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침구조대> 곽미영 글, 지은 그림, 만만한 책방
외국인에게 우리말은 다른 언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노랗다, 누렇다, 샛노랗다, 누리끼리하다, 노르스름하다, 누르스름하다 등 같은 뜻을 가진 형용사가 수도 없이 많으니. 친척을 지시하는 명칭도 다양하고 존댓말을 쓰는 법도 복잡하기만 하다. 문법은 또 얼마나 어려운가? 중학교 국어에서 형태소가 범위에 들어가는 시험 점수는 반평균 60점을 넘기는 경우가 드물다. (문자나 sns 등에서 말을 짧게 줄여쓰기 시작하면서, 우리말을 배우는 외국인의 부담감이 그나마 좀 줄어들지 않았나 싶다.)
맞춤법도 어렵긴 마찬가지다. 특히 받침, 그중에서도 자음 두 개가 모여 이루어지는 받침이면 더 문제다.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도 헷갈려서 자주 틀리곤 한다. 그림책 『받침구조대』는 바로 그 점에 착안하여 깜찍 발랄한 상상력을 보여준다. 『받침구조대』의 구조 대원들은 받침을 구성하는 자음들의 연대다. 받침 대원들이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적극 손을 내밀고 어려움에 처한 친구들을 구해 주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받침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어느새 익숙해진다.
받침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받침구조대’다. 띠리 롱! 띠리 롱! 사무실에는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그만큼 받침을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겠다. 하지만 받침 구조대원들이 있으니 문제없다. 그들은 받침을 보태거나 빼면서 사건을 해결한다. 각각의 사연에 받침들의 기발한 움직임이 하나하나 더해져 독자에게 색다른 재미를 준다.
구름이 해를 막아 온 세상이 어두워졌을 때는 ‘ㄹ’ 대원이 출동해서 ‘막’의 ‘ㄱ’ 받침과 짝을 이루어 세상을 맑게 만들고, 오랫동안 아기를 안고 있느라 힘든 캥거루의 고충을 들은 ‘ㅈ’ 대원은 ‘안’의 ‘ㄴ’ 받침을 보조하여 캥거루를 편히 앉혀 준다. 온 세상이 푹푹 삶는 것처럼 더운 날에는 대원들이 커다란 수영장을 만들고 ‘삶’에서 ‘ㅁ’ 받침을 빼내 주어 동물들이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도 한다. 그뿐인가? 유리창 앞에 서서 아무리 ‘닥아’도 깨끗해지지 않는다고 시무룩해져 있던 ‘ㄱ’ 받침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 ‘ㄱ’ 대원은 ‘닥’의 ‘ㄱ’ 옆에 꼭 붙어 유리창 닦기에 힘을 보탠다.
받침마다 일일이 이야기를 지어낸 정성에 놀랐고, 각각의 에피소드가 너무 재미있어 다시 한번 놀랐다. 하지만 이 그림책이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받침 구조대’가 그들끼리의 연대를 통해 움직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받침구조대 대원들은 서로 모이거나 각자 흩어지거나 기존 글자의 자음과 연대하거나 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받침을 만들어 낸다.
소중하게 굴리던 소똥이 없어졌다고 울먹이던 쇠똥구리는 대원들이 ‘없’에서 ‘ㅅ’ 받침을 빼 주어 땅속에 떨어진 소똥을 무사히 업고 나올 수 있었다. 남은 ‘ㅅ’ 받침에 다른 ‘ㅅ’ 대원들이 겹겹이 쌓여 사다리를 만들어 준 덕에 가능했던 일이다.
받침을 구성하는 자음들의 연대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의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다. 글자에서 받침은 주인공이 아니다. 몸통 글자에 붙어 보조하는 용도니까. 받침 하나쯤은 가볍게 지나치기 쉬워서 우리가 더 자주 틀리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듯 자칫 소외되기 쉬운 받침들이 모여 일을 내고 말았다. 받침 하나로는 힘이 없지만 여러 개의 받침이 더해지면 누군가를 위기에서 구해 내는 큰 힘을 발휘한다. 잘못 만난 두 개의 자음을 분리하면 누군가의 괴로움이 덜어진다.
받침들의 연대에는 강자의 통제와 지도력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글자 몸통의 일부가 아니어도, 다른 모습으로 오해받더라도 그 뒤를 동료들의 연대가 받쳐 준다면 위축될 게 없는 것이다. 그들의 연대가 의미 있는 이유다.
도움을 요청하는 친구들은 ‘말’로 상황을 설명하고 일이 해결되면 ‘말’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살면서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관계가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보라. 심지어 부모 자식 간에도 말은 보상과 연관되기 쉽다. “100점 맞으면 장난감 사 줄게.” “8시까지 숙제 마치면 게임 한 시간 하게 해 주세요.” 같은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말이다.
받침 구조대와 같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연대, 대가 없이 '말'만으로 이루어지는 친구 관계는 우리가 그림책에서 본 것처럼 생각지 못한 힘을 발휘한다. 누군가를 도와줄 수도 있고 ‘나’를 외롭지 않게 할 수도 있고 나의 주체적 성장에 든든한 힘이 되어 줄 수도 있다.
책을 읽는 독자들, 특히 어린 독자들은 각각의 에피소드가 주는 이야기에 웃음을 터뜨리다가 어느새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성적으로 매겨지는 각박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받침구조대 대원들의 선의가 얼마나 따뜻한 위안으로 느껴지겠는가?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써본다. 한 가지 주제를 정하고 그쪽으로만 매진하려 했더니 오히려 글이 잘 안 써졌다. 나는 아직도 전문 글쟁이가 아닌 것인가?ㅠ 못쓰고 안 쓰다 보니 두 달이 훅 지나갔다. 초조했다가 안달했다가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러다 문득 쓰고 싶어 졌다. 그냥 마음이 가는 대로 써보기로 했다. 브런치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