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음을 잠시 꺼두셔도 돼요
비가 오는 날이면, 나는 자연스레 걸음을 늦춘다. 우산 끝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따라가다 보면, 도시의 모든 소음이 조금씩 눅눅해지며 사라진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던 세상의 소리들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들리는 순간이 있다. 그건 바로, 빗소리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이다.
오늘도 나는 정류장 한편에 서 있었다. 어깨를 적시는 빗줄기를 피하듯 천정 밑으로 비켜 들어서자, 세상은 조용히 비의 언어로 바뀌었다. 처음엔 차가 도로를 달릴 때마다 물살을 가르며 흩날리는 소리가 귀에 스며든다.
‘슥~촤악~'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결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듯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것은, 정류장 지붕 위를 두드리는 빗방울의 리듬. 큰 물방울과 작은 물방울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불협화음 속에서 나는 오히려 묘한 안정감을 느낀다.
그때,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인다. 누군가는 급히, 누군가는 느리게, 각자의 속도로 비를 건넌다. 우산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들의 마음을 대신 말해주는 듯하다. 급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의 우산 위 빗소리는 다급하고, 천천히 걷는 이의 우산 위 빗소리는 오히려 한 편의 음악 같다.
나는 그 모든 소리를 가만히 듣는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도 괜찮다. 사람들의 대화 소리보다, 자동차의 엔진음보다, 지금 이 순간 내 귀에 닿는 건 오직 빗소리뿐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비는 말이 없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세상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건넨다. 아스팔트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자동차의 타이어 소리, 물웅덩이에 떨어지며 동그라미를 그리는 빗방울의 반복된 리듬, 그리고 신호가 바뀔 때마다 일제히 출발하는 차들의 물보라. 모든 소리가 서로 다른 속도로 세상과 대화를 나눈다. 그 대화의 언어는 ‘촉촉함’이다. 촉촉하게 번지고, 스며들고, 적셔 들어간다.
비가 내리는 도시의 밤에는 누구의 목소리도 필요하지 않다. 오직 빗소리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 안는다.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살아있음’을 느낀다.
어릴 적엔 비가 오면 괜히 쓸쓸했다. 세상이 울고 있는 것 같았고, 빗물에 내 마음마저 번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 나는 안다. 비는 슬픔이 아니라 ‘쉼’이라는 것을.
비는 세상을 잠시 멈춰 세운다. 멈춤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듣는다’. 자신의 생각, 마음의 울림, 그리고 지나간 하루의 숨소리. 비가 오지 않으면 들리지 않는 소리들이다.
오늘의 빗소리를 들으며 문득 생각했다. 우리의 인생도 이 빗소리처럼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때로는 세차게, 때로는 고요하게, 하지만 결국 모두 흘러내려 새로운 길을 만든다.
“빗소리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을 줄 아는 이에게 모든 것을 말해준다."
비 오는 정류장에서 서 있다 보면, 도시는 낯설 만큼 투명해진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물 위에 비치고, 그 빛이 일렁이며 번져간다. 잠시 세상은 흐릿하지만, 이상하게 그 흐릿함 속에서 진짜가 보인다.
우리는 늘 ‘분명함’을 원하지만, 때로는 ‘희미함’ 속에 진실이 숨어 있다. 비가 내리는 밤, 그 흐릿한 풍경 속에서 나는 오히려 선명하게 ‘나’를 본다.
빗속의 정류장은 일상의 쉼표다. 바쁘게 달려오던 하루의 문장 속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를 수 있는 쉼표. 나는 이 시간이 좋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잊은 채, 오직 빗소리에 집중하는 시간.
사람들은 흔히 ‘고요’는 소리가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진짜 고요는 소리 속의 고요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결국 마음이 잠잠해지는 순간. 그게 바로 진짜 고요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도시는 여전히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나는 잠시 머물러 있다. 빗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이 순간을 글로 남긴다.
오늘의 이 빗소리, 그 촉촉한 공기와 반짝이는 노면의 냄새까지 기억하고 싶다. 언젠가 이 순간이 그리워질 때 나는 이 문장을 다시 읽으며, 이 빗소리를 마음으로 다시 들을 것이다.
빗소리를 듣는다는 건,
세상의 소음을 잠시 꺼두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