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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Jan 14. 2023

사람은 사람으로

모든 직장인은 항상 사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지만, 나도 그럴 줄은 몰랐다.


나는 아닐 거라고 뻥뻥 소리쳤던 것들의 명단에 나이 들수록 민망스럽게도 하나둘씩 이름을 올리게 된다.​


직장인이 된 지 1년이 넘어 일이 제법 익숙해진 지금은 일보다 사람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비중이 훨씬 큰 것 같다. 일을 잘 모를 땐 남이 기분 나쁘게 대한다는 것이 느껴져도 곧장 잊어버릴 정도로 일에 허덕였는데, 이젠 다른 사람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에 반응할 여유가 생긴 건지 그런 것들이 더 눈과 의식에 들어오게 됐고 그만큼 스트레스도 더 받게 됐다. 밝고 싹싹한 막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고 은근히 기 센 애'의 이미지도 동시에 가져야 했다. 직장인 친구들과 각자 하소연을 하며 소위 '호락호락하지 않은 년'이 되자고 우스갯소리로 다짐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야 내가 덜 피곤하고 덜 힘들었다. 속으로는 달달 떨고 있어도 표정은 당당하게 내 권리를 주장하고 내 할 말을 해야 무례하게 선 넘는 사람들을 퇴치할 수 있다. 어디에서도 막내인 사회초년생이라면 더더욱,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일을 다 떠넘길만한 호구가 될 뿐이다. 일적으로 아닌 건 아닌 애라는 이미지를 심어야 내가 편해질 수 있다. 하지만 화가 나면 눈물부터 나는 스타일이라, 내가 아닌 그런 모습을 장착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며칠 전 심한 저혈압인 나의 건강을 생각해 주신 건지 혈압을 쫙 끌어올려주신 분이 있었다. 묘하게 깔보는 듯한 태도와 표정, 사과하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긴 눈빛.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사과하면 이건 정말 내가 당신보다 아랫사람이오-인정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할 말을 했다. 속으로는 열불이 나고 또 눈물이 차오르는데 떨리는 목소리를 눌러가며 조목조목 내 입장을 이야기했다.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는데, 자꾸만 묘하게 무시하는 듯한 상대의 말투와 표정이 떠올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이런 취급받으면서 일해야 하나, 화가 솟구칠 때마다 애써 여기저기 처박아둔 스트레스들이 튀어나오면서 동시에 가슴속에 품은 사표가 꿈틀꿈틀 나오려고 했다. 속으로 분을 삭이며 연 카톡에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의 말들로 가득했다. 누군가는 얼른 얼굴 보자며 연락을 해오고, 누군가는 웃긴 짤을 공유해 준다. 엄마는 오늘 저녁 이 메뉴 먹을까? 하고 귀여운 이모티콘을 보낸다. 점심식사 후 다른 날과 다른 길로 산책을 가며 오늘 OO 씨 머리 좀 식히라고 이쪽 길로 돌아봤다고 하는 동료분도 계셨다. 집에서 가져온 간식을 나눠주시는 분도 계셨고, 나보다 더 화를 내며 욕해주시는 분도 계셨다.



사람으로 받은 스트레스 사람으로 풀어지는 게 참 아이러니다. 한 인간에 환멸감이 들다가도 또 다른 인간의 따뜻함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다. 1명의 빌런으로 100의 스트레스를 받아도 작은 위로들이 모여 다시 상쇄된다. 물론 빌런이 1명이 아닌 게 문제긴 하지만.. 인생에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좋은 사람들의 손길로 이 사이클이 고장 나지 않고 돌고, 그래도 그다음 날 다시 새로운 기분으로 출근을 하는 것 아닌가 싶다. 뜬금없이 아무 맥락에 고맙다고는 할 수 없으니 글로나마 조용히 고마움을 보낸다. 인류애를 당신들 덕분에 잃지 않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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