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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주황 Oct 11. 2021

노랑과 주황 사이의 귤

가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대학을 떠날 생각에 쫓기고 있었을  이지수는 뭐든 먹어치우는 사람처럼 어떤 것에 집중하고 있지 않는 시간에는 불안이 붙어 있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집중하고  나가야 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오로지 학점에만 매달리는데 골몰했다. 학점이  나오면 다음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은 듯했고, 기대 이하의 성적에는 미끄러져 내려가는 돌멩이들이 마음속에서 떨어졌다. 어떤 근거로 그렇게 생각했는지, 이지수는 생각해보면 어처구니가 없다고 느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이지수에게는 당연했고, 매달릴 것은 오로지 성적을  받고 장학금을 받고 미래를 보장받는  같은 느낌에 기대는 것뿐이었다. 지난한 시간 동안 운이 날에는 그 생각밖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런 날들은 대게 예상치 못하게 온다. 그날은 보통 때보다  침울했던 날이었다. 예상했던 학점을 받지 못해서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문득 가방 안에 있는 귤이 생각났고 의식하지 않은 채로 껍질을 갔다. 한산한 버스 안에서 귤을   베어 물었을 때의 달콤함이 이지수의 기분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저 귤의 새콤달콤함이 주는 순간의 기쁨에만 집중할  있었던 순간.


울음을 멈추는 듯하다가도 김윤경은 다시 울었다. 이지수는 괜찮다고 말했고 조금 다가가서 김윤경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이지수는 김윤경이 우는 것을 보면서 어느 날 먹었던 귤이 생각났다. 지금 이 순간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지수는 요즘 들어 말들이 입안에 만들어지기 전에 녹아내리는 일이 잦았다. 더 상할 감정이 없었으므로 말을 하려다가도 멈짓하는 것이 스스로 신경 쓰일 때도 있었지만 그뿐이었고 생각이 말로 바뀌는 일도 줄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김윤경의 말을 듣고 등을 쓰다듬어주는 순간에 이지수는 무엇인가 꼭 말해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용기를 먼저 내줘서 고마워요. 저도 용기를 한 번 내 볼게요. 저는 사는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고 생각해왔어요.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는 어떤 것도 그릴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겨요. 그래서 제일 원하는 그림을 상상하죠. 생각보다 그림 그리는 일은 오래 걸리고 처음에 생각했던 것을 그리기가 점점 어려워진다고 느껴져요. 빨리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중간중간 찾아오고 그림은 조금씩 다르게 그려지기도 해요. 예전에 이 대학에 다닐 때는 원하는 그림이 아직 마음에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리고 싶은지 기억나지가 않아요. 사는 것 같지 않아서 저는 다시 잃어버린 곳으로 돌아왔어요. 찾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거든요. 그러니까. 혹시나 그리고 싶은 것이 아직 있으면 그리세요.  


놀라기도 당혹스럽기도 한 표정으로 김윤경은 이지수를 본다. 어떤 감정이 섞인 채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조금 놀란 채로. 이지수도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말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다. 어떤 힘에 끌리는 것처럼 이지수는 김윤경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말한다.


지금 대학생활을 생각해보면 그때 실패는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었어요. 내가 원한 선택했고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설 마음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요즘은 어떤 성취나 좌절도 내 것이 아니라 그런 분위기에 취해서 지내는 것 같은 그래서 나중에는 실제로 이걸 느끼도록 누군가 만들어 놓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것의 결과로 이런 감정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김윤경은 불안감에 쌓여서 회피한 일을 더 이상은 미룰 수 없었다고 이지수에게 말했다. 해야 되는 일을 하지 않은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지수는 쓰레기를 분리수거하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확신이 드는 데로 말을 이어갔다. 차들은 아주 가끔 정문을 지나갔다. 이지수와 김윤경은 차분한 침묵 속에서 한동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말을 먼저 시작한 것은 김윤경이었다. 자신이 다녔던 학교보다 이곳 나무가 더 좋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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