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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가족, 삶의 한 조각

함께하는 힘

by 서담
아빠… 우리 이사 안 가면 안 돼?


작은 입술을 삐죽이며 건넨 그 한마디는, 바삐 움직이던 이삿짐 트럭의 굉음보다 훨씬 더 크게 내 가슴을 흔들었다. 아이의 눈에는 게임도, 장난감도, 친구와의 약속도 없었다. 그저, 떠나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막막한 마음 하나만이 비어 있었다.


군인의 삶은 길이 아니라, 명령에 따라 정해지는 항로에 가깝다. 1~2년마다 전국 어딘가로 이동한다는 건 익숙하면서도 매번 낯설다. 어떤 지인은 “주말부부가 더 낫지 않겠어?”라고 조심스레 권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단 한 번도 고민한 적이 없었다. 어떤 길을 걷든 가족은 함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내 안엔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선택이 아이에게 어떤 무게로 다가왔는지는, 나는 아버지였지만 미처 다 헤아리지 못했다. 형제자매 없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친구를 사귀었다 싶으면 다시 떠나야 했다. 뛰어놀아야 할 나이에, 아이는 이삿짐 사이에 조용히 웅크려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군인 아버지가 지키고자 했던 ‘조국’ 뒤에서, 아이가 지키고 있던 ‘고독’이 얼마나 컸는지를. 딸아이가 다섯 살이 되던 해, IMF 한파가 서민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던 바로 그 시절. 아들이 태어났다.


우리가 선택한 군인의 삶은 아이들에게 ‘특별한 성장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아침이면 군대 기상나팔이 아이들의 알람이 되었고, 등하굣길에는 위병소가 늘 함께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며 거쳐 간 학교는 무려 9곳. 그래서인지 교복도 여러 벌, 졸업앨범 속 친구들은 늘 새 얼굴이었다.


처음 두세 번까지는 아이들이 아쉬움에 찡그리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이사 소식에 “이번엔 어디로 가는 거야?”라며 오히려 설렘을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떠나는 것이 두려움이 아닌, 또 하나의 모험처럼 자리를 잡은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늘 같은 말을 들려주었다. “빠른 아이보다 바른 아이로 자라면 된다. 공부도 중요하지만, 가족이 함께라는 게 더 중요하다.”


우리가 지켜온 건 성적표가 아니라 함께 밥 먹는 시간, 서로의 하루를 들어주는 대화, 그리고 어디에 있어도 서로를 바라봐주는 시선이었다.


뒤돌아보면 20여 년 동안 아이들은 늘 ‘군인의 자녀’로 살아왔다. 날씨가 좋아도, 비가 와도, 아빠가 집을 지키는 일보다 철책을 지키는 일이 먼저였던 시절. 그 힘겨운 날들을 아이들이 어떻게 견뎠을지, 지금 생각하면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런데 아이들은 우리보다 더 강했다.


딸은 이제 군인 아내로서의 길을 스스로 선택했고,

아들은 아버지가 걸었던 군인의 길을 자부심으로 걸어가고 있다.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아, 아이들이 우리를 닮아가고 있었구나.”

우리가 보여준 삶의 방식이 아이들의 선택이 되었고,

아이들의 선택이 우리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부모는 결국 아이들의 첫 번째 교과서다. 우리가 말하는 한 문장, 우리가 행동하는 한 장면이 아이들의 내면에 깊이 새겨져 훗날 ‘그들의 삶의 기준’이 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심스럽고도 단단하게 마음속 다짐을 꺼낸다.


“아이들이 남긴 발자국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그 곁에는 늘, 우리가 있었다. 같은 길을 함께 걸으며, 같은 계절을 지나고, 같은 바람을 마주하며.


그리고 어느새 아이들은, 우리가 남긴 길 위에 자신들만의 길을 만들어 걷고 있었다. 그 길이 어디로 이어지든, 나는 안다. 아이들은 우리가 보여준 ‘함께의 힘’을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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