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관하여
예측할 수 없는 제주의 날씨, 수심을 알 수 없는 물속, 수고에 비해 적은 소득을 얻기 위해 거친 파도 속으로 뛰어드는 해녀의 삶을 볼 때마다 불평 거리를 늘어놓은 일은 어쩌면 부끄러운 일은 아닌가 하며 생각해 봅니다.
청년 시기에 그린 해녀 그림입니다. 이 시기에는 연약하며 아름다운 여인을 담았습니다.
그림 속에서나마 험난한 삶에 나비처럼 가볍게 날아다니며 꿈을 꾸게 만들어 드리고 싶었지만 어딘가 여인들은 지치고 슬픈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해녀를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슬픔을 뛰어넘지 못했나 봅니다.
청년의 시기가 지난 지금은 위의 그림과 같이 작업의 방식과 재료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해녀의 삶은 혹독하고, 목숨을 잃는다는 두려운 사실보다 더 절실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아름다움과 낭만은 사치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가 분들 중에는 해녀를(그림, 사진, 설치, 영상) 주제로 작업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해녀의 삶이 깃든 다양하고 풍부한 얼굴 표정과 바다에서 일하는 작업의 모습 등, 역동적이면서 강인한 모습을 그려낸 작업물이 많은 편입니다.(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저는 해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고민하던 중 우연히 그분들의 죽음에 관하여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다의 양식을 채취하다 발에 미역이 휘감겨 뭍으로 나오지 못한 해녀와 자맥질(물속에서 팔다리를 놀리며 떴다 잠겼다 하는 행동)이 가능한 수심보다 더헌 곳에 들어가 숨을 쉬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허무한 죽음의 광경을 듣게 되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해녀의 아픈 이야기를 담기로 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죽음 이후에 좋은 곳(천국)으로 가기를 바라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위의 그림(2번)은 푸른 색감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청색을 보면 죽음이 생각납니다.
제가 제주도에 입도했을 때 교회를 다니면서 알게 된 늘 따뜻하게 대해주던 박정선이라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병으로 40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 친우들과 찬송가를 불러주며 그녀가 잠들 때까지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피부색은 점점 푸른빛으로 변해갔고 저는 찬송을 부르고 있었지만 두렵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녀의 얼굴빛은 검고 깊은 바다색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그때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삶에는 죽음이 부록처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는 너무 어렸습니다.
위의 그림(2번)의 제목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부제는 '해녀의 죽음'입니다. 성산일출봉이 마치 무덤처럼 한쪽 구석에 그려져 있습니다. 하늘에는 사람의 두뇌 뼈가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머리 부분에 있는 나비 뼈를 그려 넣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