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에 복종
될 놈은 되고, 안될 놈은 안 된다
군 생활을 하며 수없이 들었던 말이다. 누군가는 운명이라 했고, 누군가는 구조라 했다. 하지만 그 말이 내게 닿았던 그날,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1사단에서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대한민국 군대의 뿌리이자 서부전선의 최전방 부대. GOP철책 중대장부터 군수, 정보, 작전까지 실무자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를 거쳤다. 그 시절, 내 손을 거치지 않은 문서와 계획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단 정규전 작전장교로서, 나는 스스로를 철저히 ‘현장형 실무자’라 불렀다. 밤새 불이 꺼지지 않는 지하 벙커 속, 군사대비계획과 수많은 상황을 붙잡고 버티는 것이 내 일상이었다.
군복무한 지 9년 차가 되던 그해, 소령 1차 진급 대상자 명단에 내 이름이 올랐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 자신조차도, 단 한 치의 불안도 없었다. 내가 수행한 업무, 맡은 임무, 책임의 무게를 생각하면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생은 언제나 예기치 못한 방향에서 무너진다.
그들은 그렇게 내 앞에 나타났다.
나의 직속상관 작전참모, 그리고 인사관리를 하는 보임장교였다. 출신이 다른 보임장교는 나의 진급을 막기 위해 교묘히 움직였다. 나와 같은 출신 선배를 불러 ‘자네 후배가 경쟁자야’라며 동정심을 자극했고,
작전참모는 야전 경험이 전무한 해외근무와 정책통이었다. 그는 내가 올린 모든 보고서를 시비 걸 듯 문장 하나, 숫자 하나를 수정하지도 못한 채 트집 잡았다. 보고서는 늘 결재선 앞에서 멈췄고, 나의 야전 시간은 그렇게 지연되고 무너졌다.
하루는 참다못해 물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비아냥거리기가 일쑤였고 나의 보고서를 손가락으로 두드릴 뿐이었다. 그 묵묵한 무시가 내게는 가장 큰 폭력이었다.
그 시절, 나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라는 근무였다.
식사는 건너뛰기가 일쑤였고, 벙커 안에서는 계절의 변화조차 느낄 수 없었다. 경의선 철도 연결사업, 남북 도로 복원 등 국가적 프로젝트의 군사 대비계획이 내 손에서 시작되었다.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되지 않았다. 내 이름이 ‘1사단’이라는 문서에 수십, 수백, 수천번 찍혔다. 하지만 그 이름은 점점 짐처럼 느껴졌다.
결국 그날, 한계는 찾아왔다. 또다시 결재판 앞에서 한 시간이 넘게 잔소리만 늘어놓던 작전참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속에서 무언가 ‘뚝’ 소리를 내며 끊어졌다. 나는 결재판을 그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조용히 계급장을 떼어 그 옆에 두었다.
“더 이상 임무를 수행하지 않겠습니다.”
그 말이 입에서 나오는 순간, 손끝이 떨렸고, 가슴이 미세하게 쑤셨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어둡고 습한 지하 벙커 한편에서, 전역지원서를 꺼내 들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이제는 그만하려고 해.”
잠시 정적이 흘렀고,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숨소리가 들렸다.
“지금껏 10년 동안 고생했는데 왜.. 당신이 전역을 해? 누구 좋으라고.. 그럴수록 이겨내야지”
그 한마디가 나를 무너뜨렸다.
3개월 뒤, 진급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누구도 믿지 못했다. 그토록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이, 그토록 헌신했던 장교가 진급에서 누락되었다는 사실을. 부대창설 이후 해당 보직을 수행한 장교가 진급이 안된 경우는 처음이었다. 믿기 힘들었지만 그건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진급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진급은 보상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타협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나는 그렇다고 그 어떤 경우에도 이치에 맞지 않거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거에는 결코 타협하지 않았다. 그렇게 명예를 더럽히면서 군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이유로 나의 군생활은 늘 고난의 행군이었고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가끔 생각한다. 그때 조금 더 참았더라면,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달라졌을까.
그러나 곧 스스로에게 대답한다.
“아니, 그것은 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군인은 명령에 복종하지만, 사람은 양심에 복종해야 한다. 나는 그 이후로도 줄곧 양심을 택했다.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말했다.
“될 놈은 되고, 안 될 놈은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안 돼도 꺾이지 않는 놈, 양심을 지켜내는 놈이 진짜 군인이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