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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공자는 알고 있다

공의 이야기

 공자는 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안다. 공자의 집안은 사랑을 타고났다. 다른 이들보다 피 속에 몇 배의 짙은 사랑을 가지고 태어났다. 공자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게 좋기만 한 건 줄 알았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가득했다. 또렷한 이목구비에 웃으면 활짝 열리는 커다란 입과 서글서글한 호감형의 외모는 선거 포스터를 영화 포스터처럼 보이게 했다. 중저음의 목소리는 발화자의 신뢰감을 더하고 지적인 이미지를 입혔다. 아버지도 모두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목천 시민 여러분,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사랑하는, 사랑하는. 아버지는 사랑했다. 아내를 사랑했고 공자의 형과 공자를 사랑했고 하나뿐인 여동생을 사랑했다. 첼로를 전공하고 4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아내를 사랑했고 미국에서 자신과 같은 하버드에 합격한 큰아들을 사랑했고 아역 때부터 주연을 도맡은 작은아들을 사랑했다. 바쁜 자신을 대신해 올케와 조카들을 흠잡을 데 없이 돌보는 여동생을 사랑했다. 

 공자를 사랑하는 사람들도 도처에 가득했다. 아버지가 물려 준 외모와 목소리는 사춘기와 변성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매력이 배가 되었다. 국민들은 어린이 영양제 광고 속에서 꽂게 춤을 추며 CM송을 열창하는 공자와 즉각 사랑에 빠졌다. 일일드라마에서 가난한 5형제의 막내아들을 연기하는 공자에게 ‘국민’칭호를 수여했다. 공자가 출연한 영화는 무조건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모두가 공자를 사랑했다.

 공자가 사랑을 의심하게 된 건 그 애 때문이었다. 공자는 고모의 절친이라는 소 목수를 이모라 부르며 알고 지냈다. 공자가 18살이 된 그 해 겨울 신인배우 등용문이라는 <학원>시리즈에 캐스팅되어 바쁘게 촬영했다. 간신히 얻어낸 하루 쉬는 날 목천에 온 공자에게 이모가 해원을 소개해 주었다.

 “이름은 해원이다.”

 이모는 이름만 알려준 뒤 고모와 함께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들은 멀뚱히 공방 앞에서 마주보았다. 해원은 의자에 앉아 있고 공자는 그 앞에 서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공자였다.

 “나랑 동갑이라며?”

 공자는 잠시 기다렸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너 나 알지?”

 침묵이 길어질수록 공자는 어쩔 줄을 몰랐다. 자신이 먼저 질문했는데 대답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해원은 공자의 두 눈을 뚫어질 것처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사람 역시 처음이었다. 

 “진짜 닮았네.”

 공자가 공방 앞 손님용 벤치에 앉았다가 일어났다가 머리를 쓸어 올렸다가 팔짱을 꼈다가 포기하고 뒤돌아서려는 찰나 해원이 말했다. 

 “우리 아빠? 나보다는 형이 더 닮았...”

 “그 사람 말고.”

 공자는 감히 자신의 아버지를 ‘그 사람’이라 칭하는 사람 역시 처음이었다. 해원은 거침이 없었다.

 “궁금하면 정오에 목천천으로 나와.”

 “언제?”

 “날짜는 정할 수 없어.”

 “나는 내일 드라마 녹화가...”

 “알고 싶어?”

 자신의 말을 끊는 사람도 처음이었다. 공자는 수많은 처음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해원의 커다란 눈이, 짙은 녹색의 눈동자가 공자에게 묻고 있었다. 네가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고모는 해원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들려주었다. 그의 부모는 해원이 돌도 되기 전에 사망했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보육원에 맡겨졌고 소 목수가 2년 전에 데리고 왔다. 

 “왜 이제야 소개해 줘요?”

 “둘이 알고 지냈으면 좋겠대.”

 “아무나 친한 타입은 아닌 거 같은데.”

 신호등 앞에 정차한 틈에 고모는 손을 뻗어 공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쁜 거 지나가면 자리 좀 만들자.”

 “생각해 볼게요.”

 바쁜 것과 함께 겨울이 지나갔다. 겨울이 다 가도록 목천에 갈 틈도 없이 바빴다. 공자가 목천천에 가게 된 건 날이 풀리고 목천의 목련이 하나 둘 피어나고 총선 선거를 앞둔 봄이었다. 공자의 아버지가 재선되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었고 시내는 온통 목 후보의 유세 차량으로 꽉 차 있었다. 공자는 고모와 함께 목천 공원 중앙 광장에 설치된 무대 위에서 아버지가 유세 연설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사랑하는 목천 시민 여러분.”

 첫 마디부터 아버지의 입에서 사랑이 튀어나왔다. 공자는 아버지가 공원에 모인 사람들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다짐하는지 구체적인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말하는지 헤아리는 일에 집중했다. 10분 간 이어진 유세 연설 속 25번 언급된 사랑은 셀 틈 없이 무수했다.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발화된 아버지의 사랑은 그토록 가벼웠다. 

 문득 고개를 드니 고모가 공자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빤히 보고 있었다. 

 “왜요?”

 “그건 내가 묻고 싶다.” 

 “아버지 연설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고.”

 “지금 표정이 연기가 아니라면 조심해야겠는데.”

 “이상해요?”

 “송강호 표정인데,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

 공자는 하마터면 큰 소리로 웃을 뻔했다. 주변에 사람이 이렇게 많고 공자는 마스크도 선글라스도 쓰지 않았는데. 

 “묵직한 분인 줄로만 알았어요.”

 “묵직하다는 말도 할 줄 알고, 너 배우 맞구나.”

 “어머니는...”하며 입을 떼던 공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형을 따라 미국으로 간 공자의 어머니는 형이 귀국한 뒤로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가 왜 한국으로, 목천으로 돌아오지 않는지 공자는 알게 되었다. 서울로 공자를 만나러 찾아온 형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너도 이제는 알아야 한다면서. 

 막연한 추측이 확실한 사실로 못박히는 순간 공자는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었고 포기할 수 없었다. 촬영 중인 드라마는 대박 중에 대박을 쳤고 공자는 다음 스케줄로 향하는 벤 안에서 쪽잠을 자며 일에 몰입함으로써 자신의 충격을 숨겼다.

 공자가 삼킨 말을 고모가 이었다.

 올케는 목천에 안 와, 못 와, 그 애가 있는데 어떻게 와, 네 아버지가, 오빠가 사랑한 사람이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살기 편하지, 나머지는 지금 저 연설처럼 의례적인 표현이라고, 의례적으로 만난 여자들이 내가 아는 것만 몇 명일까, 셀 수는 있을까, 너는 다 알 필요는 없고 한 명만 기억해, 이 도시를 죽을 때까지 떠날 수 없는 그 애는 네가 알아야 해, 네가 학교도 다니고 연기도 하고 사람 구실 할 때 사람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존재를 알고 있어야 해, 나는 뭐 잘났다고 이런 걸 말 하나 하겠지, 이건 변명이다, 너도 가지고 나도 가졌고 네 아버지도 가진 공통의 피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피는 운명이고 운명은 피할 수 없으니까, 너도 아버지와 같이 무수한 사랑을 낭비하거나, 나와 같이 단 하나의 사랑만을 고수하거나, 중간은 없으니까, 네가 가질 수 있는 사랑은 수백 개 혹은 단 하나일 뿐이니까, 너는 내가 미친 소리를 한다고 생각할까?

 고모는 목련처럼 크고 흰 미소를 공자에게 건넸다.

 공자는 고모의 미소를 뿌리치고 달렸다. 무작정 달렸다. 선거운동원들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당신뿐이야, 오직 당신뿐이야, 사람들은 ‘당신’에 아버지의 이름을 넣고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다. 춤추는 손들이 공자를 가로막았다. 너는 나뿐이야, 오직 나뿐이야! 공자는 손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닥치는 대로 달렸다.

 광장을 빠져나오자 한산한 산책로가 무질서하게 엉켜 있는 공원이 나타났다. 공자는 산책로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걸었다. 공원 도처에 목련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다. 머리 꼭대기에서 태양이 공자를 비웃었다. 너도 결국 별 게 아냐, 이 꽃잎처럼 바닥에 떨어지면 갈변할 사랑에 집착했으니까, 내가 언제? 지금도 너는 보이지 않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연기하는 중이니까, 공자는 땅에 떨어진 목련 꽃잎을 발로 찼다. 혓바닥처럼 미끄덩거리는 그것들은 촉감도 변해버린 색깔도 오직 불쾌감만 유발했다.

 그냥 다 죽어 버려.

 폭탄이나 떨어져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다 사라져 버려.

 공자는 모든 인간이 다 사라져 버리고 홀로 남아 묵묵히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정체불명의 폭탄이 인간과 세상의 색깔을 모두 소멸시킨다. 단 한 명만을 제외하고. 새빨간 스웨터를 입고 검은 선글라스를 낀 그는 하얗게 질려버린 세상을 유유히 배회한다. 이 세상의 끝을 아는 유일한 존재인 그는...

 네가 정말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해?

 공자는 우뚝 멈췄다. 이번에 끼어든 목소리는 태양도, 상상 속 공자도 아닌 해원이었다. 공방 앞에서 처음 만난 뒤로 공자는 해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촬영 컷과 컷 사이에, 차 안에서 대기 중에, 매니저와 대화하다가, 드라마 종방연 기자회견 중에 해원은 불쑥 끼어들었다. 알고 싶어? 정오에 목천천으로, 진짜 닮았네. 자신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그 눈빛은 공자가 눈을 감으면 눈꺼풀 안쪽에서 반복 재생되었고 공자는 가능한 자주 눈을 감았다.

 문득 공자는 고개를 들어 머리 위 태양을 보았고, 자신이 서 있는 공원의 위치를 확인했다. 광장에서 서쪽 방향으로 가는 중이었고 목천천은 광장의 동쪽 방향에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다 광장에 모여 있는지 목천천 시작점에 서 있는 존재는 공자와 못생긴 장승 둘 뿐이었다. 이모의 작품인 장승 옆에 서서 목천천을 바라본 공자는 순간 말을 잃었다. 물이 말라버린 개천은 악취가 심했다. 부패한 내장이 널린 것 같은 진흙 덩어리와 뒤엉킨 쓰레기들로 오염된 목천천은 천을 따라 만개한 목련나무들과 극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아무리 꽃이 아름다워도 이런 냄새나고 더러운 천까지 누가 올까 생각한 공자는 보았다. 그 바닥을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지옥의 밑바닥 같은 그 길 아닌 길을 그들은 레드 카펫을 밟은 것과 같이 가볍고 확신에 찬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인정사정없는 태양조차 두 사람을 비출 때는 한결 누그러진 부드러운 황금빛을 썼다. 웅웅거리는 선거송의 잔여를 제외하면 목천천은 새 한 마리 우는 소리도 없이 고요했다. 다들 말은 필요 없다는 듯 세상은 그들을 침묵으로 감싸안았다.

 공자는 천 윗길 목련나무 뒤에 숨어가며 그들 뒤를 밟았다. 둘 다 머리가 비슷하게 길었고 한쪽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교복을 입지 않은 쪽은 흰 티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삼선 슬리퍼를 신었다. 어깨까지 자란 머리카락은 방치된 빈 집 정원처럼 아무렇게나 자라 고개를 돌릴 때마다 제멋대로 흔들렸다. 교복을 입은 쪽은 이번 겨울 내내 공자의 눈 안쪽에 박힌 얼굴이었다.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눈과 코와 입술이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를 그려내는 얼굴. 

 그들은 소리 없이 앞만 보고 걷다 가끔씩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공자는 해원 옆에 서서 웃고 있는 그 애의 옆얼굴이 깜짝 놀랄 정도로 자신과 닮았음을 인정했다. 마치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스크린 속에서 공자가 연기한 다른 공자가 해원의 손을 잡고 걸어간다. 앞으로, 앞으로, 스크린 저 너머로, 공자가 앉아 있는 곳에서 가장 먼 곳으로. 

 흰 티셔츠와 흰 블라우스는 특징 없는 옷이지만 저들이 입으니 옷이라는 개념의 이상을 구현한 것처럼 보였다. 손을 잡고 걷는 이 둘은 사랑의 이상향이었다. 저 광장에서 하염없이 뿌려대는 속 빈 사랑이 아닌, 아무리 쪼개도 빈 공간 따윈 찾아볼 수 없는 깊은 밀도의 사랑.

 공자는 가까이 가고 싶었고 말을 걸고 싶었다. 공자는 다가가고 싶지 않았고 말 한 마디 섞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고결하고 더러웠으며 우아했고 비천한 존재였다. 존재 자체가 배신이었다. 공자가 오랫동안 믿어 온 가치들의 배신. 그 죄는 공자 혼자서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싶으면 만나러 오라고? 공자는 알고 싶지 않았다.

 눈이 마주쳤다.

 해원의 시선이 공자를 발견하고 멈춰 섰다. 옆에 선 그 애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향했다. 

 “늦겠다.”

 공자의 뒤에서 고모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모가 탄 차가 공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탔다. 차는 빠르게 목천천을 벗어나 아버지와의 약속장소로 향했다. 고모는 공자가 목천천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묻지 않았다. 질문은 공자가 했다. 

 “고모는 이모랑 무슨 사이야?”

 “친구지.”

 “그게?”

 공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그게?’는 공자가 의도한 것보다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그게?  를 뱉은 당사자는 놀라 이어서 할 말을 까먹었고 그게? 를 받은 상대는 덤덤한 얼굴로 운전에 집중하는 척 했다. 

 “나는 네가 그 애랑 친구가 되면 좋을 거라 생각한다.”

 “누구.”

 “해원이.”

 “그럼 걔는...이름이 뭐지?”

 “없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고모는 출생신고가 안 된 인간이 겪어야 하는 일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법적으로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인간은 사회적인 의미의 사람이 될 수 없다. 목천천과 궁전빌라 주변의 목천 주민들은 그 애의 존재를 보고도 보지 않은 척 했고 정오의 산책 시간에 목천천 주변을 피했다. 그 애를 챙기는 건 고모와 이모, 해원뿐인 것 같았다. 

 공자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목천천에 다시 가지 않았다. 

 영화 두 개와 미니시리즈 하나를 촬영하는 동안 공자는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 진학을 하지 않겠다는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다. 아버지는 압도적인 표 차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와 니스를 오가며 지냈다. 고모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이모 매니지먼트에 바빴다. 해원은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했다고 했다. 

 해원에게서 연락이 먼저 온 적 있었다. 이번에 개봉한 영화 잘 보았고 바쁘지 않다면 목천에서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문자였다. 공자는 그 문자를 띄어쓰기 하나까지 몽땅 외웠고 답장하지 않았다. 행간에 숨은 의도를 읽어버렸기 때문에. 공자는 그 애를, 특히 해원과 함께 셋이서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절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공자는 해원이 그 애와 만나게 하려는 의도를 알 것 같았다. 그 애가 처한 불합리한 상황을 공자가 카메라 앞에서 발언해 주기를, 자신의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을 폭로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네가 이제 알게 된 것을 말해, 네 영향력 있는 목소리로 커다랗게 말해, 네 양심이 이끄는 대로. 양심이 동정에 호소하자 공자는 비웃고 싶었다. 내가 왜? 나는 그럴 의무가 없어. 나는 동정할 위치도 아냐, 나는 네 존재 때문에 피해를 받고 있다고. 내 가족은 조각났고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만날 수 없게 되었어, 너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 안 곳곳을 돌아다니다 거실의 테이블과 마주쳤다. 이모가 만든 원목 테이블은 크고 웅장하며 그랜드 피아노 같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서울에서 자취할 아파트를 구한 뒤 이모가 선물한 테이블은 이제 주문하고 일 년은 기다려야 할 정도로 유명해졌다. 급격히 몸이 안 좋아진 이모의 작업 속도가 느려진 탓도 있었다. 이모를 닮은 테이블은 이모의 목소리로 공자에게 말을 걸었다.

 그 애를, 만나.

 공자는 응답하지 않았다.

 한 번, 만나기만 해. 

 공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건, 뭐지?

 공자는

 너는 그 애와 만나기를 원해.

 답하지 않고 싶었다.

 다음 날 고모에게서 전화가 왔다. 

 “준비 됐니?”

 오랜만에 연락한 고모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그 애가 사는 주소지만 불러 주었다. 다음 날 공자는 마스크와 모자를 쓰고 광역버스를 타고 목천으로 갔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목천천으로 향했다. 한겨울 목련나무들은 잎을 숨기고 몸을 웅크려 칼바람을 견디고 있었다. 개천은 여기저기가 파헤쳐지고 아무렇게나 놓인 공사 장비들로 어수선했다. 목천천 주변 건물들도 새로 지어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공약 중 하나인 ‘힐링 목천 공원’ 조성을 위해 과거의 흔적들은 삭제되는 중이었다.

 궁전빌라 역시 ‘접근금지’ 리본으로 둘둘 말린 채 철거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앞에서 코트를 입은 고모가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서서 공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원은?”

 “미국으로 보냈지.”

 고모는 전화로 말하지 못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미 한 번 입원했다 돌아온 그 애는 내일 다시 입원할 예정이었다. 해원은 고모가 주선한 해외 프로그램 참가를 위해 잠시 한국을 떠나 있었다. 이모와 그 애가 강력하게 설득했다고 한다. 공자는 해원을 멀리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지만 다른 질문만 던졌다.

 “아버지가 허락하신 거야?”

 고모는 세찬 콧김으로 대신 대답했다.

 “널 몹시 만나고 싶어 해.”

 “왜?”

 이번에도 고모는 말 대신 몸을 돌려 리본을 들어올렸다. 산산조각 난 유리문을 지나 4층으로 올라가는 공자의 발소리가 쿵쿵 울렸다. 녹슨 현관문은 제대로 닫히지 않았고 집 안은 한기로 가득했다. 귀신도 이런 집은 질색하며 도망가겠는데, 공자는 고개를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책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인 거실은 북극 설원 한복판에 웅크린 곰을 연상케 했다. 이모의 작품이었다. 책상 아래 그 애가 히터 옆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웅크리고 있었다.

 “안녕.”

 그 애는 핏줄이 다 드러난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손이 얼음보다 더 차가웠다.

 “동정할까봐 미리 말하는데, 내가 여기서 만나고 싶다고 했어.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거야.”

 “신발 신고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할 참이었는데.”

 “상관없어.”

 책상에 머리를 기대고 공자를 바라보는 그 애의 눈은 비쩍 마른 얼굴 때문에 더 커 보였다. 이불로 감싼 몸은 목천천에서 처음 봤을 때보다 눈에 띄게 살이 빠진 걸 알아볼 수 있었다. 

 공자는 바닥에 아빠다리를 하고 앉았다.

 “방석이라도 줘야 하는데...”

 “나도 상관없어.” 

 바닥은 온통 종이 천지였다. 찢어진 노트, 뭔가 잔뜩 메모된 광고지 뒷면, 프린트된 A4용지들, 공자는 책상 틈에 끼어 있는 아버지의 선거 포스터와 벽에 붙은 공자가 출연한 영화 포스터를 발견하고 부끄러웠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신에게 놀랐다.

 문득 고개를 돌리자 그 애가 공자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많이 닮았네.”

 “너도.”

 “나를 싫어하지?”

 “좋은 쪽은 아닌 것 같다.”

 “사과하고 싶었어.”

 공자는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졌다.

 “태어난 게 네 잘못이라도 되냐?” 

 “내 존재가 많은 결과들을 가지고 왔지, 의도하지 않은 것들.”

 “너나 나나 우린 태어난 죄 같은 거 없어. 좆을 좆대로 놀린 사람 잘못이지. 나 그렇게 쉽게 원망하는 사람 아니야.”

 물론 공자는 그 애를 원망했다. 그 애가 아니었다면 평범하게 누렸을 것들을 그리워했다. 어느 순간 가족 모두가 다 같이 모여 있는 날이 귀해졌다. 공자의 보호자 역할은 어머니가 아닌 고모가 맡았다. 어머니는 형을 핑계로 아버지를 피했고 목천을 피했다. 공자는 드라마 속 국민 아들 같은 거 말고 그냥 아들이 되고 싶었다. 저 애가 내게서 빼앗아간 것들, 특히 해원을, 모두 돌려받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공자는 떠올렸다. 봄이면 이 도시를 가득 채우는 목련을, 공자의 피 속에서 만개한 그 꽃을, 저 애 몸에도 흐를 피를, 서로가 이어져 있는 핏줄의 뿌리를, 위풍당당하게 피어나 검게 썩어가며 흉하게 죽어가는 그 꽃에게서 공자도 그 애도 도망칠 순 없었다. 

 공자는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왜 보고 싶어 했는지 용건을 말해 주겠니? 엉덩이가 냉동육으로 변해 가고 있으니까.”

 “내 옆에 두 번째 서랍을 열어서 안에 든 걸 꺼내 줘.”

 서랍 안엔 검은 표지의 노트가 일곱 권이 들어 있었다. 볼펜으로 쓴 글들은 두 종류의 필체로 노트를 채우고 있었다. 

 “해원과 내가 지금까지 썼던 글 중 완성된 것들을 모았어.”

 “...나보고 읽어 보라고?”

 내가 죽으면 내 물건은 아마 다 태워지겠지. 목 회장님도 손쓸 틈 없이. 

 “내일 병원에 가면...”

 “이걸 해원에게 전해 줘.”

 “내가 네 말을 들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지?”

 공자의 말에 그 애는 미소 지었다. 너무나 익숙한, 얼굴의 모든 근육을 활짝 펼치며 세상만사를 다 안다는 그 미소, 공자의 미소, 고모의 미소, 그 앞에서 공자는 그 애 말대로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그 애는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다는 걸 예감했다. 

 “해원과 함께 책을 만들어 보려 했어.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 우리를 확신하는 이야기, 해원이 책을 완성할 거야. 그리고 그 책은 제주도에 가게 될 거야.”

 공자는 자신의 영화 포스터 옆에 붙어 있는 커다란 제주도 여행 지도를 이제야 발견했다. 

 “왜 제주도지?”

 “내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니까.”

 여권을 만들 수 없는 그 애는 해원과 함께 제주에 가는 상상을 했다. 캐리어에 그들이 만든 책을 챙겨 넣고 무작정 걷는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바다가 나오는 섬에 가고 싶었다고, 바다를 보고 싶었다고 그 애는 몸을 떨며 말했다. 히터로 막지 못한 추위가 그 애를 덮쳤다. 입김이 새어나오며 입술과 인중에 이슬이 맺혔다. 이불깃으로 입을 닦으며 그 애는 말했다. 

 “우리의 책이 유명해지기를 바라.”

 바람이 반쯤 썩어 문드러진 방문을 잡고 흔들었다. 무기력한 문들이 겨울바람을 만나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공자는 그 애가 부탁하는 말을 듣고 머릿속에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저 문소리라고, 문이 덜컹이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 애의 계획은 예상보다 훨씬 구체적이었다. 줄지어 영화와 드라마에 캐스팅되는 공자에게 홍보를 핑계로 예능에 나갈 확률은 매우 높았다. 존재조차 알지 못할 책을 유명하게 만드는 방법, 그건 유명 연예인이 방송에서 책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호기심에 검색할 것이고 구하기 까다로운 책이라는 걸 알게 되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다. 구하기 어려운 것을 구하라, 누구보다 빠르게!

 “그 책이 유명해지면, 쉽게 사라지기 어려울 거고, 가능한 많은 이들이 읽을 수 있겠지.”

 “이게 뭔데?”

 폭발물을 보는 눈으로 공자는 노트들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에 대한 폭로문인가?

 “소설.”

 “소설?”

 “내가....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하는 소설.”

 그 우리가 해원과 이 애라는 사실이 공자에게 추위보다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불쑥 공자는 말했다.

 “그럼 우리는 뭐지?”

 온 몸이 얼어붙어 감각이 없었다. 오직 노트를 움켜 쥔 손가락과 그 애를 바라보는 두 눈만이 느껴졌다. 그 애는 공자를 보는 내내 미소를 띤 얼굴로 작고 확고한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친구로 기억해 줘.”

 노트를 챙겨 빌라를 나오면서 공자는 지금 이 기분을 명확하게 정의하고 싶었다. 배다른 형제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나 생각지도 못한 부탁을 받고 폐허나 다름없는 집에서 걸어 나오는 기분을 뭐라고 하나? 다시 만나지 않으리라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공자는 알았다. 알 수밖에 없었다. 공자는 이딴 사실은 알고 싶지 않았다. 다른 걸 알고 싶었다. 지금 온 몸을 덮친 감정의 정체 같은. 하지만 공자는 자신의 감정을 손에 쥐고 자세히 바라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주어진 배역에게 부여된 감정을 연기하는 일에 능숙한 공자였지만 자기 자신의 감정을 직접 서술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빌라 앞에서 고모는 공자를 차에 태워 떠났다. 서울의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공자는 노트 중 하나를 꺼내 펼쳤다.




<당신만의 드라마>     


 그들은 냉장고 문을 열고 침입했다. 

 호텔에서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문을 열어주는 직원을 처음 본 여덟 살의 나는 마법의 장갑을 끼고 문을 열면 사막이나 바다, 정글 혹은 우주로 통한다는 상상을 즐겨했다. 

 그들이 선택한 문은 냉장고였다.

 공기가 달라진 느낌에 눈을 뜨자 일곱 명의 불청객들이 내 침대를 둘러싸고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열네 개의 눈동자, 아니 열세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나를 내려다보았다. 안대를 하고 나와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자가 인사했다.

 “좋은 꿈 꿨어?”

 잠에서 덜 깬 나는 무의식중에 대답했다.

 “어제 꿈속에서 인체 실험 공개방송에 방청객으로 갔는데...”

 순식간에 내 입이 틀어 막히고 손들이 내 몸을 이불로 멍석말이하듯 둘둘 말았다. 인간 김밥을 만든 일곱 명의 낯선 자들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일곱 명의 나다. 

 조금씩 외모가 다르고 옷이나 머리 스타일이 제각각이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들 모두 나라는 사실을. 

 그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안대 낀 내가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우리가 누군지는 눈치를 챘겠지? 네가 나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대 옆의 해골 그림이 박힌 검은 후드 티를 입은 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평생 이 날만을 기다렸어.”

 목소리 가득한 살기에 나는 막힌 입을 스스로 막았다. 안대와 해골을 제외한 나머지 나는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내고, 원룸을 둘러보고, 내 스마트폰의 페이스 아이디를 해제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내가 다가와 내 귀를 잡아당겼다. 

 “얘가 지금 또 이상한 상상하면 새 희생자가 생길 거 아냐.”

 그새 맥주 두 캔을 해치운 다른 내가 대답했다.

 “계속 말을 시켜.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질문을 해.”

 검은 장갑은 거칠게 내 입마개를 벗겼다.

 “내가 누군지는 알아보겠어?”

 “... 부산 힐튼호텔, 할아버지 칠순 잔치 기념 가족여행 때요.”

 “말 편하게 해. 우리끼리 어색하게.”

 “문을 연 게 당신이지?”

 머리카락이 바닥을 쓸고 벽을 휘감는 중인 다른 내가 다가와 자기는 누구인지 맞춰 보라 말했다. 머리카락을 뻗어 손처럼 맥주를 받아 드는 모습이 내 기억을 되살렸다. <라푼젤>에 심취해 있을 당시 미술 수행평가 과제로 그린 만화 속 주인공이었다. 내 답에 나는 만족스러워하며 머리카락으로 내 턱과 뺨을 쓰다듬었다. 간지러움에 웃고 싶었지만 눈앞에 선 새로운 나를 본 순간 웃을 수 없었다. 

 얼굴과 온몸이 흉터와 멍으로 얼룩진 내가 나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표정만 보아도 거울 보듯 생각이 다 보여.” 

 붕대로 동여맨 왼손을 뻗어 내 머리에 얹는 나, 좀비 영화에 한창 열광할 때 아무리 죽어도 죽지 않는 인간에 대해 상상했었다. 죽음이 그를 비껴간다면 그 인간은 영원한 삶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죽지 않는 내 뒤에서 음주를 멈추지 않는 나는 대학 새내기 환영회가 끝나고 막차 버스에서 구토를 억누르며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 않는 능력을 꿈꿀 때의 나. 그 옆에서 나를 귀신 보듯 살벌한 눈으로 째려보는 나는 과거에 잠깐 인터넷 소설 카페에 연재했던 죽은 자를 보는 주인공일 것이다. 저 후드 티에 프린팅 된 해골을 묘사했던 내 조악한 문장이 떠올라 눈을 내리깔았다. 

 대장인 안대 낀 나와 내 오른손을 더듬는 긴 손가락의 나는 누구지?

 검은 장갑이 내 손바닥을 꽉 잡아 펼치고 그 위로 긴 손가락이 한 글자씩 글씨를 썼다.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너는 얘 덕에 목숨은 건진 줄 알아야 해. 우리 모두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문신을 받았다고.”

 해골 후드 티가 험악한 어조로 말했다. 머리카락이 나를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명령이 아니어도 우리는 너를 죽일 수 없어. 나는 나를 사랑하니까.”

 “그래, 지독하게 사랑하지.” 죽지 않는 내가 잔뜩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정면으로 마주 보고 앉은 안대 낀 나를 시작으로 일곱 명의 내가 나를 빈틈없이 둘러쌌다.

 “너를 계속 지켜봤어. 네가 준 이 눈으로.” 

 안대를 벗자 황금빛 눈동자 하나가 나를 응시했다. 

 “평행우주를 향한 동경, 분화된 우주의 모든 나를 보고 싶다는 소망, 나는 너를 이해해. 네가 상상했던 모든 나를 다 지켜봤으니까. 그것 때문에 몇 번 정신병원에 감금될 위기도 있었지만.”

 안대를 고쳐 쓴 내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상상은 자유고 상상력은 신이 인간에게 준 신의 힘이다, 너는 생각했지. 또 다른 나를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다만 너를 포함해 대부분의 인간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내가 다른 나를 상상하는 순간 우주는 분화되고 또 다른 나를 품은 새로운 세계가 실제로 탄생한다는 것.”

 우리 중 가장 손가락이 긴 내가 내 손목을 어루만졌다. 해골 뼈가 닿는 것 같은 서늘함.

 “우리는 우리의 근원을 만나러 왔어.”

 “왜?” 나는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왜? 를 질문할 시기는 이미 지났지.” 죽지 않는 내가 말했다.

 “우리는 나 자신에게 만족하는 쪽 대표.” 머리카락과 취하지 않는 내가 동시에 말했다. 

 “술을 잘 마시니까 승진이 빠르더라고.”

 “네 상상이 꼭 나쁘다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자원했어.” 

 몇몇은 웃고 몇몇은 웃지 않았다. 나는 웃지 못했다.

 “나는... 내가 몇 명이나 존재하는 걸까? 미안해. 생각하면서 생각하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상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1024명.” 검은 장갑의 말에 나는 경악했다.

 “천 명이 넘어?” 

 이제 나를 제외한 모두가 웃었다.

 “2를 열 번 곱하면 나오는 숫자만큼.”

 “나는 생고집 부려가며 이번 원정대 참여했어. 이토록 왕성한 창조력을 보유하신 나만의 작가님 얼굴을 직접 보고 싶었거든.”

 “내가 있어 우주에서 우주 사이 문을 열 수 있었다. 결국 내가, 그러니까 네가 이 상황을 만든 거다.”

 다들 한 마디씩 와글거리는 사이 긴 손가락은 내 책상에서 포스트잇과 펜을 꺼내 필담을 했다.

 ‘상상할 때 어떤 기분이었나?’

 기분이라니! 지루한 수업 시간, 배터리가 3%밖에 남지 않은 지하철 안, 하루의 잃어버린 시간 틈에서 공상과 몽상에 빠질 때 의식적으로 상상하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나는 서서히 억울한 마음이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나를 찾아온 이유를 이해한 척 가장하지 않겠어. 어차피 지금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태니까.”

 나는 긴 손가락의 손을 가볍게 잡으며 말했다.

 “네가 누구인지 기억이 나. 앞자리에 항상 앉던 그 애 등을 보며 ‘너는 나를 사랑한다’는 글씨를 쓰면 현실로 이루어지는 상상을 하며 수업 시간을 보냈지.”

 긴 손가락은 은은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 명이 넘는 나를 일일이 기억할 순 없어. 상상은 자유라고 조금 전에 말했지. 상상은 본능이야. 잠을 자면 꿈을 꾸고 밥을 먹으면 화장실에 가듯이 또 다른 나를 상상하는 건 나의 본능이지 의무가 아니야.”

 모두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말을 할수록 나는 어쩐지 울고 싶었다.

 “사실 지금 기분이 조금 좋기까지 해!”

 이들이 문을 열고 나를 찾아오기 전, 나는 죽지 못해 사는 것과 살지 못해 죽는 것의 어순 차이로 생긴 의미에 대해 골몰하고 있었다. 석 달간 인턴으로 일하던 직장에서 나만 정규직 전환이 되지 못했다. 퇴근 후 잠을 줄여가며 준비했던 공모전은 모두 예선에서 탈락했다. 3년째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인 동생이 용돈을 보내줄 수 있냐는 문자와 혼자 사는 엄마가 어제 화분을 옮기다 손목이 이상하다며 집에 오라는 전화가 동시에 왔다. 

 삶은 내게 주인공이 아닌 조연, 그것도 지나가는 시민 1 정도의 배역만을 강요했다. 그런 내게 사실 넌 천 개가 넘는 우주를 창조한 주요 인물임을 알려주기 위해 일곱 명의 내가 찾아온 것이다. 나의 상상은, 내 존재는 무의미하지 않다고.

 울 것 같은 심정으로 가슴속 말을 토해내다 정신을 차리니 모두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안대를 낀 내가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쌌다.

 “그래, 너는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야. 그걸 알려주기 위해 1024명을 대표해 우리가 찾아왔어.”

 모두가 나를 옆에서 뒤에서 껴안았다. 나는 나의 품속에서 온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리는 것을 느꼈다. 황금빛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는 주인공이니까 반드시 기억해.”

 “무엇을?”

 “우리 모두를.”

 “나를.”

 “우리를 창조한 책임을 망각하지 마.”

 나는 눈을 감았다. 태양처럼 타오르는 눈동자가 망막에 새겨졌다. 

 “우리의 존재를 잊지 마.”     

 이 글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렇구나, 너는 네 피 속의 꽃잎들을 몸 바깥으로 꺼내는 데 성공했구나, 소설이라는 메스로 현실을 갈라 수많은 너를 배출했구나. 공자는 냉장고 문을 열고 들이닥친 그 애를, 자신과 아주 닮은 그림자를 생각했다. 생각하고 생각하는 사이 집에 도착했고 노트는 고모의 차에 두고 내렸다. 수많은 배역을 연기한 공자보다 더 높은 곳에서 1024명의 다른 자아들을 창조하는 데 익숙한 그 애의 유일한 증거품을 고모에게 맡겼다. 

 몇 년 뒤 노트가 책이 되어 공자에게 다시 돌아왔을 때, 공자는 준비되었다. 게스트하우스 잔디밭에 이모가 고모를 위해 만든 벤치에 앉아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펼치며 최대한 감정을 끌어올렸다. 그 애와 해원이 나란히 걸어가던 목천천의 풍경, 그 애를 만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화한 날, 해원이 공자를 처음 본 순간 느낀 감정들을 떠올렸다. 전날 밤 읽고 미리 골라 둔 「화장실 전쟁」을 읽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식적인 공간이 화장실이니까요.’

 그가 폭파시키려는 화장실은 곧 세계다. 가장 가식적인 공간, 그건 이 세계 전체다.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을 쉽게 말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척 미소 짓는 사람들로 가득 찬 세계, 그 앞에서 공자는 폭탄을 던지는 심정으로 책을 읽었다. 

  “정말 이상한 책이지 않습니까? 저도 읽게 만드는 마성의 책, 물론 제 독서량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 방송 중인 것도 잊고 열중하게 만드는 책, 소설이죠, 이 책이 소설이라구요, 컵라면 익는 시간보다 더 빠르게 읽을 수 있는 길이의 단편들이 일곱 편, 그러니까 컵라면을 일곱 개 먹을 수 있는 거죠, 이 책을 읽으면 내 몸 어딘가가 폭발하는 느낌이라는게. 폭탄 선언 하나 해 볼까요? 오늘 제가 읽은 이 책은 제가 영화로 만들 겁니다. 일곱 편 모두.”

 PD는 공자의 낭독 장면을 편집하지 않고 그대로 내보냈다. 반응은 공자가 예상했던 선을 훌쩍 뛰어넘었다. 프로그램이 종영되고 한참이 지나도 회인이라는 이름과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가 공자의 이름과 나란히 실시간검색어에 자주 오르내렸다. 은퇴한 고모의 회사에서 이적한 새 소속사 사장이 재빠르게 움직여 공의 첫 영화감독 데뷔를 기사화하고 투자를 받았다. 

 영화 개봉 전 시사회를 앞둔 공자는 기다렸다. 영화 개봉 첫날 무대인사에서 공자는 기다렸다. 철거된 궁전빌라 자리 앞에서 물이 흐르는 목천천을 바라보며 공자는 기다렸다. 우연히 마주치기를, 단번에 깨닫기를, 이 영화가 만들어져야 했던 진정한 이유를 알아채기를, 네가 오기를 공자는 기다렸다. 

 기다릴 때마다 공자는 회상했다. 사실 공자는 해원과 이모의 공방에서 정식으로 인사하기 전 우연히 마주친 적이 한 번 있었다. 오랜만에 목천의 본가에 온 공자는 편의점에 가려다 길을 잃고 헤매다 아버지가 지은 목천 도서관 앞까지 갔다. 유리로 된 상자를 손으로 마구 구겨 논밭 한가운데 던져놓은 것 같은 건물이었다. 저길 누가 가, 생각하는 순간 해원이 걸어 나왔다. 

 저 애가 나를 봤으면 좋겠다.

 공자는 불쑥 튀어나온 자신의 충동에 놀라 얼어붙었다. 저 애가 나를 보았으면 좋겠다, 말을 걸었으면 좋겠다, 웃었으면 좋겠다, 이름을 알려 주면 좋겠다, 수많은 좋겠다, 가 공자를 꼼짝 못하게 했다. 해원이 공자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거리가 좁혀지면서 공자는 뭐라도 말을 걸어 멈추게 하고 싶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안녕? 나 알지? <그럼에도 가족입니다> 봤지? 지금 들고 있는 책 뭐야? 공자는 대본 없는 현실에서 대화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뼈저리게 느꼈다. 누군가 ‘처음 보는 여자애에게 인사하는 상황’씬이 적힌 대본을 준다면 자신 있게 연기할 수 있을 텐데.

 길에는 공자와 해원뿐이었다. 해원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공자로 향했다. 정류장 표지판을 보듯이, 공자의 뒤편 ‘허락 없이 식물 키우지 마시오’경고판이 세워진 공터를 보듯이 공자를 바라보았다. 

 공자의 눈과 해원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친 순간, 해원은 공자의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자리 잡았다.

 공자는 알고 있다. 이 영화가, 책을 읽은 행위가, 그 애의 부탁을 들어준 건 오로지 해원의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을. 해원이 이를 알아주길 바라지만 공자는 안다. 해원은 공자의 소망을 들어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해원은 공자에게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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