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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Feb 13. 2023

어떤 꿈은 말하면서 더 선명해진다

몇년 간 가슴을 조금이라도 뛰게 한 꿈조차 달리 없었던 나에게, 마음에 아주 자그마한 파동을 일으키는 꿈이 생겼다. 그리고 그 꿈은 신기하게도 오빠와 이야기하면서 조금 선명해졌다. 어떤 꿈은 말하면서 더 선명해지나보다.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하는 무의식 속에 있던 것들이 어떤 단어와 문장들로 만들어지면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느낌이다. 어쩌면 스스로에 대해 다년간 쌓아온 불신때문에, 이를테면 '너 또 이러다 흥미 잃어버릴거지? 그냥 취미로 해' 같은 생각들 때문에 꿈의 언저리에서 빙빙 돌다가 그게 의식되기도 전에 단념했을 수도 있다. 그러다 가장 편한 누군가에게 말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나 꽤 마음이 있었구나, 말하다보니 더 근사하다' 라고 내 마음을 내가 알아차리는 다소 역순행적인 순서랄까. 누군가를 남몰래 좋아하다가도, 그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간 왠지 모르게 내가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좋아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 같아 마음이 몇 배 더 증폭될 때가 있다. 내가 그 사람 많이 좋아하는구나, 마음이 생각보다 컸구나, 하고. 내 언어에 내가 놀라기도 한다. 그렇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공표할 때처럼, 공중에 붕붕 떠다니는 '해보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가 마음에 콕 닿아 내 꿈으로 명명되는 순간, 그걸 바라는 마음은 한층 더 선명해지는 것 같다. 




한동안 꿈이 없어 무기력했다. 삶의 방향성이 없어 방황한 지 꽤 오래다. 누군가는 마치 날 때부터 그 꿈을 갖고 태어난 것처럼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단순한 밥벌이로서의 노동에 만족하면서 큰 열정도, 그렇다고 현상태를 뒤엎고 싶을 만큼의 깊은 번뇌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기도 한다. 그리고 나는 항상 그 사이 어딘가에 서있었다. 어떤 날엔 나도 허황된 꿈이라도 하나 갖고 싶다고, 비현실적이어도 생각만 해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했다. 장래희망이 뭐냐는 물음에 대통령이라고 당당하게 질러버리는 유치원 어린이의 깡이 갖고 싶었다. 넌 나중에 뭐하고 싶어? 라는 질문에 반짝거리는 눈, 말하면서도 벅차올라 옴짝달싹 못하는 입술, 본인이 그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저절로 들썩이는 안면 근육으로 대답하는 그 모든 이들이 부러웠다. 똑같은 백수 삼식이 처지여도, 내 눈엔 꿈을 가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나보다 훨씬 더 앞서 가있고 더 많은 걸 가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모든 게 다 버거운 날엔 차라리 내가 야망이 아예 없는 인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큰 인물은 되지 못할지언정, 남들이 보기에는 따분한 인생이어도 정작 본인은 꽤 나쁘지 않게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꿈은 꿈일뿐이라고 스스로 이미 받아들인 그런 사람이었으면 했다. 어느 한쪽에도 속하지 못해 이리 저리 왔다갔다 기웃기웃거리는 도돌이표 같은 모습에 질려 차라리 한 극단에 서있고 싶었다. 



그러다 아주 아주 오랜만에 해보고 싶고 배우고 싶고, 잘해보고 싶고, 어렴풋이 그려지는 내 모습이 꽤 마음에 드는 꿈이 생겼다. 열정에 불타올라 잠 자는 시간조차 아까운 그런 뜨거운 마음은 아니지만, 조용히 상상하다보면 마음이 따땃하게 뎁혀지는 딱 그 정도의 온도. 그동안 파편처럼 흩어져있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퍼즐처럼 하나씩 맞춰질 것만 같은 은은한 짜릿함, 딱 그 정도. 어쩌면 내가 추구했던 소소한 것들이 이 꿈 하나에 다 담겨질 수 있겠구나, 싶어 아직 입구에도 못갔지만 찾은 것만으로도 큰 성과로 느껴진다. 

점점 더 선명해질 수록 더 다가가고싶은 그런 꿈을 꾸고 싶다. 최종 목표가 벌써부터 다 그려지는 그런 꿈이 아니라, 가까워질 수록 이건 이런 매력이 또 있네, 생각보다 더 멋진 일이구나, 이렇게도 확장할 수 있겠구나, 초콜릿 상자에서 하나씩 꺼내 음미할 수 있는 꿈. 초콜릿 상자라고 하니 생각나는데, Life is like a box of chocolates, you never know what you're gonna get, 포레스트가 한 말처럼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 꿈을 꾸는 내가 퍽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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