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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Feb 23. 2023

너그러워지고 싶다




밥을 다 먹고 소파에 앉아 습관처럼 인스타그램을 켰다. 아무 생각없이 웃고 싶을 땐 인스타그램 돋보기 아이콘을 눌러 자동으로 넘어가는 릴스를 보는 것이 제격이다. 다리 한쪽을 올리고 고개는 소파 등받이에 비스듬히 걸쳐 앉은듯 누운듯한 자세를 취하면 본격적으로 손가락으로 릴스 넘기기 외에는 그 어떤 움직임도 없는 게으름 피우기에 최적화된 상태가 완성된다. 요즘 유행하는 각종 챌린지들이 나온다. 요즘 애들은 길거리에서 핸드폰 세워두고 느닷없이 춤을 막 추던데, 이런게 다 그렇게 찍는거였네. 이름 모를 수많은 브랜드 광고들도 손가락을 따라 빠르게 지나간다. 그러다 '임밍아웃했을 때 남편의 반응' 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나온다. 잠깐 손가락을 화면에 고정시켜 영상을 보기로 한다. 집 문에 [아빠가 된 걸 축하해!]라고 써붙여놓고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는 남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리는 아내의 귀여운 서프라이즈 이벤트다. 뒤돌아보라는 말에 어리둥절하게 문쪽을 본 남편은 입을 막고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눈시울을 붉힌다. 영상은 끝나가는데 귀여운 두 부부 사이로 불청객이 하나 끼어들었다. 그 짧은 찰나에 주책맞게 같이 코가 빨개져있는 나. 누군지 도통 모르겠는 부부에게 찾아온 새 생명을 일단 눈물로 축복부터 하고있는 나였다. 나는 종종 웃자고 킨 인스타그램에서 파병 갔다온 아들과 조우하는 아버지 영상에 눈물을 훔치고, 길을 걷다가도 함박 웃음을 한 채 두팔 벌리고 있는 할아버지에게로 아장아장 걸어 폭 안기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 그 장면이 너무 아름다워 눈 주변이 뜨끈해진다.






나는 눈물이 아주 많은 사람이다. 예전에는 그만큼 감수성이 풍부하고, 덕분에 남들의 감정에 더 잘 이입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지나치게 많은 눈물에 스스로도 깜짝 깜짝 놀라는 일이 다반사다. 보는 사람들 눈에서 눈물 한번 뽑아보겠다고 제대로 작정하고 공격해오는 것들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냥 좀 찡하네 싶은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눈물을 줄줄 흘린다. 혼자서 눈물을 참느라 눈알을 이리 저리 굴려보고, 나오려는 눈물을 다시 눈 안으로 물리적으로 욱여넣으려고 턱을 쳐들다 눈꼬리 옆으로 주르륵 흘린 적도 셀 수 없이 많다.



인간사란 복잡다산하고 인간의 감정은 그보다도 더 얽히고 설켜 때론 본인조차 모순적으로 느낄 때가 있다. 영화 <인사이드아웃>에는 5가지 감정을 대표하는 캐릭터들이 나온다. 기쁨이, 슬픔이, 버럭이, 소심이, 까칠이. 영화에서는 그때 그때 상황실을 지휘하는 캐릭터에 따라 주인공의 감정이 바뀌지만, 현실에서는 둘 이상의 감정들이 환장의 콜라보를 할 때가 많다. 슬픈 눈으로 웃고 있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마주할 때처럼. 그러니 사람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 상황을 일일이 다 나열하기란 힘들 수 밖에 없다. 왜 우세요? 물어보면 본인도 모를 때가 종종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감정은 신기하게도 어떤 임계치를 넘어서면 반대라고 생각되는 것들로 표출될 때가 있다. 이를테면 분노가 끝까지 차올라 머리 꼭지를 훽 돌려버리면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때가 있다. 어처구니 없음의 웃음.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된다면 이미 눈은 저멀리 돌아간 상태이니 일단 냅두시라. 또 반대로 너무 행복한 상황을 마주했을 땐 그 행복이 정말 나의 것인지, 이게 정말 나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믿져지지 않아 눈물이 나올 때가 있다. 우리가 어떤 벅차오름을 느낄 때면 눈물샘을 자극하는 무슨 무슨 신경세포 무슨 무슨 뉴런이 분명 있는 것 같다. 마음 졸이며 몇날 몇일을 밤잠 설치다가 마침내 화면에서 합격이라는 두 글자를 보게되면 웃음보다 눈물부터 나오는 것처럼.






인간은 이렇듯 일관성도 없고 이해하기 어려운 고등 동물이지만, 그렇다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의 행복에 눈을 붉히는 건 참으로 오지랖 아닌가? 언제 봤다고 낯선이의 감정선을 끌고 와 나와 이어붙이는거지? 생판 모르는 사람의 행복에 그렇게 반응하면서 가끔은 정말 가까운 사람의 순수한 행복에도 질투심이 은밀하게 솟구쳐 오름을 고백한다. 애써 변을 하자면, 아마 가까운 사이일수록 그 사람의 삶을 더 속속들이 알고, 그만큼 자꾸 내 삶과 포개어 비교하게 되기 때문이겠지. 기사에 나오는 수석 합격생엔 '와-대단하네 진짜 열심히 했나보다!' 하면서 엄마 친구 딸이 같은 시험에 합격한 소식은 왠지 모르게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다. 부끄럽게도 그럴 때면 "걔가 그렇게 공부 잘했나? 몰랐네-" 하고 주제를 넘어가버리는 찌질한 모습이 기어이 나오고야 만다. 가까운 사이일 수록 분명 같은 선상에 서있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훨씬 앞서가있는 기분이 들어 괜히 심통이 날 때가 있다.


때론 가까운 사람보다 먼 사람에게 더 너그러워지는 것 같다. 누군가의 어머니, 아버지로 산 30년- 으로 자막을 시작하는 어느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휴지를 찾으면서 정작 나의 부모님의 주름살에는 무심하기 짝이 없다. 엄마는 점점 힘이 빠져가는데, 그것도 모르고 듣기 싫은 잔소리 들었다고 눈에 불을 키고 달려드는 딸이다. 가장의 뒷 모습을 찍은 사진 한 장에 대한민국의 모든 아버지들이 짠해지면서 그들이 어깨에 짊어진 삶의 무게를 어렴풋이나마 느껴보려 애쓴다. 그렇지만 정작 매일 같이 집을 나서는 아빠의 출근길을 이불 속이 따뜻하다는 이유로 배웅조차 안하는 철없는 딸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우리는 자주, 가까운 사람에게 더 무심하고 냉정하다.



모르는 사람을 축복해주듯이 가까운 사람에게도 열심히 박수쳐줄 수 있는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다 사연이 있겠지, 하며 한껏 발휘되는 낯선 이들을 향한 이해심을 주변 사람들에게도 기꺼이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이름 모를 누군가의 기쁨에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가까운 사람의 일에는 자꾸만 질투심이 삐져나오고, 가장 가까우면서 가장 그 속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간장 종지만한 그릇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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