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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웅을 심각하게 좋아하는 사람들

여가와 시리어스 레저 이론

by 설부인


트로트가수 팬 생활과 나의 등산 이야기


중노년 여성분들이 트로트 가수 '팬 생활'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저 집에서 혼자 TV로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팬클럽에 가입해서 멤버들과 셀럽 관련 소통을 활발히 하고, 1년간 콘서트 일정을 꿰뚫어 보며, 틈틈이 지방 공연도 찾아가 응원하는 등 열정적인 활동을 펼친다. 혼자서 멀리서 좋아하는 것보다 돈도 에너지도 훨씬 많이 들고 번거롭지만, 일정을 짜고 같이 모이고 서로 소통하는 과정에서 큰 보람과 즐거움을 느낀다고 한다.


왜 이토록 '심각하게' 여가를 즐기려 하는 걸까? 이들의 모습은 4년 전부터 등산을 시작한 나의 모습과 묘하게 닮아 있다. 토요일 아침만 되면 퍼질러 자기보다 얼른 일어나 어디론가 가서 산을 타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 지방여행을 갈 때는 등산 가능한 장소를 먼저 고려하고, 해외여행을 가더라도 이왕이면 산을 오를 수 있는 곳으로 생각하게 된다. 평소 주말뿐 아니라 여행에서도 등산 코스를 챙기게 되는 이 증상. 왜 우리는 레저를 '아무 생각 없이'가 아니라 '목적적으로 심각하게' 즐기려 하는 걸까?


이러한 여가생활을 우리는 '시리어스 레저(Serious Leisure)'라고 부른다.


'덕질'도 레저다, 아니 '진지한 레저'다!


'휴가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옛말이다. 요즘 사람들은 푹 쉬는 대신, 오히려 휴가 기간을 활용해 세계 각지의 마라톤에 참가하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떠나며, 히말라야와 같은 거대한 산을 등반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임영웅 팬덤의 활동과 나의 등산 경험 또한 이러한 '진지한 여가'의 대표적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캐나다의 사회학자 로버트 스테빈스(Robert A. Stebbins)가 주창한 진지한 여가는 단순한 휴식이나 시간 보내기가 아니다. 특정 활동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 기술 및 지식의 축적, 그리고 내적인 보상을 추구하는 체계적인 여가 활동을 말한다. 임영웅 팬덤의 활동과 나의 등산 경험에 이 이론을 대입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지속적인 노력과 헌신: 임영웅 팬클럽 활동은 지속적이며, 앨범 구매, 스트리밍, 투표 참여 등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등산 역시 일회성 활동이 아니다. 산을 꾸준히 오르며 체력을 기르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술, 지식, 경험의 축적: 팬들은 '효율적인 티켓팅 방법', '가수 관련 정보'와 같은 노하우와 정보를 쌓아간다. 등산객들은 '어떤 등산화를 신어야 할지, 어떤 장비를 갖춰야 할지, 어떤 코스가 나에게 맞는지'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내적인 보상 추구: 팬들은 금전적 이득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응원하고, 그를 통해 얻는 만족감, 성취감, 즐거움이 크다. 등산객들 역시 정상에 올랐을 때의 희열은 그 어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보상이다.


독특한 참여 윤리: '우리 가수에게 누가 되면 안 돼!'와 같은 높은 책임감과 헌신적인 태도가 존재한다. 산을 오르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고 컨디션을 조절하며 자연을 보호하는 것도 일종의 윤리다.


정체성 형성: '나는 임영웅 팬이다'라는 정체성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된다. 팬덤 내에서 '영웅시대'라는 소속감을 통해 자부심을 느낀다. 나에게 등산은 단순한 취미를 넘어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주었다.


지속적인 만족감: 새로운 앨범, 콘서트, 방송 출연 등 계속되는 활동 속에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며 꾸준한 만족감과 성취감을 얻는다. 다음번에는 더 높은 산을 오르거나, 더 먼 거리를 걷는 목표를 세우는 것처럼 말이다.



휴식에서조차 '진지함'을 추구하는 이유


"좋아하는 가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해? 혹은, 쉬는 날인데 왜 굳이 산에 가서 고생을 사서 할까? 일종의 성취 중독 아닌가?"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진지한 여가는 단순히 '성취 중독'으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심리적, 사회적 욕구를 반영한다.


의미와 목적에 대한 갈증 해소: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사람들은 때때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공허함을 느낀다. 진지한 여가는 명확한 목표(예: 가수의 성공, 마라톤 완주, 산 정상 등반)를 제시하고,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부여한다. 이는 단순히 '쉬는 것'을 넘어, 자신이 가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깊은 보람을 느끼게 한다.


스트레스 해소와 통제감 회복: 오히려 진지한 여가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일상에서 느끼는 통제 불능의 스트레스와 달리, 여가 활동에서는 자신이 주도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노력하여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등산을 하면서 온전히 나의 체력과 의지에 집중하고, 한 발 한 발 오르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통제감과 성취감을 느낀다. 이는 정신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데 기여한다. '퍼져서 쉬는' 것보다 오히려 '움직이며 몰입하는' 것이 더 큰 해방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관계와 소속감 강화: 진지한 여가는 종종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과의 깊은 교류를 수반한다. 임영웅 팬클럽에서 함께 소통하고 응원하며 느끼는 유대감, 등산 모임에서 함께 땀 흘리고 정상에서 서로를 격려하는 동료들처럼, 같은 목표와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들 속에서 강한 유대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다. 이는 고립감을 줄이고 사회적 지지를 얻는 중요한 통로가 된다. 남편과 함께 등산을 하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격려하며 관계가 더욱 단단해진 것처럼 말이다.



진지한 취미, 나를 위한 진짜 시간


결론적으로 진지한 여가는 단순히 '놀이'를 넘어선다. 이는 삶의 의미, 자아 성취, 그리고 깊은 만족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채우지 못하는 본질적인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며, '진정으로 나를 위한 시간'이 무엇인지 정의하게 한다.


'퍼져서 쉬는' 것만이 휴가의 정답이 아니다. '진지하게 나를 성장시키는' 여가 역시 중요한 휴식의 형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당신에게는 어떤 '진지한 취미'가 있는가? 혹은, 진지한 취미를 통해 진짜 당신을 만나보는 건 어떤가?


#진지한여가 #시리어스레저 #serious_leisure #통제감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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