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 넷플릭스 다큐: 셔커스 Shirkers (2018)
둘째 아이가 어렸을 때 엄마랑 같이 다니는 유치원에 다녔다. 9시 30분에서 11시 30분... 고작 2시간이지만 온전히 아이와 함께 있었으니 말하자면 나도 그 유치원을 다닌 셈이다 ㅋㅋㅋ 코로나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던 2022년이라 모두가 마스크를 하고 바깥놀이를 하던 기묘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거기서 또 다른 한국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인이지만 '혼혈인가?' 갸웃거릴 정도로 머리색이 밝은 갈색에 가까웠던 2살 배기 귀여운 아기였다. 내 딸도 3살 언저리, 아기들은 너무 어려서 한 공간에 함께 있을 뿐 서로 대화를 하진 않았는데 ㅋㅋㅋ 나와 그 아이의 엄마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의 과거에 대해, 현재 우리는 왜 여기에 있는지, 미래에 어디서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서. 언니의 밝은 에너지만큼 따뜻한 캘리포니아의 햇살 아래 아이들은 뛰놀고 엄마들은 웃고 떠들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언니의 한국행이 결정돼서 아쉽게도 다시 얼굴을 보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언니가 인스타그램으로 쪽지를 보냈다. 아는 동생이 있는데 나랑 잘 어울릴 거 같다며 소개해주고 싶다고. 아, 만나라면 만나야지. (군인이냐 ㅋㅋㅋ) 그렇게 나는 주선자 없이 나랑 잘 어울릴 듯한 여자분을 소개받게 되었다. 스탠퍼드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한국과 샌프란을 오가며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그녀. 겉으로는 너무나 상큼 발랄한, 속은 주선자 언니의 말대로 멋진 여자였다. (마침 우리 둘째랑 같은 반인 한국 남자애 집이랑 그녀의 집은 코로나 기간 내내 매일같이 만날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내는 집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세상이 참 좁다. 항상 착하게 살아야지 ㅋ)
그렇게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님과 지인이 되었는데...... 마침 얼마 전에 넷플릭스 월정액 돈값을 뽑아야겠다는 결심이 들었고 일주일에 영화 1편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예전에 넷플릭스에 올라온 '나의 문어 선생님' 다큐를 워낙 인상 깊게 보았고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 다큐는 종종 (허구의) 영화보다 더 믿기 힘든 허구처럼 보이기에 다큐를 먼저 훑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인 찬스를 쓰기 위해 다큐 감독 지인에게 쪽지를 보냈다. 감사하게도 추천 목록을 바로 보내주셨는데 그중에 가장 먼저 추천해 주신 것이 2018년 선댄스 영화제 수상작인,
Shirkers (셔커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화장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서 눈부신 광이 오르는 찬란한 10대, 그 아름다운 시절에 영화를 만들자고 뭉친 3명의 소녀들이 싱가포르에 있다. 샌디, 재스민, 소피. 그녀들은 셔커스(Shirkers)라는 제목의 로드 무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이 얼핏 들으면 뭐 서커스 극단에 대한 영화인가? 싶을 텐데...... 일상에서 흔히 듣기 힘든 영단어인 Shirk는 '회피한다'라는 뜻이다. 1874년 시인 Arthur O'Shaughnessy가 자신의 작품 "Ode" 안에 Mover and Shaker라는 표현을 넣었고, 세상을 움직이고 영향을 끼치는 자들을 뜻하는 이 표현은 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영어권 사회에서는 관용구처럼 쓰이고 있다. 1990년대 초, 당시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자기 영화의 주인공 S로 출연한 19살의 샌디는 여기에 한 부류의 사람을 더한다.
"In this world, there are movers, there are shakers, and there are SHIRKERS."
1992년, 아시아 대륙의 작고 작은 도시 국가 싱가포르. 도시이면서 하나의 나라이기도 한, 그곳의 구석구석을 촬영한 로드무비 '셔커스'의 영상미는 지금 보아도 독특하고 아름다울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 내가 좋아라 하는 일상과 환상의 경계에서 넘나드는 분위기 안에 독특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손모양 총으로 사람을 죽이고 죽일 만큼 좋아할 조수를 찾아다니는 킬러 S, TV를 사랑하는 엄마와 함께 사는 옆집 소녀이자 S의 사이드킥 TB(TV, TB 발음 구분 힘듦 ㅋㅋㅋ) 그 집 아들 TJ는 빨간 장난감 오토바이를 타고 말썽을 찾아 동네를 돌아다니고, 우스꽝스러운 안경을 쓴 시력검사관 라만과 꽤나 맘에 들었는지 S가 납치해 간 라만의 꼬맹이 아들 하리오. 말도 안 되게 큰 대형견을 데리고 다니는 간호사 세실리아와, 간질이 있지만 춤추는 걸 좋아한다는 그녀의 딸 몬스터... 등장인물을 그대로 글로 묘사한 건데 이미 분위기가 기묘하지 않은가? ㅋ
이렇듯, 싱가포르 독립영화계의 기대를 잔뜩 받는 유망주로 주목받은 '셔커스'는 돌연 행적을 감춘 감독 조지 카도나와 함께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조지는 샌디, 재스민, 소피의 영화 선생님이자 멘토였고 친구였다. 다큐를 통해 증언된 바에 의하면 그는 분명 아티스트로서 매력이 있던 거 같다. 하지만 삐뚤어진 예술가 특유의 -- 자기가 원하면 다른 사람이 아프든 말든 해 버리고 마는 아주 몰상식한 -- 파괴성도 있던 거 같다.
그는 소녀들이 힘을 쏟아부어 만든 70통의 필름을 들고, 아니.... 청춘의 꿈을 훔쳐 도망쳤다 (!!!!!!!!!) 소녀들은 분명히 존재했지만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치 10톤 트럭에 치인 (재스민 인터뷰 중)" 것처럼 고통스러워했다. "있지도 않은 영화에 대해 말하는 미친 사람(샌디 내레이션)"이 된 샌디는 감당할 수 없는 상실감에 짓눌려 셔커스가 되었다. ㅠㅠ Mover였고 Shaker였던 그녀의 삶이 Shirkers가 되어 거꾸로 돌아가게 된다. 가장 처음 영화 제작을 했었지만......영화 평론가가 되고, 그 후 영화 학교에 입학하는 걸로. 그러던 2011년, 어느 날 조지의 전부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게 된다. 조지가 4년 전인 2007년에 죽었으며 (비록 사운드는 소멸되어 있지만 ㅜㅜ) 그의 유품에 70통의 필름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 다큐는 탄생과 상실, 재창조, 그리고 마주하는 용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샌디는 2015년부터 영화 셔커스, 그리고 조지 카도나와 관계된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과거로, 아니 엄밀히 말하면 미래로 나아간다. 그리고 2018년 이 영화가 완성되어 각종 영화제에 출품되었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수상의 영예까지 안게 되었다. 행방이 묘연해진 필름 덕분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긴장감도 있고, 30년 전 세상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영상미를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지만 정신차려보니 이 영화는 바로 다큐멘터리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것이 내가 사는 현실, 제 2의 조지 카도나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맴도는 악당이라고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했다.
조지 카도나의 망령을 생각하면 마음이 한풀 가라앉지만 결코 한없이 가라앉기진 않는다. 샌딩 담담한 나레이션을 따라 그녀들의 패기넘치는 도전과 모험, 고통스러운 상실과 아름다운 회복, 20년 전 필름이 데려다주는 일상과 환상의 줄다리기를 롤러코스터처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은 다양한 감정으로 크게 부풀어 간다. 볼만한 영화로 엄지 척 추천을 올리고, 이번 2월 넷플릭스 다큐 보기 프로젝트는 계속된다!!