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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가장 단순한 사랑

사람의, 그러니까 내가 브로콜리라 불러 온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 기록된 것보다 3배는 더 길고 장황했다. 실제로 이야기한 시간은 중간에 질문하고, 반응하고, 울다 웃는 것까지 포함해 체감 상 5배 이상이었다. 이야기가 간신히 마무리되자 해는 진작 지고 달이 하늘 꼭대기에서 대롱거리며 탈진한 우리들을 구경했다. 목 사장이 두어 번 2층으로 올라왔다가 흥분 상태로 이야기하는 브로콜리를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갔다. 나는 듣기만 했고 공은 브로콜리 옆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고 추임새를 넣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이야기가 ‘사람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다만 사랑에 빠질 뿐’에 다다르자 공은 진심으로 감격한 표정이었다.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

 브로콜리의 손을 잡으며 공은 말했다.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야말로 제가 할 말인데요. 배우님 덕분에 삶의 의미를 채울 수 있었는데.” 코를 훌쩍이며 브로콜리가 말하고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그래서, 얘기는 다 끝났니?”

 목 사장의 머리가 층계 위로 불쑥 솟아났다. 셋 다 지금 당장 내려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층으로 내려가자 갓 구운 빵 냄새가 잊고 있던 공복 상태를 다급히 일깨웠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까지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이야기만 과식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갓 구운 당근 파운드케이크를 묵묵히 먹어치웠다. 

 공이 두리번거리며 목 사장에게 질문했다.

 “걔는 어디 갔어?”

 목 사장은 냉장고에서 직접 담근 하귤청이라며 병을 꺼내 찻잔에 덜어 주었다.

 “뜨거운 물을 부어 마시면 감기 예방에 좋아.”

 “여기 없어?”

 “시원하게 마시고 싶으면 탄산수를 타고.”

 공이 뭐라 쏘아붙이려는 찰나에 복도 끝에서 해원이 빠르게 걸어왔다. 밤공기의 냄새가 머리카락에 달려 있었다.

 “너 지금...”

 “내가 뭘 하는지 네가 알 권리는 없다고 아까 말했고. 장원 씨, 내일 일정에 변동사항 없죠?”

 파운드케이크를 삼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은 방긋 웃으며 내 옆에 앉아 가장 큰 케이크를 맨손으로 집어 들고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해원은 이 근처에서 카페를 운영했던 사장님을 만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브로콜리가 유자차 세 잔을 마시고 회인의 책을 직접 본 그 카페였다.

 “거기 없어진 지 꽤 되지 않았어요?” 

 그 카페는 ‘회인 로드’의 34곳의 카페 중 가장 먼저 문을 닫았다. 내가 받은 명단에 카페 이름 옆에 ‘폐업’ 단어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해원의 설명과 브로콜리의 이야기를 맞춰 보면 브로콜리가 떠나고 <화장실 전쟁> 개봉 사이에 카페에서 회인의 책이 사라졌다. 항상 카운터 안쪽 사장을 제외한 손님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곳에 회인의 책을 보관해 두었는데 어느 날 책을 꺼내 보니 비슷하게 생긴 검은 표지 노트로 바꿔치기 되어 있었다. 언제 바뀌었는지 특정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해원은 브로콜리가 카페 근처에서 주인을 만난 적 있다는 얘기에 관심을 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거지만요. 회인을 위한 봉헌을 짓겠다고 하셨어요. 텀블러에 보드카를 넣어 다니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있다면요.”

 “봉헌을 위한 사원은 이미 완성됐어요.” 내가 오늘 다녀 온 책방 에티카 사진을 보여 주자 브로콜리는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와, 그게 그럼 허언이 아니라 정말로 진짜...”

 “에티카는 사람 씨도 나중에 같이 가요, 그 전에 일단은.”

 해원이 내 어깨를 짚으며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서쪽으로 한 바퀴 돌 계획이라 하셨죠?”

 “아침 일찍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 식탁에서 멀찍이 떨어져 앉아 오고가는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공이 끼어들었다.

 “나도 간다.”

 브로콜리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해원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린 그대로 시선만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려보았다.

 공은 해원을 바라보았다.

 “나도 같이 가.”

 “위험....어, 곤란하지 않을까요?” 브로콜리가 즉각 반론을 제기하고 나 역시 우려를 표했다.

 “동행 여부는 상관없는데, 혹 얼굴이 알려져서 불편한 상황이 생긴다면...”

 “괜찮습니다.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 쓰고 잘 돌아다녀요. 그리고 나는 일반인이잖아요.”

 “잘도 ‘일반인’이시겠어.”

 해원의 목소리는 섬뜩할 만큼 차가웠고 공은 웃었다.

 “이미 결정했어. 장원 씨, 이 프로젝트에 나도 끼어들고 싶습니다.”

 “그럼 저도 낄래요!” 브로콜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오늘 제 이야기도 책에 써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도움이 될 거리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멍하니 브로콜리와, 공과, 해원의 얼굴을 차례대로 돌아보았다. 목 사장은 우리의 대화에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한 자세로 거실에서 혼자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 중에 의뢰인이나 책 도둑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일단은 모두가 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만약 책 제목을 내가 붙이게 된다면 ‘회인 원정대’가 어떨지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 커피와 어제 남은 빵으로 아침을 먹고 사람을 셋이나 주렁주렁 달고 나왔다. 이 징조를 행운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불운으로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회인 원정대는 다소 가라앉은 분위기로 출발했다. 날씨부터 구름 가득한 하늘에 햇빛 한 줄 없이 어둑했고 차가 출발하자마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조수석에 앉은 해원은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놓은 표정이었고 브로콜리는 지금 이 상황이 흥미롭지만 그 흥미를 표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초조함을 담아 자신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공이 원정대 중에서 가장 신이 나 보였다. 브로콜리와 자신의 출연작들 감상을 나누고 나와 오늘 행선지를 의논했다. 해원과는 직접적으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카페에서 주문할 때 공이 “제가 삽니다.”하고 나서면 해원은 공을 보지도 않고 카드를 내밀어 계산해 버리는 식이었다. 샷이 네 개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는 해원 뒤에서 큰 소리로 “카페인 과다는 위장에 안 좋지?”하면 해원은 사장을 향해 “죄송하지만 한 샷 더 추가할게요.”를 외쳤다.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모슬포항과 대정읍을 지나 금능과 협재 바다 앞에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카페와 책방들을 방문했다. 첫 날 혼자서 제주 동쪽 회인로드 탐방 때와 상황은 비슷했다. 장소가 아예 없어지거나 사장이 바뀌었거나 회인의 책이 사라진 상태였다. 차귀도 포구 앞 카페와 금능의 책방 사장이 해원을 알아보았다. 차귀도 카페 사장은 비슷한 수법으로 회인의 책을 분실했다. 카페 서가에 둔 책이 어느 순간 검은 무지 노트로 바뀌어 있었다. 금능의 책방은 사장이 잠시 육지에 볼일을 보러 떠난 사이 책방을 지키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책을 팔았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끼고 벙거지 모자를 쓴 사람이었다고 묘사하며 사장은 공을 슬쩍 바라보았다.

 “키는 이 정도 됐을 것 같다고...여기 저는 손이 안 닿는 제일 윗칸에 꽂아 둔 그 책을 단번에 뽑아들었다고 했으니까?”

 “남자였을까요?”

 “알바생이 처음에는 남자라고 하다가, 가만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여자 같았다고 하더라고요. 책방에 들어오자마자 책을 꺼내 계산해 달라고 할 때 목소리를 들었다는데, 그때 책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모습에 신경 쓰느라 인상착의를 자세히 볼 틈이 없었다고.”

 사장은 책이 꽂혀 있었던 선반을 올려다보고는 갑자기 해원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요, 회인 씨. 작가님 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해서.”

 회인이라 불린 해원은 웃으며 잡힌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괜찮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잖아요, 그건?”

 “그러니까요! 그 책이 방송에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공이 참 멍청한 배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눈은 제대로 박혀 있네요. 회인 씨 책을 알아보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공 방향으로 돌아갔다. 자그마한 책방 내부는 모든 대화가 필연적으로 공유되었고 공은 서가의 책을 훑어보며 자신의 앞담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게 자기 능력이겠어요? 대중들 앞에서 있어 보이려는 연약한 허영심의 발로라고 해야죠.”

 해원이 활짝 웃으며 말하고 이번엔 브로콜리가 불안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공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선글라스와 마스크 안쪽으로 숨겨진 표정은 알 수 없었다.

 책방을 나오자마자 브로콜리는 해원에게 바짝 붙어 속삭였다.

 “조금 말하시는 정도가 심하신 것 아닐까요?”

 “어떤 부분에서요?” 우산을 펼치며 해원은 무심히 답했다. 브로콜리는 주변에 우리 이외의 사람이 있는지 재빠르게 살폈다.

 “당사자가 가까이 있는데 다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부정적인 말을 하면...”

 “들으라고 한 말이에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사라, 아니 사람 씨. 이제껏 받아먹은 악플에 비하면 이 정도는 샷 하나만 넣은 아메리카노 정도의 쓴 맛인데요.” 공이 브로콜리의 어깨를 감싸고는 자신의 우산 안으로 끌어들였다. 나는 해원과 같은 우산을 썼다. 

 “어제 공 배우님과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말 안 해 주실 거죠?”

 “죄송해요. 아마 말할 기회가 생기긴 할 거 같은데,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그리고 일단 우리 점심 먹어야지 않아요?”

 우리는 책방에서 멀지 않은 금능 바다 앞 카페로 향했다. 해원이 회인으로 방문했던 카페 중 하나였고 그때는 손님 열 명이 다 들어올 수 없을 정도의 자그마한 곳이었다. 지금은 3층까지 이어진 대형 카페로 바뀌어 수제 햄버거와 딱새우 파스타가 유명하다고 했다. 우리는 창가 자리를 잡고 각자 메뉴를 주문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로 말없이 각자의 일에 열중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해원은 책방에서 산 책을 읽고 맞은편에 앉은 공은 창밖으로 탁 트인 제주 바다를 응시했다. 우리가 카페 도착할 때쯤 비는 더욱 거세져 하늘과 바다 양쪽 모두 잿빛으로 무거워졌다. 브로콜리는 공의 시선을 따라 경계가 사라진 잿빛 배경 한가운데 찍힌 점 같은 비양도를 보고 있다. 나는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마저 읽고 싶었지만 혹시 모를 돌발 상황에 대비하여 숙소에 두고 왔다. 대신 책방에서 산 신형철의 『몰락의 에티카』를 꺼냈다. 표지에 실린 두 장의 사진을 손으로 번갈아 쓸어내렸다. 도시 외곽의 폐허 속 버려진 매트리스 위로 기대어 있는 남자의 사진과 텅 빈 창고 같은 어두운 실내 안 핀 조명처럼 떨어지는 햇빛이 비추는 여자의 사진이었다. 두 인물은 성별도 장소도 달랐지만 왜인지 같은 사람처럼 느껴졌다. 푸른 매트리스에 기대어 기도하듯 잠든 남자는 지금 빛 속의 여자를 떠올린다. 혹은 어둠 속 유일한 빛을 만난 여자는 어두운 바깥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그를 기억한다. 그녀가 돌아가야 그는 깨어날 것이다. 완전하게.

 문득 고개를 드니 해원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찰나의 순간 나는 지금 이해받았다는 생각에 어리둥절했고, 뜻밖에 기뻤다. 이 사람은 내 생각을 완벽하게 이해했어, 하늘 아래 잠든 그가 빛 속의 그녀를 꿈꾸고 그녀는 사실 그 자신이라는 진실을, 아니 진리를, 이 사람은 이미 알고 있어.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왜냐하면 우리는...

 음식이 나왔다.

 알 수 없는 기쁨을 애써 억누르며 수제 버거를 신중하게 잘랐다. 칼날 아래 버거는 제멋대로 속에 든 내용물을 뱉어냈다. 빵과 고기와 토마토 조각을 따로 포크로 찍어먹으며 창밖의 바다를 응시했다. 책방 에티카에 붙어 있던 사진 속 바다와 같은 곳, 석양으로 유명한 금능 바다를 바라보던 누군가의 뒷모습, 책방의 주인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왜 못 알아봤지?”

 빵을 자르는 칼과 파스타를 말아올리는 포크와 입술로 향하는 유리잔이 동시에 멈췄다. 내 맞은편에 앉은 브로콜리가 나와 같은 수제 버거를 앞에 두고 입에도 대지 않은 채 바라만 보며 중얼거렸다.

 “왜 주인은 해원 씨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금능에 오기 전 차귀도의 카페에서 나는 공과 브로콜리에게 어제 책방 에티카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했다. 오늘 만난 책방과 카페 사장님들은 해원을 알아보았다. 몇 년이 지나 다른 이름으로 소개해도 같은 사람임을 인지했다. 차귀도의 카페 사장은 공까지 알아보았다. 잠시 긴가민가하다 해원과 해원 뒤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외치는 목소리로 알아차렸다. 해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 단언한 것과 다른 결과였다. 에티카의 주인만이 눈앞에서 말하고 움직이는 해원의 존재를 철저히 해원으로만 인식했다. 

 브로콜리는 자신의 ‘사라짐’ 여행 중에 만났던 주인과 에티카의 주인이 동일 인물임을 알고 흥분했다. 

 “어제도 깜짝 놀랐지만 그러니까 그 분은 정말로 사원을 짓는 일에 성공하신 거군요? 보통 사람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계속 에티카와 주인, 회인과 해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해원은 무심한 투로 브로콜리에게 말했다.

 “오늘 만난 사장님들이 유독 눈썰미가 좋으신 거죠.”

 브로콜리는 해원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 사람, 진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주인이라고 불러 달라면서 회인을 위한 봉헌의 장소를 만들겠다고 선언하면서, 봉헌이라는 단어가 참 아름답지 않냐고, 자기 이름이 봉헌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하시는데, 그 텀블러에 진짜 보드카가 들어 있었는데...”

 어제 에티카에서 손에 들고 있던 텀블러도 술이었을까? 브로콜리의 장광설 속에 나는 퍼뜩 어제의 에티카를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텀블러, 『몰락의 에티카』, 몰스킨, 순서가 다른 필사본, 황혼의 금능, 뒷모습, 왜 그 사진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 걸까?

 “이미지를 사랑하는 거죠.”

 갑작스런 공의 목소리에 나는 현실로 끌려나왔다. 선글라스를 낀 공의 두 눈은 어둠 속에 숨어 있었다.

 “이미지를 사랑하는 건 너무나 쉽거든.”

 은퇴하기까지 수많은 이미지로 살아 온 자가 말하는 사랑의 이론엔 표현하기 어려운 설득력이 깃들어 있었다.

 “물론 쉽다는 말로 사랑을 얕잡아 보는 의도는 아닙니다. 사람 씨, 어제 이야기는 진심으로 감동적이었어요.”

 브로콜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공은 해원을 보았다. 옆에서 본 해원의 표정은 선글라스가 없는데도 읽기 어려웠다. 조금 전 느꼈던 일체감이 전생처럼 느껴졌다.

 “무엇을 사랑하든, 무엇이든 했다는 행위가 중요하지.”

 “넌 너를, 아니 네가 연기한 회인을 위한 사원인지 책방인지를 받아들일 수 있어?”

 “당연하지.” 해원은 즉각 답했다.

 “그가 그 자신만의 회인을 숭배하기로 결심했다면 나는 굳이 훼방을 놓을 이유는 없어. 내가 우려하는 건 다른 부분이야.”

 해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혹시나 해서 사장님들께 따로 물어봤어요. 회인의 책이 분실되기 전후로 기억에 남는 특이한 손님이 있는지, 차귀도 카페는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모자를 쓰고 몇 번 방문했던 손님을 기억하시던데, 확실한 증거라고 하긴 어렵지만.”

 “그렇게 티가 나게 다녔다구요?”

 “그것만으로는 ‘텀블러 소유자’가 책을 훔친 범인임을 특정할 순 없으니까 증언을 좀 더 모은 뒤 다시 에티카에 가 봐야죠.”

 “그 책은 나만 가질 수 있다? 세상에나, 비슷한 영화 있지 않아요?”

 브로콜리의 얼굴에서 흥미로움이라는 파도가 넘실거렸다. 공이 웃으며 브로콜리의 말을 받아 주었다.

 “KBC일일극 <백마 탄 기사>에서 사건 캐다 해고된 기자 역할을 했죠. 거기선 책이 아니라 어떤 화가의 그림이었고. 그 캐릭터는 순수하게 범인이 궁금해서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다닌 것이었고, 넌 단순한 호기심으로 움직이는 건 아닐 테니까. 뭘 원하는 거지?”

 “책을 돌려받아야지.”

 “네 목적은 하나뿐이었어. 그 책이 이 섬에 영원히 머물기를 바라는.”

 “이런 방식은 아니야.”

 해원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가능한 바다와 가까운 장소에 한 권씩, 민들레 씨앗처럼 넓게 퍼져 있기를 바랐어. 특정 장소에 얽혀 있는 건 분명 문제가 있어. 그 사람을 이해하지만 그 행동이 우리에게 피해를 준다면 막아야지.”

 차분하게 이유를 설명하는 해원의 얼굴을 바라보는 공의 입술이 약간 움직였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공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이번엔 공이냐? 해원 다음으로 공의 감정을 이해한 나는 당황했다. 김과도, 엄마와도, 누구와도 제대로 느껴본 적 없던 일체감을 오늘 두 번이나, 그것도 각각 다른 사람에게 느끼고 있었다. 몰디브에서 바닥의 모래 알을 헤아릴 정도로 투명한 바다와 같이 지금 나는 공의 얼굴 아래 넘실대는 것들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감정은 이것이었다. 공이 단언했던, 가장 쉬운 감정.

 내 시선을 감지한 공의 선글라스가 내 쪽을 향했다. 이렇게 된 거 바닥의 모래를 헤집어 더 깊은 곳으로 단번에 파고들기로 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나는 손을 들어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첫째, 회인의 책을 훔친 범인은 누구인가. 둘째, 책이 사라지고 있다고 해원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책의 완성을 희망하는 의뢰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엔 ‘왜?’와 ‘어떻게?’까지 포함되어 있고, 세 개 모두 아주 어렵거나 의외로 아주 단순할 수도 있어요. 세 명이 모두 같은 사람일 경우 사건은 빠르게 해결되겠죠.”

 카페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말소리와 음악소리가 우리의 대화를 가려 주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마음이 있으면 다들 제게 솔직하게 답해주셔야 해요. 일단은 제가 중립국 위치에서 이번 사건을 맡았으니, 사건이라 부르기 좀 어색하지만 도난이나 기타 불법적인 일이 엮인 건 확실하니까요. 일단, 공 씨는 본명이 공자, 성이 목 씨 맞나요?”

 내 기습에 무방비 상태인 공은 속수무책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목천 출신이시죠? 아버지가 유명한...”

 “목 의원입니다. 네, 맞습니다.” 입술을 실룩이며 공이 답했다. 그 입술은 어제 찾아 본 목 의원의 영상 속에서 야당 의원의 질문에 불쾌감을 표출하던 그 입매와 꼭 닮았다.

 “그 의원이 해원 씨의 말에 따르면, 회인의 생물학적 아버지다.”

 공과 해원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다 멈추고 서로를 보았다. 브로콜리가 헉 소리를 내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아니 그 사람이, 회인이, 그러니까 진짜 있는 사람이, 죄송합니다. 사실 회인을 저는 정말로 지금까지 저는 해원 씨가 만들어 낸 소설 주인공 같은 걸로만 알고 있었어요...”

 해원은 방긋 웃으며 브로콜리를 바라보았다.

 “숨겨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리진 않겠어요.”

 “그럼 배우님은,...만난 적 있어요?”

 “딱 한 번 만난 적 있습니다. 그 전까지 존재는 알고만 있었고.”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언급하는 공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존재가 태어난 게 죄는 아니죠. 하지만 이렇게 받아들이기까지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다음 주자는 공인가, 왜인지 회인과 관련된 사람들이 내게 와서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는 일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의뢰인이 바랐던 점이 이것이었나? 회인에 대한 ‘이야기의 수집’ 그 자체. 

 ‘보고 듣고 알게 된 사실을 가능한 자세히 시간 순에 따라 기술할 것’

 애초에 의뢰인의 목적은 책 완성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출발 전 삼촌에게 던진 질문이 방향을 바꾸어 내게 되돌아왔다. 이 과정 자체가 그 의미인가, 회인과 이해관계가 얽힌 자들의 증언을 끌어내어 회인이라는 인물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

 나는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살폈다. 물음표가 살아 있는 물고기처럼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브로콜리의 얼굴, 입술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의 발언이 가지고 온 반응을 관조하는 공의 얼굴, 낯선 언어로 적힌 책과 같이 해독 불가능한 해원의 얼굴을.

 “안타까울 뿐이야.” 공은 이렇게만 말하고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누가 누구고 정체를 밝히는 건 공무원으로 돌아가서 해 볼까요?”

 옆자리의 시선이 신경 쓰이던 나는 동의했고 우리는 카페를 나섰다.

 오후의 탐문은 특별한 사건 없이 무난하게 흘러갔다. 협재와 한림을 지나면서 누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비가 뚝 그쳤다. 거센 바람이 구름을 기운차게 몰고 가는 곽지과물해변에 잠시 들렀다가 애월까지 남은 카페와 책방을 방문했다. 사람이 바뀌고 장소가 바뀌고 책이 사라진 공백의 ‘회인 로드’에서 우리는 점점 말을 잃었다. 날씨는 개는데 조사는 여전히 흐림이었다.


 애월 책방 자리에 들어선 아이스크림 가게 사장이 공을 알아보았다. 

 “여행 오셨나 봐요!” 사장은 일행을 둘러보며, 특히 해원을 자세히 살피며 공에게 말했다.

 “책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라고, 여기 배우님이 방송에서 낭독도 하고 영화로도 만드셨죠.”

 사장은 책 제목은 처음 들어 본다는 표정이었으나 <공무원 게스트하우스>는 즉각 알아들었다. 

 “그 방송 덕분에 제주도에 온 건데요!” 그는 기쁜 표정으로 <공무원>이 보여 준 제주살이 모습에 매료되어 제주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그 전까지 수학여행으로 딱 한 번 왔던 제주의 이미지는 공항의 야자수, 돼지두루치기를 먹었던 돌 깔린 식당, 천지연 폭포, 성장에 좋다는 말뼈 가루를 강매하던 기념품 가게 등이었다. 방송에서 공과 무와 원은 게스트를 인솔해 성산일출봉의 일출과 협재의 일몰, 용머리 해안의 외계 행성 같은 풍경과 오름의 능선, 애월과 세화의 비현실적인 바다 빛깔을 부지런히 보여 주었다. 그때 그는 이름이 잘 알려진 대기업에 다니면서 퇴사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 두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나? 방송을 본 뒤 그는 애월 바다에 자신의 삶을 띄우기로 결심했다. 

 감사 인사와 함께 서비스로 준 배 모양의 과자 위에 잔뜩 얹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손에 들고 우리는 애월 산책로에 갔다.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우리 네 사람 사이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사진을 찍으며 뛰어다녔다. 5월의 제주는 마냥 걷기만 할 수 없이 발이 간질간질해 뛰어다닐 수밖에 없는 공기다. 공기가 날게 하고 바다가 잡아준다. 가벼우되 너무 높이 날아가 버리지 않게, 살아있음을 잊지 않게, 두 발을 바닥에서 전부 떼어버리고 싶었던 삶의 위기로부터 5월의 제주는 나를 구했다.

 검은 바위 위에 서서 바다를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해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해원이 제주에 남기려 했던 회인의 증거는 관광지 외벽에 새겨진 낙서와 같이 미묘한 불협화음을 유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페와 책방이, 인간이 만든 장소가 지금 발에 딛고 선 현무암 바위만큼이나 오래도록 보존되리라 확신했단 말인가? 에티카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책 절도범의 방해가 없었어도 책들은 하나 둘 사라졌을 것이다. 자신의 소중한 사람을 책으로 기억하려는 행위의 덧없음에 나는 몸을 떨었다. 5월임에도 바닷바람은 칼을 숨기지 않았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요?”

 옆에서 공의 목소리가 내게 질문했다.

 “허무하다, 실패했다, 슬프다, 이런 거?”

 “이미지만으로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하죠. 네.”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내가 질문했다.

 “둘 다 목천에서 자란 거죠?”

 “셋 다, 걔를 빼놓고 이야기는 성립할 수 없어요.”

 “제가 본 이미지는 이래요. 해원 씨는 이상을 추구하는 순정파, 공 씨는 이를 방해하려는 사연 많은 악당.”

 공이 껄껄 웃었다.

 “순정파 역할도 악당도 둘 다 해 봤어요. 순정파 연기할 때와 악당 역 했을 때 보도되는 기사 타이틀이 완전 달라지는 거 알아요? 국민 남친, 국민 남동생부터 사이코패스로 확실시되는 연예인 1위까지 다 섭렵해 봤으니까.”

 “배우는 힘든 일이에요.”

 “그 힘든 일을 참 잘 했죠.”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웃음 속에서 공과 나는 다시 한 번 연결되었다. 직접 만난 공은 방송에서 본 이미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서글서글하고 붙임성 있으며 무엇보다 대화를 피하지 않았다.

 “내가 맡은 배역들이 어느 날 나를 찾아오면 어떨까 상상한 적 있어요. 고아 역할이었던 첫 아역부터 국민 사위, 희대의 사이코패스, 좀비 역도 했네, 내가 연기한 다른 내가 나를 찾아오면 무슨 말을 할까? 그들은 나면서 내가 아니고 또 나니까요. 이건 나만의 상상이라고 생각했어요. 누가 이미 내 상상을 쓴 글을 읽기 전까진.”

 공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퍼즐을 찾아 나는 이야기의 빈 곳을 맞춰나갔다.

 “원고를 해원 씨에게 넘겨준 사람이 그쪽이군요?”

 텅 빈 소 목수의 공방에서 회장이 해원에게 전달한 회인의 유품, 그 원고의 1차 전달자가 지금 내 옆에서 웃고 있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오로지 나만의 생각이라고 생각한 생각을 누군가 이미 했다는 것, 그게 나와 절반은 닮은 사람이고.”

 해원이 뒤를 돌아보았다. 처음부터 우리가 서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듯 평온한 얼굴로.

 “이제 돌아갈까?”

 다시 서귀포로 향하는 차 안에서 뒷자리에 브로콜리와 해원이 앉고 공이 조수석에 앉았다. 애월에서 사계리까지 한 시간 넘게 걸렸고 뒷자리의 둘은 잠이 들었다. 공은 목천에서 해원을 만나고 회인을 만났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전부 녹음해 두어 다행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정리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공무원에 뜻밖의 손님이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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