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다시 걷는 나의 부대
며칠 전, 군에서 복무 중인 아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빠, 재미있는 일이 있어서 전화드렸어요.”
아들의 밝은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무슨 재미있는 일인데?”
아들은 현재 고등군사반, 흔히 ‘중대장 지휘과정’이라 불리는 교육에 참여하고 있다. 장교로서 본격적인 지휘관의 길에 들어서는 준비 단계. 교육 과정 중 마지막 관문인 사전 지휘실습을 위해, 부임 예정 부대에서 일주일간 미리 실습을 하게 된 것이다.
“아빠, 저 강원도 화천 부대로 가요.”
그 말에 순간, 시간이 15년 전으로 되감겼다.
강원도 화천. 그 이름만 들어도 군 생활의 무게가 느껴지는 곳.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겨울바람,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산줄기와 철책선. 장병들이라면 단번에 ‘아, 그곳’ 하고 떠올릴 만한 두 번은 가기 싫은 부대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저 힘든 곳만은 아니었다. 연대 작전과장으로 근무했던 곳, 부하들과 밤을 지새우며 작전계획을 수립하고, 혹한 속에서 장병들의 안전을 챙기며 나 역시 성장했던 곳. 그 시절, 아들은 그곳에서 중학생이었다. 추운 겨울이면 등굣길에 입김을 뿜으며 위병소를 지나던 아이, 군복을 입은 아빠를 자랑스레 바라보던 그 눈빛이 어느새 지휘관인 중대장의 눈빛으로 자라 있었다.
“아빠, 주임원사님이 통화 좀 해보고 싶으시데요.”
아들은 전화기를 다른 이에게 넘겼다. 그리고 들린 목소리.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익숙했다. 당황스러울 만큼 선명한 목소리였다.
“과장님… 저 교육지원담당관이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겠습니까?”
순간, 심장이 미묘하게 떨렸다. 그는 15년 전, 내가 작전과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함께 땀 흘리던 중사, 교지관이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계급도 변했지만 그 특유의 담담함과 예의 바른 말투는 그대로였다.
“원사님이… 되었군요.”
내가 작전과장으로 마지막까지 믿고 맡겼던 그 교육지원담당관이 이제는 대대 전체를 아우르는 주임원사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
“과장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때 과장님께서 저를 보살펴주신 마음 잊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아드님… 아니, 중대장님. 제가 물심양면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그 말에서 느껴진 진심은 서늘하던 화천의 산바람보다 내 가슴을 더 깊이, 뜨겁게 파고들었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짧은 침묵 속에서 기억 속의 풍경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회식자리에서 소탈하게 웃던 교지관, 눈발 휘날리던 훈련장에서 땀범벅으로 뛰던 그의 모습, 그리고 그 시절 함께 했던 수많은 밤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묘하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 속에서 맺어진 마음은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지고, 더 깊어지고, 더 단단해져 세월의 시험을 견디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내가 지휘하던 부대. 그 부대에서 이제 아들이 지휘를 하게 된다는 사실. 그 말의 의미는 단순히 ‘같은 장소’가 아니었다.
아들이 내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자기만의 길을 걷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길 옆을, 예전의 내가 믿고 맡겼던 원사가 다시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마치 한 편의 원(圓)이 완성되는 듯한 순간이었다.
시간은 모든 것을 바꿔놓지만, 사람의 인연은 결국 시간을 이긴다는 말을 그날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리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아들이 걸어가는 그 길에서, 나는 멀리서도 늘 그를 바라보며 그저 ‘군인 아버지’로서, ‘인생 선배’로서 따뜻한 바람이 되어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