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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Oct 11. 2019

아버님이
죽음으로 남기고 가신 것들

유럽 살이 극한 고독의 여정 33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나에게 다녀가셨었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녘 꿈결처럼 아버님 얼굴이 문득 떠올랐고 한동안 아버님 생각을 했었다는 것을 기억해내었기에. 
아버님은 알고 계셨던 것이다. 나의 마음을. 우리의 상태를. 그 내 마음을 위로해주려고 나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셨던 거였다. 그리고... 당신을 기꺼이 어둠 속으로 던지셨다. 진짜 소중한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그 마음이 스치자 폭포수 같은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님이 생명을 던져 말해주고 간 그 마음이 온 몸으로 전해져왔다. 나를 가리고 있던 분노를 끝낼 수 있도록. 함께함의 감사를 새길 수 있도록.
 
 겨울 동안 나를 부수고 내동댕이쳤던 그 괴물은, 나를 삼키고 남편을 삼키고 내 아이를 삼키고 우리를 불구덩이 속에 내던졌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신음하였고 서로를 할퀴었고 심장은 갈기갈기 찢겨 버려졌었다. 그리고 이제야 그 날 선 칼날이 무력하게 소멸되는 것을 본다. 내가 분노하였던 실체는 '그들'이 아니라 '내 안의 것'이었기에. 

 내가 '밉고 싫은 것'이라 여겼던 것의 실체는 실은 남편과 시어머님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내가 경험하는 감정'이었음을 알았다. 
 
그 반복되는 '싫다는 감정'이 '대상을 통해' 극도의 거부감으로 표출되는 것이었음을. 증오심은 철저하게 내가 걸려있는 감정, 그 그림자에 대한 내 본능적인 거부반응이었다. 싫지 않다면 거부감도 없고 미움도 없을 것이기에. '싫다'의 대극에 '좋다'가 있었기에 거부감이 들고 못 견디는 것이었다. 
 
 혐오감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극단적인 방어기제로 '공포의 감정'이었다. 허약한 나를 지켜내려는 안간힘이 무력해졌을 때 나타나는 일종의 강박적 반응. 그것 역시 나를 '혐오의 대상'과 반대편에 상정해놓고 있기에 발생하는 것이었다. 결국 그게 무엇이든 '규정하는 순간' 그 반대편에 만들어진 대극으로 '대치 구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혐오한다는 것은, 내 안에 내가 만든 '두 잣대' 사이의 팽팽한 힘 사이에 함몰돼버리는 것과 같았다. 그 모순 안에 갇혀버려 꼼짝할 수 없는 상태, 그리하여 극도의 신경증이 발동한 상태. 
 

아버님의 죽음은 나에게 강력한 전기충격과 같았다

 
 결국은 '대극의 통합'이었다. 대극을 풀어야만 내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알았다. 대극이 없는 자리에서만 나는 진정한 평화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그 말은, 나를 '부자유'로 데려간 것이 실은 남편이나 어머님이라는 '타인'이 아닌, 내가 만들어놓은 나의 어떤 '생각' 어떤 '규정'일 수 있음을 의미했다. 그 기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유'로 가는 길이었다.
 
 나는 다짐했다. 남편대로 어머님대로, 그대로 두어도 내가 불편하지 않은 상태, 그 지점으로 내 마음을 옮기리라고. 좋고 나쁨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구속되지 않는 나. 그러한 내가 되리라고.
 
 그랬다. 나는 '내 마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랬기에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의존할 무언가'를 찾았었기에. 내가 남편을 선택했던 것도 내 마음이 쉴 수 있는 단 하나의 '의지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늘 '의지할 누군가'를 필요로 했었다. 하지만 내가 찾던 자유는, 사람이라는 타인에게서도, 신이나 선지자의 가르침으로도, 선한 의지라 믿었던 마음으로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끝에선 커다란 혼돈과 배신감이 나를 무너뜨렸고 나는 늘 빈 손으로 길을 나섰을 뿐이다. 
 
 결국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어떠한 환경의 변화도 나를 본질적으로 자유롭게 해 줄 수 없었다. 자유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그 모든 것들이 실체가 없는 환영이며, 모두가 내 마음이 지어낸 꿈이라는 앎만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이걸 알기 위해 나는 그 모진 경험들 속을 뜨겁게 통과해야 했었다는 것을. 
이제야 무심히 받아 안게 되었다. 내가 의존한 어떤 것에서도 자유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자유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자유는 다만 여기, 내 마음 안에서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비로소 몸에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짐을 느낀다. 수많은 곳을 찾아 헤매었던 날들. 나는 어두운 골목길을 언제나 혼자 서성였었다. 자유롭고 싶다는 그 마음 하나를 얻기 위해. 하지만 '나의 두려움'은 내 마음을 가리고 나를 끝까지 데리고 가지 못했다. 그렇게 긴 시간의 강을 풀 죽어 흘려보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 삶의 방식을 그 관성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게 그 두려움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가겠다고. 고개를 떨구고 있던 나를 다시 끌고 가야 하는 것 또한 나임을 마주하며.

 

존재하는 그대로 함께하며,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는 삶


그렇게 
존재의 무게를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었다.


 응석 부리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 안을 때... 나는 나 다워지고 그때에 비로소 다른 이에게 힘을 줄 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 가장 큰 '생의 연료'가 고갈되어 있었다는 것을. 

세상에 나와, 시간이라는 순간을 살아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깊은 연민의 마음이 올라왔다. 그 모두를 가장 큰 마음으로 안아주고 싶다는 마음이 가득 차올랐다. 아무런 두려움 없이.
 
 아버님의 장례식날은 온종일 먹구름과 함께 세찬 바람이 불어대었다. 전 날까지 화창하던 날씨가 갑자기 사납게 돌변해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님이 지금 이 곳에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그 말씀을 전하여 주시러 왔다는 것을.
 
아버님의 마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더없이 포근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
너희 이야기의 시작은 약속이란다. 
 분노의 흐름을 끊어내는 약속. 
 그리고 그 시작은 위대한 사랑이란다. 
 함께 있다는 건 멋진 일이란다"


아버님은 말없이 미소 지어주고 계셨다. 나는 아버님의 그 손을 꼬옥 잡았다.


 



* 아버님의 마지막 말 인용 : 영화 <그을린 사랑> 에서 마지막 엄마의 편지 내용
 

* 메인 그림 포함 모든 그림 : Edvard Mun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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