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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황 Sep 29. 2021

손 끝이 회색인 갈색 장갑 2

봄, 가을




손이 시린 아침을 대비해 가져온 장갑을 이지수가 김윤경에게 건넨다. 낮은 온도 탓에 체온계는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지수와 김윤경은 체온계를 핫팩 사이에 넣는다. 실외용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체온계는 낮은 온도에서는 잘 켜지지가 않는다. 운이 좋아서 켜져도 차가운 곳에 있으면 먹통이 되거나 온도 측정이 정확하지 못하기 때문에 기계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손보다는 체온계를 먼저 덥힌다. 김윤경이 이지수에게 핫 팩을 하나 더 넘겨준다.


체온계 하나는 주머니에 넣고 하나는 쓰고 다시 먹통 되면 바꿔가면서 써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안전관리팀 오면 오늘 한 번 말해봐야겠어요. 추워져서 체온계가 작동이 안 될 때가 많다고.

제가 안 그래도 안전관리팀이랑 보건진료소에서 나오는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실외용으로 따로 나오는 체온계를 찾을 수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겨울 되면 걱정이어서 체온계를 감쌀 수 있는 걸 알아보고 있다고 하시는데 잘 모르겠어요.


차가운 체온계를 덥히는 일로 이지수는 하려던 말을 잊어버렸다. 아침 시간은 바쁘게 지나가고 김윤경은 먼저 밥 먹으러 간다며 이지수에게 인사를 하고 멀어져 간다. 이지수가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다. 대학생으로 지냈던 4년의 시간보다 더 다양한 생각을 하고 있다고 이지수는 생각했다. 가을에 캠퍼스를 걸었던 일이 있었을까. 기숙사로 가는 길에 있었던 넓은 잔디밭에서 이지수는 한 번도 친구들과 어울려 본 적이 없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 잠을 깨울 목적으로 산책길에 같은 학과 사람들이 놀고 있는 모습은 종종 보았지만 이지수가 그 속에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왜 그랬을까. 어린 시절 만들었던 자신의 세계의 문을 닫아버리고, 즐거운 대학 생활의 장면을 없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지수는 이제야 그 이유를 생각해 본다.  


언제 왔는지 김윤경은 이지수 앞에 서 있다. 점심은 무엇으로 먹었는지 물어보려다가 김윤경의 얼굴을 보고는 말문을 닫는다. 김윤경은 짐짓 단호한 표정으로 이지수 앞에 서서는 망설이는 듯하다. 김윤경은 이지수의 눈을 피하고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말한다. 이지수는 조금 놀라면서도 김윤경을 찬찬히 살핀다.


소란이 있던  제가 중재할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줄 곧 생각했었는데 용기가 나질 않아서 이제야 말씀드리네요.

저도 청소하시는  말씀만 듣고 시작한 일이 그렇게까지 불편한 상황으로 이어질지 몰랐어요. 윤경 씨한테도 물어보고 상황을   살펴볼걸. 이제 괜찮아요.

그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요. 저는…

저한테 분리수거를 말하신 분한테 전후 상황을 들었어요. 하는 일이 많아서 도와 달라고 하셔서 입구 검역소에서 근무할 때는 제가 하기로 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까지는 요구하지 않고요. 괜찮아요.


김윤경은 울었다. 어떤 일이 있었던 사람처럼 훌쩍이다가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다가 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한 번씩 고개를 들어 이지수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했고, 그때마다 이지수는 괜찮다고 말했다. 이지수는 김윤경을 보면서 눈물을 참고 지냈던 시간이 떠올랐다. 오래전에는 인정받는 것에 목말라 있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되는 것에도 관심을 쏟았었다. 이지수가 원하는 학과가 있었던 것도 그래서 다시 다른 대학에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었던 것도 원하는 것을 하면서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지수는 일 년이 채 되지 않아서 이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했고 새롭고 두려운 캠퍼스 안에서 한 가지만 선택했다.


변해야 할 것이라면 부정적인 감정에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이지수는 다짐했다.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일이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일인 것인 줄 몰랐고, 잘 알려진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위로를 받을 만큼의 슬픈 일인 줄 몰랐던. 그래서 위로를 칭찬으로 돌려받기 위해서 했었던 선택을 이지수는 후회했다.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성공으로 덮어서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 시간이 공허했다. 되돌아보면 큰 실패도 그렇다고 큰 성공도 아니었지만 무엇보다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척도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이라는 것이. 이지수는 자신의 삶이 무엇으로 되어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래서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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