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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wooRan Oct 26. 2022

공의 역습


 나는 해원의 동의하에 그의 이야기를 전부 녹음했다. 이야기 도중 궁금한 점이 생기면 질문했고 해원은 친절하게 답변해 주었다. 목천이라는 지명부터가 생경했다. 처음에 옥천을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있는 수원시나 소풍으로 종종 갔던 에버랜드가 위치한 용인은 익숙했지만 그 옆에 있다는 목천시는 처음 들었다. 목 국회의원이나 소 목수의 이름도 생소했다. 오히려 목천의 변호사 이름이 익숙했는데, 그는 김의 이혼 소송 담당 변호사였다. 사촌과 내가 찍은 사진을 가지고 와서 불륜의 증거라며 말하는 변호사 앞에서 나는 이혼을 결심한 뒤 처음으로 웃을 수 있었다. 판사는 화를 냈다. 그 사람 덕에 이혼 소송이 예상보다 빠르게 정리된 건 사실이었다. 

 목천 국회의원 손가락 사건이 무엇인지 묻자 해원은 몰스킨 다이어리에 끼워 둔 신문 조각을 꺼내 보여 주었다. ‘세기말 엽기사건’ 제목이 붙은 기사는 목천 동구의 목 국회의원 사무실에 정체불명의 상자가 배달되었고 그 안에 잘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가운뎃손가락 두 개가 들어 있어 직원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목 의원은 그때 서울에 있었고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목천으로 달려왔다고 했다. 

 책방 에티카에서 나온 우리는 가장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 기사를 쓴 기자님을 찾아갔었어요. 목천 옆 수원시에서 통닭집을 운영하고 계셨는데 목천에서 왔다니까 닭을 제 얼굴에 던지려고 하던걸요. 제가 누구고 왜 왔는지 설명을 들은 뒤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어요. 모자와 마스크를 낀 여자가 상자를 들고 왔는데 벙어리장갑을 끼고 있는 모습이 수상하다고 본 사무실 직원 한 명이 여자를 잡았고 상자를 열어 본 다른 직원이 비명을 지르면서 피 묻은 손가락을 떨어뜨렸대요.”

 “그럼 그 여자가...”

 “회인의 생물학적 어머니였죠.”

 사무실로 돌아온 목 의원은 즉각 자신의 여동생을 호출했다. 사건을 목격한 직원들에게 특별 수당과 유급 휴가가 주어졌고, 가장 먼저 현장에 달려와 기사를 쓴 목천일보 기자를 찾아내 기사 삭제를 요구했고, 손가락 봉합 수술을 마친 여자를 정신병원에 집어넣었다. 삭제를 거부한 기자는 정신병원으로 잠입 취재하러 갔다가 해고를 당했고 해원에게도 자세히 설명할 수 없는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아예 목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국회의원 이름을 검색해 사진을 찾아보았다. 뉴스에서 스쳐가듯 몇 번 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그 얼굴 같은 흐릿한 의원들 속에서 유독 선이 뚜렷한 그는 인상 깊은 목소리와 화법으로 정치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았다. 그의 얼굴 속에서 나는 회인의 얼굴을 발굴해 보려 했다. 주민번호도 사진도 없이 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를 직접 만났던 이들의 증언뿐인 인물을 상상하려 애썼다.

 해원은 왜 회인의 이름으로 제주도에 왔었을까.

 캐리어에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가득 채워 넣고 제주국제공항을 나섰던 이는 회인의 이름을 빌린 해원이었다. 책이 세상에 나오기 전 회인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해원은 이야기를 하다 회인의 죽음과 관련된 부분에 맞닥뜨리면 교묘하게 뒷길로 빠져나가 순식간에 다른 이야기로 바꿔버렸다. 대신 해원은 스스로를 회인이라 소개하며 책을 만들고 배포한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회장이 건넨 회인의 원고에서 일곱 편의 글을 골라 편집을 거쳐 인쇄소에 맡겼다.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책을 전부 캐리어에 넣고 제주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는 제주도에 서점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 거의 모든 책방이 회인의 책을 맡길 후보지가 되었다. 카페는 가능한 바다와 가깝고 잘 보이는 곳 중에서 골랐다. 해원의 외모와 화려한 언변 속에서 사장들은 기꺼이 책을 맡아 주었다. 회인인 해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우는 사람도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이 책은 영원히 제주도에 머무를 것이라고 49명의 사장들은 확신했다.

 “그런데, 책이 방송을 탄 건 예상 못한 상황이었군요?”

 내 말에 해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샷이 네 개나 들어간 커피를 그는 물마시듯 평온한 표정으로 들이켰다. 나는 아침에 커피를 마셨기에 레모네이드를 주문했다. 시큼한 맛에 미간을 찌푸리며 메모지에 ‘목천...목 의원.....회인.....공.....’같은 단어들을 끄적였다. ‘회인’과 ‘해원’에 더하기 표시+를 넣고 그 밑에 ‘에티카?’를 써 넣었다. 

 해원이 제주도에 왔던 회인이라면, 왜 에티카의 주인은 해원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분명 책방에서 주인장은 해원과 회인이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대했다. 회인을 만났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필사본 목차 순서를 지적하는 해원에게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에티카의 주인이 거짓말을 한 것일 수도 있다. 에티카는 회인(해원)이 책을 배포한 장소도 아니었고 진본 대신 필사본을 가져다 놓았다는 말도 의심스러웠다. 

 내 메모를 보며 해원은 ‘에티카-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뻥은 아닐 거예요. 난 이 주인이란 사람이 기억나거든요.”

 “그럼 그 필사본도?”

 “순서가 다르고 전체를 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제목들은 일단 맞아요.”

 그는 메모지 뒷면에 원래 순서대로 제목을 적어 주었다.     


1. 인정하는 부분인 것입니다

2. 기다리는 택배는 오지 않는다

3. 나는 너의 아이

4. 화장실 전쟁

5. 당신만의 드라마 

6. 자궁과 무덤

7. 노이어의 공주     


 “왜 그 분은 해원 씨를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그때와 지금 외모 차이가 꽤 있기는 해요. 지금은 살도 좀 오르고 머리도 훨씬 길어졌고요. 제주도에 처음 왔을 땐 두 사이즈 큰 검은 옷 위주로 입고 모자를 쓰고 다녔어요. 공무원 사장님을 제외하고 내가 그때의 회인이었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겁니다.”

 확실히 에티카의 주인은 해원과 회인을 다른 인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3년 전의 해원은 회인이었다. 제주도에 남고 싶다는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그가 쓴 글을 책으로 만들어 제주도에 뿌리내리게 한 해원의 행동력에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가 이 책의 주인공이 된다면 공의 영화 이상으로 성공적인 작품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일이 이상할 정도로 신속하게 잘 풀린다니.

 정말 이상하다. 

 나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응시하는 해원의 옆얼굴을 잠시 바라보았다. 내게는 본능처럼 주어진 오랜 습관이 하나 있다. 행운과 불운은 샴쌍둥이처럼 서로의 몸이 붙은 채로 찾아온다는 것, 두 개의 머리에 동시에 집중하지 않으면 목소리가 더 큰 쪽이 이겨버린다는 것, 행운보다 불운의 목소리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잊지 않는 습관. 김과의 결혼생활은 행운에게만 마이크를 쥐어주다 무시당한 불운의 무시무시한 행패로 파멸에 이르렀다. 지금 제주도에 오자마자 일사천리로 술술 풀리는 일들 이면에 숨은 불운의 키득거림을 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는 해원의 존재는 너무나 완벽했기에 수상했다. 자신의 정체를 숨겨 가며 책을 배포했던 사람이 책을 쓴다는 사람 앞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썰을 푼다? 

 해원이 우리 회사의 숨겨진 의뢰인일까?

 나는 볼펜 똥을 제거하는 일에 온 신경이 집중되는 척 손을 움직이며 별 거 아니라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해원 씨는 이번이 마지막 제주도 방문이라고 하셨잖아요.”

 “맞아요.”

 “두 가지 목적으로 오셨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 중 하나가 책방 에티카였고, 나머지 하나는 뭐였어요?”

 깨끗해진 볼펜 끝으로 그린 동그라미는 완벽한 원형이었다. 그중 하나에 ‘에티카’를 써 넣고 펜을 내려놓았다. 해원은 펜을 들어 다른 원 안에 글자를 써 넣었다.

 ‘도둑’

 “메일이 왔었어요.”

 메일은 한국을 떠날 준비 중이었던 해원을 즉각 제주도로 불러들였다. 지금 제주에 배포된 회인의 책 50권 중 대부분의 책이 사라졌고 완전하게 남아 있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딱 두 권 뿐이며 상황이 심각하니 지금 당장 제주도로 와야 한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당신이 방문했던 장소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라고, 정체불명의 발신자는 경고하고 있었다. 그 말대로 많은 장소가 사라졌고, 간판이 바뀌고, 사람이 달라졌다. 책방을 정리했다는 사장 한 명이 해원의 DM에 답문을 보냈다.

 ‘아직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책을 찾고 계신 분이 있어 반가우면서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애월 책방은 이미 문을 닫았고 재고 정리 중에 회인의 책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습니다. 한번은 돈은 부르는 대로 지불하겠으니 그 책을 넘겨 달라는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작가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팔지 않았습니다.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끼고 모자를 쓴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써 놓고 보면 수상한 사람 같지만 당시에 직접 만났을 때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책은 그 뒤로 도난을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에티카 주인이란 사람이 범인일까요?”

 내가 펜으로 두 개의 원이 겹치는 부분이 빗금을 그었다. 

 “아직 증거는 없으니까요. 며칠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해원은 이렇게 말하며 갑자기 펜을 쥔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장원 씨 도움이 필요해요.”

 “저요?”

 “장원 씨 회사에 회인을 주인공으로 한 책 집필을 의뢰했다는 사람, 제게 메일을 보낸 사람과 같은 인물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죠?”

 “그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어요.”

 해원의 손은 갓 나온 커피 잔처럼 뜨거웠다. 손만큼이나 뜨거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해원의 시선을 피하기 어려웠다.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라, 나는 나를 이용하는 해원을 이용하기로 했다. 어떤 목적으로 나를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기꺼이 끌려가겠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최선을 다할게요.”

 “정말 고마워요.”

 “그 전에 딱 하나, 지금 당장 필요한 게 있어요.”

 나는 해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메모지 귀퉁이에 그린 검은색 책 표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회인의 책을 읽어야겠어요. 원본으로.”

 “아! 그럼 지금 공무원으로 갈까요? 거기에 책이 있어요.”

 해원이 빈 잔을 치우고 나는 메모지를 가방에 넣었다. 오늘 책을 다 읽고 정리한 뒤 내일 서쪽으로 회인로드를 따라 남아 있는 카페와 책방들을 방문하기로 했다. 에티카도 몇 번 더 가 봐야 하고 회인의 책을 회수하려는 사람도 조사하고 육지로 돌아가면 목천시도 한 번 방문해야 할 것 같고, 이 일을 처음 맡았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일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내 옆에 해원이 있으니까. 

 나는 해원의 이야기에 이끌렸다.

 드라마를 좋아하지 않는다. 소설도 만화도 영화도 잘 보지 않는다.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에 내 시간을 투자한다는 게 아깝게 느껴졌다. 국내 출간된 거의 모든 로맨스 소설을 섭렵한 직원 1은 이런 나를 회사 입구에 자리 잡은 수석 보듯 했다. 저 돌덩어리도 이 드라마 한 번 보면 주인공의 절절한 사랑에 눈물을 흘릴 거라며 나를 놀렸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이야기를, 특히 사랑 이야기를 사랑할까? 엄마는 매일 밤 일일 드라마를 꼭 챙겨 보셨다. 주인공 커플을 방해하는 악인 캐릭터를 향해 쌍욕을 하고 둘이 결혼하는 장면으로 엔딩을 봐야만 만족하셨다. 저 봐라, 얼마나 보기가 좋냐? 저 좋다는 사람이랑 결혼하는 게 최고지. 엄마의 말에 부엌에서 마늘을 까며 내가 헛기침을 하면 엄마는 못 들은 척했다.

 천만 가까이 관객 수를 찍은 <재벌 2세는 불치병>을 학생 때 단체관람으로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곧 죽는다는 사실을 숨긴 채 몰래 여자주인공을 바라보는 남자주인공의 눈물 장면에서 극장 안이 훌쩍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스크린 속 우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이순신 장군님이야 뭐야, 그녀에게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옆에서 두 눈이 퉁퉁 붓도록 울고 있던 내 친구는 평온한 내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사람이 되어가지고 어떻게 이런 영화를 보고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냐 나를 비난했다. 사람이라면 응당 사랑 이야기를 사랑한다고 단정하고 이에 호응하지 않는 이들을 무정하다 못 박는다. 너는 사랑을 사랑하지 않는구나, 너는 사람이 아니구나. 

 사랑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들이 정작 자신의 사랑을 바닥의 돌멩이 대하듯 했다. 나보고 독한 년이라 했던 엄마도, 김도, 모두가 드라마 속의 사랑 이야기가 현실로 다가오자 그들은 있는 힘껏 도망쳤다. 낭만적인 사랑의 힘을 굳게 믿던 직원 1이 남자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벌인 일과, 울지 않는 나를 보고 경악한 친구의 요약 불가능한 연애사를 비난할 의도는 없다. 단지 동정할 뿐이다. 사랑을 이야기의 형태로만 소유할 수 있는 인간의 애처로움을.

 해원의 이야기는 뭔가 다르게 느껴졌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두 아이가 만나 물 없는 개천 바닥을 함께 걸으며 서로의 탄생 설화를 지어내는 장면이 수석과 같이 굳건하던 내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아직 읽지 못한 네 편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그 책 안에 내가 평생 궁금해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내게 이 프로젝트가 주어진 우연한 운명의 힘 같은 것.

 오늘 날씨는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투명한 공기가 검은 돌담과 흰 게스트하우스 건물과 푸른 잔디와 푸른 하늘을 얼룩 하나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잘 다듬어진 잔디밭 위 벤치가 그 위에 앉아 우리가 탄 차를 바라보는 인물을 효율적으로 강조했다. 

 누군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 

 한 번도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그 사람이.

 차를 세운 나는 잠시 내리는 것도 잊고 지금 목격한 장면의 의미를 해석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옆에 해원도 나와 같은 상황인 것 같았다.

 “제가 지금 제대로 본 거 맞아요?”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해원은 이미 차에서 내려 그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나도 재빨리 내려 뒤를 따라갔다. 전혀 예상한 적 없는 인물을 향해. 

 제주도에 오기 전 그가 출연한 작품 대부분을 찾아보고 와서 그런지 오래 전부터 아는 사람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공무원의 잔디밭을 거니는 예능 속 모습에 익숙해서인지도 모르겠다. 화면을 뚫고 나온 사람처럼 공은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오랜만이다?”

 숱 많은 검은 머리카락에 선이 뚜렷한 이목구비, 화면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작은 얼굴과 대비되는 큼지막한 손과 발, 어린 나이에 데뷔해 이십 년 가까이 연예계 활동을 하다 돌연 자취를 감춘 스타, 배우 공이 지금 내 눈 앞에 앉아 있었다. 

 호명된 해원은 대답하지 않고 공은 나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쪽은 누구신가요?”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쟁반에 머그잔 두 개를 받쳐 든 브로콜리가 상기된 얼굴로 나오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일찍 돌아 오셨군요....!”

 놀라움과 실망이 뒤섞인 탄식 앞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해원을 보았고 브로콜리는 공을 보았고 공은 해원만을 바라보았다. 

 “강해원 맞지?”

 “맞아.”

 “근데 왜 대답을 안 해.”

 “너 나 알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많이 알 걸.”

 공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브로콜리는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공 뒤로 가서 섰다. 잔디밭의 네 명 중에서 공이 가장 키가 컸다. 햇빛을 등진 채 한 손을 늘어뜨리고 다른 한 손은 귀를 만지작대며 서 있는 모습은 자신이 지금 어떻게 보이는지 다 알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했다. 

 침묵을 깬 건 해원이었다.

 “내가 예의와 준법정신을 갖춘 사람으로서 물어보는 건데.”

 “할 말 있으면 해.”

 “한 대만 쳐도 될까.”

 “뭐?” 이 말은 나와 브로콜리가 동시에 외쳤다. 내가 해원 옆에 바짝 붙고 브로콜리는 쟁반을 벤치에 내려놓고 공 옆에 섰다. 해원과 공 두 사람이 진심으로 팔을 휘두른다면 주먹이 얼굴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서 있었다. 

 공이 웃었다. 

 “너 진짜 기억 안 나?”

 “뭘 기억하라는지 모르겠고 왜 반말하는지도 나는 이해를 못하겠는데.”

 다시 한 번 더 현관문이 열리고 이번엔 공무원 사장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불렀다.

 “거기 손님, 정원이었나? 아무튼 잠깐 이리로 좀 와 봐, 그쪽도 같이.”

 뜻밖에 호명된 나는 같이 불려 들어가게 생긴 브로콜리와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자리를 절대 놓칠 수 없었지만 사장 역시 우리를 불러들이겠다는 의지가 강력했다. 나는 흉흉한 눈빛을 주고받는 공과 해원을 남겨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브로콜리가 투덜거렸다.

 “당장이라도 주먹 오고갈 상황에 말릴 사람은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사이 아니고 그럴 사람들도 아냐. 그대들은 나 좀 도와서 이것들 좀 정리하자.”

 사장은 거실 한구석에 놓인 상자를 가리켰다. 흙 묻은 당근이 박스 가득 들어 있었다. 

 “아는 삼촌한테서 받은 거야. 저걸로 파운드케이크 만들 거야.”

 “손님을 부려먹어도 됩니까?” 브로콜리는 투덜거리며 앞치마를 하고 당근을 꺼내 씻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이 옆에서 불러주는 레시피에 따라 중탕기에 계란과 흑설탕을 넣고 휘저었다. 당근을 채 써는 브로콜리의 현란한 칼질 사이로 그가 이곳에서 공을 찾아낸 이야기가 끼어들었다. 

 “느낌이 왔어요, 처음부터, 「도둑맞은 편지」 아세요? 「검은 고양이」로 유명한 그 작가가 쓴, 이름이 왜 기억이 안 나지, 아무튼 그 소설에 따르면 무언가를 숨기기에 가장 좋은 곳은 의외로 가까운 곳, 숨기 위해서도 설마 거기 있겠어? 하는 곳이 최적의 은신처가 된다고 해요. <화장실 전쟁>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전혀 예상 못한 은퇴를 한다, 그 영화는 회인이라는 작가의 작품이 원작이다, 그 책은 제주도에만 있다, 배우님이 그 책을 본 장소 역시 제주도에 있다.”

 브로콜리는 공무원 2층에 주목했다. 방송 때만 해도 객실로 쓰인 2층이 어느 순간 막혔고 두어 명 상주하던 게스트하우스 스텝들은 전부 떠났다. 애월에 자리를 잡은 브로콜리는 몇 번 기습적으로 공무원을 방문했고 심증만 가득 쌓이던 중 오늘 드디어 확실한 증거를 잡은 것이다. 그 증거란 공 본인이 직접 1층 거실로 내려온 순간이었다. 

 나는 옆에서 웃는 얼굴로 채썬 당근을 갈아 반죽에 섞고 있는 사장을 바라보았다. 

 “이런 손님을 가만히 놔뒀어요?”

 “여기 누구 있다고 동네방네 소문낼 사람은 아니라고 봐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꽤 정확하거든.”

 “제가 물에 빠지면 제일 먼저 입부터 가라앉을 사람입니다...만.”

 칼질 소리가 멈췄다. 

 “저 두 사람은 정확히 어떤 관계일까요...?”

 부엌에서도 거실 창밖으로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훤히 보였다. 브로콜리가 내려놓았던 쟁반을 중심으로 각자 벤치 끝에 앉은 공과 해원은 서로 다른 방향을 응시한 채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해원이 앉은 각도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앉았다. 공이 손을 휘저으며 무엇인가 말하고 있었다. 브로콜리의 몸이 조금씩 창 쪽으로 움직였다. 

 “영화는 봤어?”

 창밖의 두 사람에게 정신이 팔려 질문의 수신자가 나라는 걸 한 발 늦게 깨달았다. 

 “<화장실 전쟁>말이죠?”

 “아직 안 봤으면 2층에 DVD가 있을 거야. 그때 시나리오도 있을 거고, 그것도 같이 있고.”

 사장은 슬쩍 브로콜리의 시선을 살핀 뒤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책 말이야.”

 사장에게서 비 온 뒤 숲에서 퍼지는 것 같은 향수 냄새가 퍼졌다. 퍼뜩 내 머릿속에 용도를 알 수 없던 조각 하나가 예상하지 못한 자리를 찾아 들어갔다.

 “사장님은 왜 목 사장님이에요?”

 “묵 사장님보다는 낫지 않아?”

 “성이 목 씨죠?”

 “나쁘지 않은 접근법인데, 방향이 약간 잘못됐어.”

 모든 재료가 섞인 반죽이 길쭉한 틀 안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오븐에 넣고 30분 정도 굽기만 하면 완성이었다. 방송에서 공과 무와 원이 조식용 파운드케이크나 머핀을 굽는 장면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처럼 당근을 썰고 반죽을 만들어 틀에 부어가며 셋은 서로의 예명에 대해 수다를 떨었다. 가수 원은 이름 끝에 원이 들어가 왜인지 별명이 유치원, 병원, 학원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 뜬금없음이 좋아 원을 골랐다고 했다. 개그맨 무는 이름 가운데가 무였고 촌스럽다고 생각하며 살아오다 어느 날 아무것도 없음의 무無가 가진 힘에 압도되었고 없다는 건 모든 것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예명을 지었다.

 이 흐름대로라면 우리 공은 성이 공이어야 하는데.

 무와 원이 낄낄대며 장갑 낀 손대신 팔꿈치로 공의 옆구리를 찔렀다. 

 전 지금 우리 셋의 소름끼치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소름끼쳐하는 중인데요.

 뭐가?

 비어 있다, 없다, 제로의 공空, 없을 무無, 동그라미 원, 가운데가 비어 있잖아요, 우린 다 비어 있는 사람들이었던 거죠.

 그래서 어제 우리 게스트하우스가 공실이었나? 사장님 직원 잘못 뽑으셨네.

 깔깔거리며 빵이 완성될 때까지 공은 왜 공인지, 자신의 본명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다. 

 “그럼 방향을 살짝 바꿔서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노력하는 모습 좋아.”

 “공 배우님 성이 목 씨죠? 사장님 조카.”

 사장의 웃음소리에 창밖에만 정신이 팔려 있던 브로콜리가 깜짝 놀라 이쪽을 바라보았다. 깔깔마녀 명성에 걸맞은 크고 투명한 웃음소리였다. 두꺼운 오븐용 장갑을 낀 손으로 내 어깨까지 두드려 가며 웃던 사장이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오븐 장갑이 엄지 내밀기가 참 좋네. 자기 참 재미있다.”

 “맞아요?”

 “재미있다는 말이 언제부터 동의의 표현이 되었지?”

 술래잡기하는 사장의 화법에 나는 약간 짜증이 났다. 거실 창만큼이나 투명한 내 표정을 본 사장이 내 손에서 반죽 그릇을 낚아챘다. 

 “올라가서 책 다 보고 오면 빵 다 구워져 있을 거야.”

 “무슨 책이요?” 

 멍하니 되묻는 브로콜리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나는 순순히 앞치마를 벗고 2층으로 향했다. 좁은 계단 옆에 세로로 길쭉한 창이 빛을 들여보냈다. 목 사장의 말투처럼 기이하게 꺾이는 계단은 1층과 2층을 효과적으로 분리시켰다. 계단 끝에 1층보다 작은 거실을 중심으로 문 세 개가 있었다. 책장과 2인용 소파가 있는 2층 거실 역시 통유리 창으로 오후의 빛을 게걸스럽게 받아먹고 있었다. 1층보다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얌전히 햇볕을 쬐고 있었다.

 책등에 아무것도 없는 검은색 책이 한 권.

 커튼이 달리지 않은 창문에서 방해받지 않고 달려드는 햇살이 따가웠다. 누군가 회인의 책을 꺼내 든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기분이었다. 부모의 서재에서 책등이 거꾸로 꽂힌 책을 꺼내는 기분으로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원본을 손에 들었다. 날개 없는 책 표지 위에 라벨지로 제목이 적혀 있고 제목 아래 숫자 ‘1’이 쓰여 있었다. 여러 손을 거친 책 표지와 책장은 구겨지고 너덜거렸다. 뒤표지엔 제목보다 크기가 작은 라벨지로 ‘10000원’이 손으로 쓰여 있었다. 

 목차는 해원이 적어 주었던 순서 그대로였다. 나는 빠르게 1번과 2번 작품을 훑고 3번 「나는 너의 아이」와 「화장실 전쟁」을 순서대로 읽었다.     




<화장실 전쟁>     


 왜 그랬을까?


 가장 먼저 눈에 띈 빌딩 화장실은 번호 키로 잠겨 있었다. 바로 옆 다른 빌딩은 열쇠가 필요했다. 그는 배를 움켜쥐고 심호흡을 하며 흔한 카페 하나 없는 골목을 두리번거렸다. 노란 털의 길고양이 한 마리가 두 눈을 동그랗게 치켜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양이라면 저 화단 구석 모래 위로 이 고통을 뿌려버릴 수 있을 텐데. 화단 뒤로 활짝 열린 출입문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순 빌딩의 내부는 어둡고 계단 반 층 위 남녀 공용 화장실은 인공적으로 밝았다. 소변기도 없이 단 두 칸으로 나뉜 화장실 내부는 터무니없이 커다란 거울 때문인지 넓어 보였다. 첫 번째 칸 변기는 문을 열자마자 닫아버렸다. 그는 변기 안에 가득한 그것을 보아 버린 자신의 두 눈을 뽑고 싶었다. 남은 한 칸은 깨끗해 보였다. 식은땀으로 등 뒤가 흥건했지만 그는 가방에서 물티슈를 꺼내 변기 커버를 꼼꼼히 닦았다. 배 속에서 폭탄이 터진다고 해도 절대 생략할 수 없는 고결한 의식이었다.

 변기에 엉덩이와 허벅지가 닿지 않도록 투명의자 자세로 일을 보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그를 사면으로 둘러싼 벽은 광고 스티커와 낙서, 코딱지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오물들로 난잡했다. 벽에도 몸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숙변 제거에 효과적이라는 경단 광고를 읽었다. 위기가 지나간 뒤 처음에 의식하지 못했던 시궁창 냄새가 훅 느껴졌다. 그는 가방에서 탈취제를 꺼내 허공에 뿌렸다. 며칠 전 들렀던 백화점의 비데가 설치된 매끈한 변기와 은근한 조명, 화장지에 고급 방향제가 갖춰진 화장실이 그리워졌다. 오로지 변기뿐인 이 화장실에서 빨리 탈출해야 한다.     

 그때 옆 칸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퍼를 여는 소리, 상자가 부스럭대는 소리, 테이프를 뜯는 소리, 뭔가를 가위로 자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변기에 든 것을 분명 보았을 옆 칸 사람의 정체가 조금 궁금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물티슈로 밑을 닦았다. 

 거대한 거울 앞 세면대에서 손을 닦는 그의 뒤로 옆 칸 사람이 등장했다. 그보다 머리 하나 더 큰 키에 검은 양복을 입은 그 사람은 한쪽 어깨로 나이키 스포츠 더플백을 매고 머리에 빨간색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      

 거울 속에서 두 시선이 마주쳤다.     

 중절모 한쪽 끝을 들어 올리며 씩 웃는 사람의 양복은 주름 하나 없었다. 양복과 잘 어울리는 구두 역시 먼지 한 톨 없이 반짝였다. 더플백과 중절모를 제외하면 완벽한 차림새라고 그는 생각했다. 여기가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백화점 화장실이었다면. 그는 손 비누를 꺼내 꼼꼼히 손을 닦은 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핸드크림을 발랐다. 중절모는 그가 가방에서 차례대로 물건을 꺼내 쓰는 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가 화장실 문으로 다가가 손잡이를 손수건으로 감싼 채 잡고 돌려 문을 밀고, 다시 밀고, 또 미는 모습 역시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문이 잠겼는데요.”

 중절모는 활짝 웃었다.

 “제가 단단히 닫아걸었으니까요!”

 다시 한 번 시궁창 냄새가 훅 끼쳤다. 빌딩이 지어지고 단 한 번도 청소한 적 없어 보이는 지저분한 바닥과 문이 닫힌 첫 번째 칸의 변기에서 나는 냄새겠지만. 빨간 중절모부터 알아챘어야 했어,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며 그는 이 악취가 눈앞의 중절모에게서 나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했다. 휴대폰을 꺼내고, 악취에 대해 생각하고, 중절모가 손을 뻗어 휴대폰을 낚아채는 모든 일이 동시에 이뤄졌다. 중절모는 그의 휴대폰을 그가 썼던 변기에 빠뜨렸다.

 “어?”

 코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생각과 감정이 따라잡질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중하게 양해를 구합니다.”

 중절모는 첫 번째 칸의 문을 열어 보이며 웃었다. 변기 뚜껑은 닫혀 있고 그 위로 검은 상자 하나가 테이프로 친친 감겨 고정되어 있었다. 

 “뭡니까?” 

 “폭탄입니다.” 

 “저는 농담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엄숙히 말했다. 중절모는 소리 내어 웃었다.

 “전 아주 좋아합니다. 폭탄처럼 화끈하고 거대한 농담이 제 전문입니다.”

 그는 폭탄이라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흰 변기 위 검은 상자는 중절모의 말 그대로 농담처럼 보였다. 지루함을 견디기 위한 유머, 장난, 잠깐의 웃음. 그는 중절모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라는 뜻이죠?”

 “농담이라니까요. 이제 오 분 정도 남았습니다.”

 중절모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말했고 그 순간부터 상자에서 째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농담의 전문가라서, 이 농담은 공간만 파괴할 뿐, 사람을 파괴하진 않습니다.” 

 그는 중절모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폭탄의 위력이 얼마나 될지 감이 잡히지 않았지만, 최소한 변기는 산산조각 날 것이다. 폭탄이 터지고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오물로 더럽혀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니 위장에서 위산이 역류했다. 또다시 당할 순 없어. 신트림으로 따끔거리는 목을 부여잡으며 그는 더듬거렸다. 

 “왜 그래야 합니까?”

 “죽진 않을 테니 안심하시라니까.”

 “그러니까 누굴 죽일 것도 아니면서 왜 여길 폭파를 시켜야 하냐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식적인 공간이 화장실이니까요.”

 중절모는 물이 흥건한 세면대 위로 더플백을 올려놓았다. 그는 자신의 가방을 품에 꼭 안았다. 가방 속에 무기가 될 만한 물건이 무엇일지 생각했다. 물티슈로 사람을 기절시키거나 폭탄을 제거할 순 없다. 

 “화장실이야말로 인간의 타고난 본능을 감추는 위선적인 장소입니다. 똥, 오줌, 침, 본능, 원초적 본능! 원초적, 그리고 본능, 두 단어가 결합한 순간 우리는 사상적 폭발을 경험하게 됩니다. 원초적 본능이라는 추상적인 폭발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역할이 제게 주어진 것입니다. 오늘을 기점으로 세상은 깨닫게 될 겁니다. 화장실은 파괴되어야만 하고, 파괴는 재구성을 요구하며, 화장실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라고.” 

 그는 중절모가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한 손으로 신중하게 가방을 뒤적이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분뇨란 은밀히 처리되어야 하는 인간의 찌꺼기들이죠. 그쪽이 말하는 본능 같은 거창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말에 중절모는 별 대답 없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1분 남았습니다.” 

 “사회는 더러운 찌꺼기를 손닿지 않도록 치워버릴 의무가 있습니다. 배변에 집착하던 아이가 화장실을 가리게 되면서 온전한 인간이 됩니다. 당신의 말은 인간의 논리가 아닙니다.”

 “내 안에서 나온 건 내가 아닙니까?”

 “미성숙한 어린 아이나 손에 똥을 묻히는 법입니다!”

 외침과 동시에 그는 가방에서 탈취제를 꺼내 남자의 눈에 뿌렸다. 중절모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빈틈을 타 재빨리 첫 번째 칸으로 달려가 검은 상자를 뜯어냈다. 테이프는 끈질겼으며 그가 상자를 잡아당길 때마다 변기 뚜껑이 들썩거리며 안에 든 것이 얼핏 드러났다. 드러났다, 뚜껑을 굳게 닫아 둔 기억이, 두 손과 얼굴을 물 내리지 않은 변기에 담가야 했어, 왜? 안 그러면 나체 사진을 전교생에게 뿌려버리겠다고 했거든, 나는 선택할 수 없었어, 더러운 새끼, 진짜 더러운 건 바로,

 그는 토했다. 토하면서 발로 변기 뚜껑을 짓누른 채 온 힘을 다해 상자를 뜯어냈다.      

 상자는 비어 있었다.     

 그가 돌아보자 빨간 중절모는 기다렸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더플백 지퍼를 열어 안에 든 것을 보여주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왜?”

 빨간 중절모의 미소는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재미있지 않습니까? 제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이 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은 예의 바른 자세로 그에게 인사했다.

 눈앞이 새하얘졌다.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다리 안 아파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공이 내 등 뒤의 소파에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내가 서 있다는 사실도 잊고 책에 몰입한 것이다.

 “지금 막 「화장실 전쟁」을 읽었거든요.”

 “재밌죠?”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영화와는 다르네요.”

 실내에서 본 공의 얼굴은 바깥에서 봤던 것보다 탁하고 무거운 빛깔이었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변함없었지만 피부가 거칠고 정돈되지 않은 눈썹이 주인 없는 밭처럼 방치되고 있었다. 땅거미처럼 수염으로 그늘진 턱을 쓸며 공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다른 게 문제가 되나요?”

 어느 선까지 말할까 잠깐 고민한 나는 대놓고 솔직해지기로 결심했다. 

 “영화는 ‘그’와 ‘테러범’이 거의 동일한 분량으로 오프닝부터 거울을 보는 두 사람이 교차되어 등장하잖아요. 원작은 ‘그’의 심리묘사가 훨씬 중요하고 테러범은 그에게 심적 동요를 일으키는 역할이고.” 

 200자 원고지 20장 정도의 짧은 글을 90분짜리 장편영화로 만들기 위해 공은 ‘그’와 ‘테러범’의 과거 장면을 추가하고 화장실에서의 대치도 대걸레나 비누 등 화장실 내부의 소품을 활용한 액션 장면으로 확장되었다. 공은 ‘그’가 아닌 ‘테러범’역할로 등장하면서 테러범의 서사에 무게를 두었다. 

 “이 중절모를 쓴 테러범 캐릭터 때문에 이 작품을 골랐죠?”

 내 설명에 공은 씩 웃으며 머리 위로 보이지 않는 중절모를 들어 올리며 대사를 외쳤다.

 “폭탄처럼 화끈하고 거대한 농담이 제 전문이니까요!”

 “나쁘지 않은 접근법인데 방향이 좀 잘못된 것 같아요.”

 목 사장의 말을 빌려 던진 내 도발에 공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제가 읽은 바로는, 테러범은 ‘그’의 거울상이에요.”

 “거울상?”

 “화장실 거울에서 눈이 마주친다고 했잖아요. 원작에서 자세하게는 안 나오지만, 그는 학창시절에 괴롭힘을 당한 트라우마로 결벽증을 갖게 되었고 농담을 혐오하게 되었죠. 테러범은 그와 완벽히 반대되는 인물이죠, 내 오른손이 거울 속 나에겐 왼손이니까. 더러운 것으로 치부하며 본능을 억누르는 그의 무의식이 폭탄을 숨긴 채로 그에게 다가와 폭발을 종용하잖아요. ‘화장실은 새롭게 태어난다’ 억눌린 것들이 탈출하고 세계는 재구성되며 새롭게 태어난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죠.”

 팔짱을 끼고 내 이야기를 듣던 공이 갑자기 박수를 쳤다. 

 “야 그런 해석은 또 처음인데 와, 세상 흥미진진한데요.”

 “그래서 영화 오프닝에서 거울로 시작하는 장면은 좋았다고 봐요.”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은 소파에 앉은 채로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저기 저 푸들 머리 한 친구 있잖아요, 그 친구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를 해 줬는데, 그 책에 대한 책을 쓰려고 하신다면서요?” 공이 손을 뻗어 회인의 책을 가리켰다. 

 “제가 다니는 회사로 의뢰가 들어왔거든요.”

 “거기에 저도 끼는 게 맞겠죠?”

 예상 못한 공의 발언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인터뷰를 하신다고요? 복귀를 위해?”

 “그것까진 아니고, 전직 배우이자 지금은 일반인 포지션으로 등장하면 되지 않을까, 그것도 재미있는 그림이겠다, 급 생각이 들어서.”

 해가 지는지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점점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공의 그림자가 소파의 빈자리를 길게 차지하고 앉아 나를 응시했다.

 “화제성 하나는 꽤 되겠어요.”

 나는 소파에 앉고 싶었지만 이미 자리를 차지한 공의 그림자를 깔고 앉기에 껄끄러워 계속 서 있었다. 잔디밭에서 해원과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때로 질문보다 침묵이 효과적인 경우가 많다. 공은 누가 툭 건드리기만 해도 속에 든 이야기를 줄줄이 꺼내놓을 기세였다. 

 “이렇게 시작하면 되려나? 사실 제가 이 책을 쓴 사람의 정체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데....”

 “책을 쓴 회인과 제주에 온 회인이 다른 사람이다?”

 “아니, 거기까지 벌써 진도가 나갔어요? 둘이 얘기가 잘 통하셨나보네.” 공은 놀라워하며 자신의 턱을 쓸어내렸다. 

 “그럼 이건 어때요? 사실 <공무원 게스트하우스>는 『일기보다 쉬운 소설 쓰기』를 세상에 공개하기 위해 제작된 프로그램이었다.”

 회인의 책을 품에 끌어안고 나는 공의 그림자 위에 앉았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녹음해도 될까요?”

 “일단 들어 보고 결정할...잠깐만.”

 공이 내 어깨 너머를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계단 위로 머리통 하나가 튀어나와 눈이 마주친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도 껴줘요.” 

 “놀랐잖아요.” 

 “나도 껴 달라니까.”

 복슬복슬한 머리카락을 흔들며 브로콜리가 말했다.

 “나도 그 인터뷰 할 자격 충분해. 나도 할 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근데 왜 나한테는 안 물어봐요?”

 “그건 어젯밤에...”

 어제 브로콜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필사적으로 떠올리며 나는 브로콜리의 분노한 얼굴을 마주보았다. 

 “어젯밤에....상당히 부정적인 의견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반론도 있어야 균형이 맞죠. 내가 어떤 일을 당했는데!”

 흥분한 브로콜리에게 공 역시 흥미를 느낀 모양이었다. 공이 일어나 브로콜리를 자기가 앉았던 소파 자리에 앉혔다. 자신의 스타가 자신을 에스코트한 순간에도 브로콜리의 날뛰는 감정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 같았다.

 “진정을 하시고, 뭐라도 좀 마시고...”

 “이미 잔뜩 마시고 왔어요! 이 얘기는 멀쩡한 정신으로 못 하니까!”

 가까이 앉은 브로콜리에게서 술 냄새가 확 풍기자 나까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단 이 책은 의뢰를 받고 제작되는 것이고, 일단 지금은 자료 수집을 위해서...”

 “내가 그 사람입니다.”

 떨리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며 이야기하는 브로콜리의 모습은 그 자체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반전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스릴러 속 두 번째나 세 번째 반전의 폭로자, 혹은 맥거핀일지 모를.

 “회인 때문에 오름에서 사라졌다는 그 학생이 바로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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