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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사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브로콜리의 이야기

사라질 거면 경치 좋은 곳이 좋지 않겠어?

 사라의 말에 사람은 쉽게 수긍한다. 그치? 아무래도 그렇지? 여기 동네 뒷산보다 지리산 같은 데서 사라지는 게 멋있지, 십 분 걸어 올라가면 정상인 산도 산이라고 교가에 꼭 들어가서는 정기 쪽쪽 다 빨아 먹히는데 그렇지? 사람은 열변을 토했고 사라는 그냥 토했다.

 넌 진짜 말이 많아 문제야.

 사람의 수다스러움은 아버지가 물려 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사람의 아버지는 집에 인터넷 설치를 하러 온 기사가 집으로 직접 담근 김치를 보내줄 정도의 혀를 타고났다. 그 혀로 아버지는 자신의 아이가 왜 사라라는 이름을 가져야 하는지 자신의 아내와 부모를 설득했다. 봐라, 내가 가방끈이 짧아서 대학도 못 갔지만 내 자식만은 박사 되는 거 보고 싶다, 우리 박 씨 집안의 사라, 박사라, 이름이 예언이 되어 아이의 운명을 결정지으리라. 그때 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사라의 할아버지는 버젓이 고추가 달린 손주에게 여자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사실에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아버지의 박사급 혀에 패배했다. 사라가 첫 울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2주 뒤에 허락이 떨어졌고 그때서야 출생신고를 할 수 있었다. 

 진짜 이름이 사라야? 너 혹시 계집애냐? 아버지가 혀와 함께 물려준 이국적인 외모는 성별 구분을 어렵게 만들었고 한 번 파리라도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악성 곱슬머리가 사라의 정체에 수수께끼를 더했다. 사라의 어머니가 사라를 유모차에 태우고 장을 보러 가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딸인데, 딸이네, 딸이죠? 확신에 차 물었고 목욕탕에서 방심한 아주머니들의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세상에나, 저게 뭐여? 

 사람은 저것이라 부르며 가리키는 손가락이 싫었다. ‘저것’을 유발한 자신의 이름이 싫었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은 자신이 박사가 될 수 없는 재목임을 스스로 깨달았다. 다른 애들이 동화책을 혼자 읽을 때 사라는 기역과 니은을 거꾸로 썼고 친구들이 구구단을 외우는 옆에서 1더하기 1이 왜 2인지를 배워야 했다. 고등학생이 된 사람은 교복 가슴에 다는 플라스틱 명찰의 ‘박사라’에 매직으로 크고 단단한 누름돌을 끼웠다. 

 이제부터 제 이름은 사람입니다. 박사람. 

 명찰에 매직으로 새겨진 ㅁ자를 지우기 위해 수많은 매가 거쳐 갔고 매의 ㅁ이 각인되어버렸다. 그래, 너 사람 해라, 인간아, 근데 수업시간에 입 좀 다물어라! 교사들은 사람의 ㅁ보다 지치지 않는 입에 진절머리를 냈다. 아버지가 물려준 혀에 충실하게 사람은 쉬지 않고 말했고 더 많은 매를 벌었다. 

 사람은 아버지에게 지치지 않는 혀를 물려받았지만 설득력 옵션이 빠져버린 불완전한 입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는 예언자 카산드라처럼 사람의 말은 길고 지루한 수다 그 이상이 되지 못했다. 사라와 사람의 이름에 얽힌 일화도 사람이 직접 말하면 재미없는 농담처럼 들렸다. 자기 애 이름을 장난처럼 짓는 아버지가 어디 있어? 아무도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문제의 그 날, 학교 복도에서 매를 맞다 바지를 버려야 했던 사건도 원인을 추적하면 사람의 힘없는 혀에게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동호회에 소속된 아버지와 달리 사람은 친구 없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녔다. 조별활동 시간에 아무도 사람을 끼워주지 않아 멍하니 서서 교사가 중재하기만을 기다리기도 했다. O.N.E.의 음악 덕분에 사람은 불 꺼진 복도 같던 그 시절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친구들이 아이돌 음반을 살 때 사람 혼자 O.N.E.의 CD를 샀다. O.N.E.이 대중에게 각인된 가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등장하기 전부터 사람은 O.N.E.의 음악만 들었다. 동화적이면서 묘하게 직설적인 가사와 밤을 꼬박 샌 뒤 동이 트는 창밖의 푸른빛을 닮은 사운드는 독보적이었다. 사람은 우연히 EBS에서 일요일 밤마다 인디 뮤지션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서 O.N.E.의 노래를 만났다.     


돌을 쌓아

벽돌을 쌓아

많은 마음들이

수많은 ㅁ들이

나를 만들어

사람을 만들어     


 그때 사람은 아직 사라였고 첫 번째 ‘사라짐’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소풍으로 간 놀이공원에서 같이 도시락을 먹을 친구가 없어 혼자 관람차를 탔다. 오이가 들어간 김밥을 꾸역꾸역 넘기며 사람은 이대로 관람차가 하늘 높이 날아올라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세상으로부터 사라지고 싶었다. 사라라는 이름부터가 잘못된 게 아닐까? 태어남부터가 어긋났을까? 존재의 경계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라를 잡아준 건 노래였다. 노래 속 수많은 ㅁ이었다. 남들의 손에 네 벽을 맡기지 마라, 네 스스로 네 벽을 만들어라, 너를 만들어라, O.N.E.의 나른한 목소리가 사람에게 말했다. 사람을 만들어. 사람은 곧이곧대로 그 말을 따랐다.

 명찰에 ㅁ을 더한 순간 사라와 사람이 분리되었고 사라는 사람의 목소리가 되었다.

 근데 O.N.E.은 무슨 이름이지?

 One New E-mail.

 농담이지? 사라가 낄낄대는 소리에 사람은 이어폰을 잠시 뺐다. 

 새로운 이메일처럼 당신에게 노래를 보내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래.

 갖다 붙이면 다 말인 줄 아나. 사라는 사람의 냉소를 가져갔다. 사람이 이제 중간고사 공부 계획을 세워 보자, 하면 사라는 계획만 세우고 지키질 않으면 다 꽝이라고 비꼬았고 반에서 2등을 했을 때 왜 1등은 아껴놨다가 언제 할 거냐 비웃었다. 이런 식으로 전개되는 사라와의 대화 덕분에 사람의 실제 말수가 줄고 차분해지고 고등학교 입학 직전 겨울에 키가 쑥 컸다.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의 인기는 나쁘지 않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책상 서랍에 초콜릿과 빼빼로가 들어 있기도 했다. 사람은 묵묵히 O.N.E.의 노래를 들으며 왜 이름이 사람인지 설명하는 경우에만 입을 열었다. 

 그리고 문제의 그 날 두 번째 ‘사라짐’의 위기가 닥쳤다. 

 사람은 아침에 평소대로 오이냉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엄마가 어제 제사를 지내고 가지고 온 남은 굴전을 두 개 집어먹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십 분 거리였고 사람은 집과 학교 사이를 세 번 왕복했다. 내장까지 배출한 기세로 비틀거리며 교문을 통과했고 문 너머에 지각생들이 손으로 땅을 짚고 있었다. 순순히 엎드린 사람은 복부에 가해진 압박으로 다시 전쟁이 재개되었고 배를 움켜쥐며 벌떡 일어났다. 체육교사가 각목으로 만든 매를 들고 사람을 가리키며 지금 무슨 짓이냐며 으르렁거렸다. 

 “정말 죄송하지만요 선생님, 지금 제가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요 선생님...”

 사람의 혀는 체육교사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체육교사가 몸소 사람을 엎드리게 했고 기다란 매로 사람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세 대를 맞았을 때 사람은 눈을 감았다 떴고 체육교사를 포함한 모두가 자신을 빙 둘러싸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얼얼한 엉덩이의 감각보다 냄새가 더 빨랐다. 

 야, 너 바지 새로 사야겠다. 사라가 구경꾼을 대표해 웃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황한 체육교사의 목소리와 수군거림에 섞인 ‘저것’과 사라의 비웃음 속에서 사람은 결심했다. 조퇴증을 받아 집에서 바지를 빨며 그 결심을 되새겼다. 이번에야말로 사라지기로. 나를 모욕하기만 하는, 나를 믿지 않는 이 세계로부터 깨끗이 사라지기로. 

 지금 당장, 아니 일단 세 달 뒤 O.N.E.의 정규 3집을 감상한 뒤에 사라지자. 그리고 새 앨범이 나왔고 O.N.E.은 SNS로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이 주인공인 서바이벌에 참가하게 되었다는 글을 썼다. 방송은 6개월 간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흥행했고 초대 우승자로 O.N.E.이 뽑혔다. 바로 이어서 <공무원 게스트하우스>가 방영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6월 모의고사였고 아버지는 사람이 박사는 고사하고 무사히 대학만 합격하기를 바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수능을 치고 제대로 사라지자. 

 ‘제대로’ 사라지는 게 어떤 건데?

 뭔가 강렬하고, 기억에 남고, ‘사라짐 서바이벌’에서 당당히 우승할 수 있는...

 사라질 거면 경치 좋은 곳이 좋지 않겠어?

 그래서 사람은 어머니에게 경치 좋은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수십 개의 동호회에 소속된 아버지가 유일하게 가입하지 않은 곳이 산악회인데, 등산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단 둘이서 산에 오르는 취미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사람에게 지리산 노고단의 운해와 설악산의 단풍과 북악산의 바위를 비롯해 수십 가지의 산 목록을 늘어놓다가 제주도 한라산까지 뻗어갔다. 

 “너 수학여행 가서 한라산은 안 갔다고 했지? 겨울에 눈 내린 한라산 설경이 그만이란다.”

 그 자리에서 미리 주는 졸업선물이라며 제주도 행 비행기 표를 예매하는 어머니 앞에서 사람은 차마 사라지기 위해 떠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수능 다음 날 교실에서 장문의 편지를 썼다. 수능이 끝난 고3 교실은 영화관이 되었고 반 학생들이 돌아가면서 USB에 최신 영화를 다운받아 왔다. 친구들이 배우 공의 최신 영화를 보는 동안 사람은 맨 뒷자리에 웅크리고 앉아 편지를 썼다. 편지 속에서 상한 굴전에서 시작된 원망이 장난 같은 자신의 이름까지 뻗어나가자 사라가 투덜거렸다. 

 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냐.

 사람은 사라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영화 속 공이 연기한 배역이 아기 때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향해 답했다. 

 저라는 인간을 낳아 주신 건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라는 사람으로 키우길 포기하신 건 사과 받고 싶습니다. 

 집으로 돌아 온 사람은 편지를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책가방에 옷과 속옷과 O.N.E.의 CD를 챙겼다.  

 한겨울의 제주는 사람이 예상한 것보다 포근했다. 포근한 공기 사이로 몰아치는 칼바람이 방심한 여행객들의 피부를 베고 갔다. 사람은 공항에서 일주버스를 타고 미리 예약해 둔 모슬포의 민박집으로 향했다. 공무원 게스트하우스를 가고 싶었지만 예약할 방법이 아예 막혀 있었다. 제주에서 민박한 지도 7년 차라는 사장 부부는 방송의 힘이 이렇게 크다며 혀를 내둘렀다.

 “지금 두 달째 장기 투숙중인 손님도 거의 매일 공무원에 들락날락하면서, 가까운 데 집을 사고 싶다고 그러시네요? 방송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빠질 정도인가?”

 사람은 사장님 말에 대충 대꾸하며 한라산 입산 방법을 물었다. 백록담까지 간다는 말에 사장은 성판악관리사무소로 가는 버스와 시간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여기 입구에서 김밥이랑 물이랑 필요한 거 준비해서 가야 해요. 도중에 휴게소가 없거든? 12시 반까지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을 해야 정상 입산이 가능하니까 아침 일찍 출발하는 게 좋지.”

 카페를 겸한 민박 공용 공간에서 설명을 듣는 동안 새까만 코트를 입은 긴 머리의 누군가 소리도 없이 들어와 냉장고에서 탄산수를 꺼냈다. 까만 코트를 입은 채로 긴 테이블 끝에 앉은 그는 텀블러에 탄산수를 들이부어 한참을 들이켠 뒤 노트를 꺼내 뭔가를 정신없이 휘갈겼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그의 펜과 함께 흔들거렸다. 한라산 지도를 건네며 사장이 사람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야, 아까 내가 말한 사람.”

 한라산으로 ‘사라짐’ 전날, 사람은 버스를 타고 공무원 게스트하우스로 향했다. 방송에서 활짝 열려 있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O.N.E.이 손님들을 모아놓고 공연하던 잔디밭을 보고 싶었지만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사람이 공무원 주변을 서성거리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와 대문 옆 나무로 된 간판 앞에서 인증샷을 찍었다.

 담벼락 주변을 빙빙 돌던 사람은 공무원 뒤쪽 커다란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있는 까만 코트와 눈이 마주쳤다. 그가 먼저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우리 같은 숙소에서 묵고 있는 거 맞죠?”

 “상당히 일찍 나오셨네요.”

 그는 텀블러에 든 것을 홀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그들은 담벼락 위로 고개를 뺀 게스트하우스 본관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눈에 검은 돌담과 흰 건물의 대비가 커다란 피아노 건반처럼 보였다. 옆에 앉은 이도 까만 코트 안에 새하얀 레이스가 꽃잎처럼 펼쳐진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집을 보러 다니신다고 사장님께서 그러시던데...”

 “네! 저는 사원을 지을 거예요.”

 그가 사람 가까이 바짝 다가앉자 톡 쏘는 냄새가 코를 쳤다. 사람은 텀블러에 든 음료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사원이요?”

 “봉헌의 장소라고 해야겠죠, 제 평생의 주인을 위한.”

 참고로 자신의 이름도 주인이라며 주인은 사람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람이 사람이라 소개하자 주인은 기쁜 듯이 웃었다. 

 “주인은 주인을 찾고 사람은 사람을 찾고?”

 사람은 뭐라 대답할지 알 수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평소라면 뭐라 꼬아 붙일 사라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어머니와 담임 선생님을 제외하고 다른 성별과 대화한 경험이 없다시피 했다. 예식장에 어울릴 옷차림으로 술이 거의 확실한 음료를 아침부터 물처럼 마시는 캐릭터 자체가 잘 파악되지 않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주인은 사람과 비슷하게 장황한 설명을 좋아하는 캐릭터로 보였다.

 “그분은 내 삶에 의미를 부여했어요. 목적이라고 해도 좋아요. 삶의 목적, 삶의 이유, 삶의 빛, 삶의 윤리, 나는 이 근처에 기념비를 세울 겁니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존재를 위한.”

 “듣기만 해도 엄청나네요. 그럼 그 세 명 중에 누구신가요?”

 “셋이라니?”

 “공무원...공과 무와 원....”

 코가 날아갈 기세의 비웃음소리에 사람은 순간 사라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 사람들은 다 가짜예요.”

 “네?”

 “방송에 자기 얼굴 걸어놓고 사는 사람들은 가짜들이야.”

 자신의 최애가 공격받자 살짝 화가 난 사람은 즉각 응수했다.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건 좋지 않아요.”

 “사람 씨, 내가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 알려줄까요? 세상은 99프로의 가짜와 1프로의 진짜로 구성이 되어 있어요. 가짜들은 자기가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허접쓰레기들을 파는 거죠. 연기든, 노래든, 뒤돌아서면 까먹을 개그, 그림, 한 번 읽고 말 책들, 그것들은 다 빌린 거예요. 1프로의 진짜들로부터 곁눈질로 슥 한 번 보고 어설프게 따라 만든 거라고. 완전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인간은, 진짜로 진짜진짜 귀해요. 진짜를 알아보는 눈도 역시 귀하고.”

 주인의 커다란 목소리는 때마침 등장한 단체 관광객이 몰고 온 소란 속에 덮였다. 깃발 든 가이드를 따라 줄을 맞춰 공무원의 돌담을 빙 둘러보며 환호성과 카메라 셔터 소리를 쉬지 않고 발산했다. 주인은 그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강연을 이어갔다.

 “저기 저, 저들 같은 게 가짜의 대표들, 사진 한 장 찍었다고 내 것이 되었다고 착각하는 것들. 영화 <매트릭스> 봤죠? 거기 보면 무술도 프로그램을 주입받아서 막 싸우잖아요. 기계가 주입한 환상을 진짜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깨울 메시아가 필요하다는 거죠.”

 사람이 아는 매트릭스라곤 침대뿐이었지만 괜히 물어보면 이야기가 두 배로 길어질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주인은 그런 사람의 경청하는 자세가 참 마음에 든다며 코트 주머니에서 초코바를 꺼내 건넸다.

 “오직 그 분 만이 진짜라고요.”

 “네, 그 분이 그래서 누구신데요?”

 주인의 눈빛과 마주친 사람은 초코바를 다시 돌려드려야 하나 고민했다. 주인은 도무지 ‘그 분’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과 말도 섞기 싫다는 표정으로 사람을 노려보았다.

 “회인이요.”

 “네?......에, 네, 맞아요.” 튀어나오는 물음표를 억누르며 사람은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저 정원에서 회인과 직접 만났어요.”

 그렇게 사람은 카메라 셔터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주인이 공무원 이전 공 게스트하우스일 때 잔디밭에서 열린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낭독회에서 회인과 직접 만난 이야기를 들었다. 서서히 코와 양 볼이 얼어붙고 입술이 굳기 시작했다. 차게 식어가는 몸을 데우기 위해 초코바로 열량을 공급했다. 초코바를 다 먹으면 주인이 기다렸다는 듯이 새 초코바를 꺼내 주었다. 안에 찐득한 카라멜이 든 초코바는 달고 진하고 목이 막혔다. 초코바 네 개 째에서 주인의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었다.

 “초코바를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목이 막혀 켁켁대며 사람이 말하자 주인이 텀블러를 살짝 흔들어 보였다.

 “보드카 안주에 초코바가 아주 그만이거든요.”

 사람은 몸을 떨며 주인과 악수했고 주인은 코트 주머니에 텀블러를 찔러 넣고 유유히 사라졌다. 사람은 가장 먼저 눈에 띈 카페로 들어가 펄펄 끓는 유자차 두 잔을 연속으로 마셨다. 세 잔째 유자차를 시키자 카페 사장이 왜 유자차만 주문하는지 질문했고 보통 때의 사람이었다면 손님이 거의 없는 카페 내부를 오직 자신의 말로만 꽉 채웠을 테지만 이미 하루치 열량을 주인에게 다 빼앗긴 사람은 겨우 한 마디만 답할 수 있었다.

 “회인이라는 사람이...”

 “손님도 이 책 찾으러 오셨구나?”

 사람의 대답을 다 듣기도 전에 카페 사장은 기다렸다는 듯 카운터 아래로 손을 뻗어 책 한 권을 꺼냈다. 검은색 표지에 손으로 쓴 제목 라벨지가 붙은 책, 주인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진짜’라 선언한 책, 사람은 진짜로 책이 등장하자 당황해서 더 말을 잃었다. 세상에서 자신만 제외하고 모두 회인을 아는 것 같았다.

 “여기 이 작가님이 몇 번 오셨거든요. 그 예능 촬영 팀 오기 직전에. 기념으로 한 권을 주셨는데, 샷 4개 넣은 라테를 물처럼 마시더라고요? 그 뒤로 이렇게까지 책이 유명해 질 줄은 몰랐는데.”

 여기도 회인, 저기도 회인, 사람은 분명 방송을 봤는데도 공이 회인의 책을 낭독했다는 장면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카페 사장 손에 든 검은 표지의 책은 지나치게 평범해 보였다. 진짜만이 진짜를 알아보는 법이죠, 그 논리라면 회인의 책을 발견한 공 역시 ‘진짜’일 것이지만 주인은 단호하게 공이 가짜임을 선언했다. 진짜들은 봉헌의 공간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영원히 남겨 내 사랑이 진짜라는 진리를 남기는 존재라고 했다.

 나는 어느 쪽이지?

 낮잠과 같은 생각의 파도에 잠들었다 깬 사람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직접 보니까 어떠시냐고요.”

 “어떤 거요?”

 “이 책 찾으러 온 거 아니세요?”

 아니에요, 나는 제주도에 왔어요, 목적을 가지고, 한라산에 오르기 위해, 그러니까 나는

 “사라지려고요.”

 회인의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사람은 이 한 마디를 남긴 뒤 유자차 세 잔 값을 지불하고 카페를 나왔다. 카페 사장은 오픈 전부터 매일 트위터에 카페 일기를 써 왔다. 이날 카페 사장은 ‘회인 때문에 사라지려는’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의 허구와 과장을 휘핑 치듯 부풀려 썼고 그 글은 공이 회인의 책을 영화화한다는 발표가 기사화된 뒤 끌올되어 ‘회인 신화’의 한 조각이 되었다. 

 실제로 사람은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읽지도 않았고 책 때문에 사라지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 왜 사라지려고 했을까? 주인의 이야기를 과식한 사람은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까먹어 버렸다. 제주도에 온 뒤로 사라는 잠잠했다. 

 학교에 가야 하는데 물이 안 나오고 현관문이 안 열려 어쩔 줄 모르는 꿈을 꾸다 깬 사람은 세수를 하고 패딩 주머니에 지갑만 챙겨 나왔다. 성판악 휴게소에서 물 한 병만 사서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산을 오르며 생각도 정리하고 ‘사라짐’에 대해 진지하게 묵상할 계획이었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는 한라산의 정상으로 향하는 유일한 코스 초입은 완만한 비탈길이었다. 히말라야 등반도 가능한 풀 착장의 등산객들은 배낭도 없이 땅만 보며 올라가는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등산화도 아닌 운동화를 신은 사람의 발을 가리키며 이러다 넘어지면 다칠 수 있고 발이 다 젖을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자꾸만 말을 거는 다른 사람들 때문에 사람은 생각에 집중할 틈이 없었다. 

 사라져야지, 바닥에 닿는 눈처럼, 가지에서 떨어져 나온 잎처럼.

 정말로 눈이 내리기 시작했고 사람의 부모 뻘인 등산객 한 무리가 사람을 벽처럼 에워쌌다. 사람을 학생이라 부르며 비옷을 입히고 주머니에 초코바를 채워 넣고 여분의 아이젠을 사람의 운동화에 채웠다. 

 “학생 혼자 왔어?”

 “한라산 처음이야?”

 “그렇게 발을 디디면 잘못하면 삐끗해.”

 “눈 오는 날 산 들어오기 쉽지 않은데 운이 좋네.”

 산이 하얗게 가라앉았다. 그 위로 나무들이 검은 선으로만 그림을 그렸다. 세상이 흰 색과 검은 선으로 단순해지고 등산객들의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사람들의 벽 속에서 사람은 생각했다. 목이 마르다, 다리가 아프다, 등허리에 땀이 흐르는데 코끝이 시리다, 배가 고프다, 생각은 점점 단순해져 감각에 집중되었다. 사라지려고, 사라질 수 있을까? 무거워지는 종아리와 가빠오는 호흡기와 눈과 땀이 섞여 시린 이마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존재감을 전달하고 있었다. 

 왜 사라지려고 했더라? 

 사람은 다리를 움직이듯 기계적으로 머리를 굴려보려 애썼다. 사라라는 이름이 싫어서? 아버지는 사람이 자신과 다르게 친구도 없이 혼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노래를 들으며 교실 구석에 존재감 없이 구겨져 있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과 다른 삶을 영유하길 바라며 이름까지 지어 주고는 자신과 전혀 다른 성향을 가진 아이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버지의 관심은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사람의 동생으로 옮겨갔고 어머니는 돌보아야 할 사람이 많아 사람에게 깊이 주의를 기울일 틈이 없었다. 그 날 오물로 얼룩진 바지를 입고 조퇴한 사람을 맞이한 건 텅 빈 집이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동생도 점점 말수가 줄어드는 사람의 내면에서 소용돌이치는 폭풍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족들은 사람이 왜 제주도에 가는지 묻지 않았다. 제주도에 가는 지도 모를 게 분명했다. 


 나를 낳은 이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데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사람은 노래하듯 읊조렸다. 

 이렇게 추운데 또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이렇게 사라지려고 하면서 또 이렇게 살아질 수가 있나, 

 사람들은 왜 내게 초코바를 주지 못해 안달인가, 

 눈은 왜 하얀가, 

 나는 왜 사람인가, 

 사람은 왜 배가 고픈가, 


 머릿속으로 O.N.E.의 기타 반주를 상상하며 사람은 노래했다. 사라가 아닌 사람의 목소리로. 사람의 벽 안에서 사람의 노래가 조용히 하늘로 향했다. 하늘로 올라간 노래는 눈이 되어 다시 아래로 가라앉았다. 멈추지 않고 내리는 눈을 뚫고 멈추지 않는 발걸음 속에서 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나무들 키는 점점 작아졌다. 아이젠 때문에 발이 두 배로 무거웠지만 아이젠 덕분에 미끄러지지 않고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갑자기 탁 트인 풍경 앞에서 사람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나무 데크를 따라 걸어가니 진달래밭 대피소 건물이 나왔다. 김밥과 컵라면을 먹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휴게소 구석에서 사람은 남은 초코바를 먹었다. 눈은 그치지 않았고 오늘 기상 악화로 백록담까지 가는 탐방길을 통제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사람 옆에 앉아 귤을 먹던 등산객이 한 시간만 더 가면 되는데 아까워서 어쩌나, 한탄하고 그 옆에서 컵라면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비운 다른 등산객이 이렇게 눈이 오는데 정상 가려다 천국 간다고 말했다. 귤 등산객이 고개를 돌려 사람을 보더니 젊은 사람이 쪼꼬 가지고 되겠냐며 귤과 김밥을 건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의 무릎 위로 음식 탑이 쌓였다. 사람은 천천히 받은 음식들을 모두 먹어치웠다. 쓰레기들을 패딩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사람은 일어났다. 이제 위장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피곤함을 알리는 뇌가, 얼었다가 녹았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손이, 내일 어마어마한 근육통이 불어 닥치리라 경고하는 다리가 사람에게 말없이 말했다. 우리는 네 생각과 달리 쉽게 사라질 수 없다고.

 설사가 나를 치욕에 빠뜨렸다고 생각했다. 내 몸이 나를 배신해서 나를 위기에 빠뜨렸다고, 이 무거운 몸을 벗어던질 수만 있다면, 다시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면서 사람은 깨달았다. 한 번 태어난 이상 사람은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삶의 의미는 스스로 찾아내든가 주머니 속 초코바처럼 타인에게 받아내든가 해야 한다. 

 그럼 나는?

 등 뒤에서 사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안이 아닌 바깥에서 말을 거는 사라는 처음이었다.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고 멈추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사람의 머릿속엔 주인이 사람에게 넘긴 그 이름과 책으로 꽉 차 있었다. 빈자리를 찾지 못한 사라는 사람의 뒤에 남겨졌다.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사람은 감기몸살로 민박에서 골골거리며 사장님께 노트북을 빌려 <공무원 게스트하우스>를 다시 보았다. 잔디밭에서 공이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낭독하는 장면을 유심히 보았다. 그가 읽은 작품은 두 개였는데 「화장실 전쟁」과 「당신만의 드라마」였다. 검은 표지의 책을 손에 들고 공은 느릿하고 확실하게 읽어나갔다.

 이제 사람은 공이 출연한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제주도 여행의 남은 일정 내내 숙소에서 귤을 까먹으며 공의 필모그래피를 샅샅이 뒤졌다. 주인과는 아침 먹는 시간에 한 번 마주쳤고 그때는 사람의 말이 더 많았다. 주인과 사람은 공의 낭독에 대한 의견 대립을 해소하지 못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1년 재수를 선언했고 이듬해 원하던 학교에 합격했다. 합격한 그 해 겨울 영화 <화장실 전쟁>이 개봉했다. 개봉 첫 날 무대인사에서 손을 흔들며 인사하는 공을 직접 보며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사람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다만 사랑에 빠질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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