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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연 Feb 22. 2023

오늘도 돌 하나를 쌓았다



소중한 날로 이어지는 다리는 필시 평범한 날이라는 돌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보잘 것 없는 돌 하나를 쌓은 밤이다. 특별한 날이었다.
최민석 <베를린 일기>, p76



서촌을 걷다가 5평도 채 안되는 작은 책방이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고요히 열려 있어 들어가보았다. 책마다 책방 주인이 발췌한 문장들을 쓴 메모지가 가지런히 클립으로 끼워져있었다. 하나씩 읽다가 멈춘 문장이다. 몇번 더 곱씹어 읽으니 더 좋다.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라 얼른 사진으로 찍어왔다.




마음같지 않은 하루였다. 도무지 마음에 한 개도 들지 않는 하루였다. 야심차게 예매해서 간 사진전은 냉정하게 말해서 심각하게 보잘 것 없었다. 원하던 느낌의 사진들도 아니었고, 배우거나 참고할만 것도 딱히 없었다. 그냥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각 사진의 의미와 중요성에는 깊이 공감한다. 모든 예술이 그렇듯, 내가 좋지 않았다는 건 그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을뿐이다.) 하나 하나 찬찬히 볼 생각으로 약속 시간 전 여유를 잡고 나왔는데, 1시간도 채 안돼 나온 것 같다. 한낮이라 전시에 나와 빗질하는 청소 아주머니만 있었던 건 오히려 좋았지만, 높은 층고에 울리는 내 발자국 소리는 공허하기 짝이 없었다. 한 시간 걸려 왔는데. 진짜 이게 다인가.



시간도 많이 남았겠다, 아쉬우니 어깨 무겁게 가져온 카메라라도 잘 써보자는 심정으로 밖으로 나가 정처없이 걸었다. 여긴 종로 아닌가. 도심 한복판에 경복궁이 있고, 서울 사람에게도 진짜 서울같은 종로. 여기 저기 걸어다니면서 무작정 찍어도 잘 나올 것 같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동네. 봄이 오려다 뒷걸음 친건지, 겨울이 마지막 남은 야성을 뽐내고 가는 건지, 코끝 손끝이 시리도록 추운 날이었다. 카메라를 맨 목은 뻐근해져오고, 혹시나 필요할까봐 바리바리 챙겨온 아이패드까지 들어간 가방 때문에 어깨도 아파왔다. 그래도 괜찮은 사진 몇장만 건질 수 있다면 아무렴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삼청동의 끝에서 서촌 끝까지 걷는 내내 거의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초심자의 패기로 가끔은 우선 찍고보는 무대뽀 정신도 필요한데, 또 '느낌이 오지 않는다'며 고집스럽게 렌즈 뚜껑을 꾹 닫고 있는 나였다. 그나마 찍은 사진들도 아마 메모리카드 안에서 영원히 잠들 게 뻔했다. 선뜻 찍지 못하는 나도, 찍어도 꼭 이렇게 마음에 안들게 찍는 나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쩌자고 사진을 찍겠다고 덤벼들었을까. 역시 예술은 선천적 재능이 있어야지. 나는 왜 늘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것의 간극에서 방황할까. 뭐 하나 크게 잘하는 것 없이 모든 걸 평균 이상으로만 하는 건 가혹한 재주다. 너무 꿈같은 꿈을 꾸는건가. 이 나이 먹도록 이렇게 순진하다니. 퇴사 후 하루가 온전히 내 입맛대로 움직이는 행복에 취해 애써 외면해왔던 불안감이 한번에 터져버렸다. 지금이라도 다시 될 가능성이 있는 공부나 할까. 내 손에 들린 카메라는 유난히 앙증맞아 보였고 나는 그보다 더 작게 느껴졌다. 수심 깊은 어른용 수영장을 튜브 하나 끼고 기웃거리는 어린이가 된 기분이었다.




축축 처지는 기분을 애써 주워담아 부여잡으면서 걷다가 들어간 책방이었다. 투명테 안경을 쓰고 노트북을 하고 있는 책방 주인의 들릴듯 말듯한 인사에 화답하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들어가자마자 잔잔하게 들리는 엔니오 모리꼬네의 러브어페어 OST에 기분이 살짝 나아졌다. 우연히 들어간 책방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마침 나오고 있을 확률을 따지며 괜히 기분을 달래려고 한 것일 수도 있다. 무의미함을 참지 못하는 나는 헛걸음, 헛수고, 허투루 날린 시간들을 끔찍이 싫어한다. 오늘 하루가 헛걸음의 연속처럼 느껴졌는데, 햇살에 책방에 날리는 먼지조차 반짝거리는 그 작은 공간이 하루 중 처음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제서야 먼 길 온 의미가 조금이라도 생기는 것 같았다. 책마다 옮겨적은 문장들도 좋았다. 관련 없는 문장들까지 하나 하나 내 기분을 띄워주려는 것 같았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혀 보다가 시선이 멈춘 문장이 바로 그 문장이다.



내 욕심은 또 너무 멀리 앞서 나가있었다. 이만하면 됐다, 미련없이 손 털 수 있을 때 그만하겠다고 마음 먹었건만 또 당장의 결과에 급급해져있었다. 오늘은 보잘 것 없는 돌 하나를 쌓은 날이다. 내일도 보잘 것 없는 돌 하나를 낑낑대고 들고와 쌓을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 나에게 사진을 의뢰하는 그런 일은 내일도 그 다음날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봐주지 않지만 열심히 쌓겠지. 열심히 물장구 치지만 물 밖에서 봤을 땐 미동도 없는 백조처럼. 이 돌들이 어딘가로 이어지는 길을 만들어준다면 무의미하진 않겠다. 좋아하는 몇가지에 대해선 깊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지금은 그 과정에 있는 것이다.



최민석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독특하진 않은 이름이라 그저 동명이인이겠거니, 했는데 마침 내가 이 날 아침에 읽은 <꽈배기의 맛> 이라는 책의 저자이시기도 하다. 괜히 신기한 우연이네요. 어떻게든 의미를 부여하려는 건 어쩔 수 없는 습관인가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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