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